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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3:17:1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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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파일:also sprach zarathustra_Friedrich Nietzsche.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장르 철학서[1]
언어 독일어
발매일 1883년

1. 개요2. 줄거리
2.1. 서설
3. 상징4. 미디어 믹스5. 패러디6. 기타7. 읽을 만한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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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만인을 위한, 그러나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 형식으로 철학을 풀어낸 프리드리히 니체의 대표작이다. 니체는 이 책으로 자신이 "인류에게 이제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큰 선물을 주었다"[2]고 말했다. 그만큼 독보적인 책이라는 것.(보편적이란 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그가 가장 치명적인 오류인 '도덕'을 최초로 창조한 사람이고 그만큼 도덕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사상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경험을 쌓았으므로, 그와 대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3]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 머무르던 동굴에서 하산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내용으로, 주로 철학서로 분류되지만, 옴니버스로 구성된 소설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며, 여러 등장인물과 사물, 시간과 공간에 상징이 담겨 있는 등 문학적 요소도 많은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883년에 출간된 1부를 시작으로 1년 동안 집필이 계속되어 2, 3부가 각각 출판되었다. 4부는 출판사 없이 40여 부만을 사비로 간행해서 8명의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만 했다. 1~4부의 합본은 1892년, 나우만(Naumann)에서 니체 전집을 기획하여 발간되었다.

2. 줄거리

2.1. 서설

차라투스트라는 30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산 속 동굴에서 10년간 고독을 즐기다가, 어느날 그는 자신의 넘쳐흐르는 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자 산을 내려오기로 결심했다. 산을 내려온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일종의 '즐거운'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을 내려와서 첫번째로 만난 사람은 숲 속의 성자였다. 성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왜 내려왔냐고 묻자,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신을 믿고 있었던 성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거나 적선을 하는 방식으로 선물을 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이 선물인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오해하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단지 자신의 넘쳐흐르는 풍요와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서 자신의 풍요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선물은 동정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람들의 의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에 대한 믿음'이 성자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는, 성자와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직도 듣지 못했구나!"

성자와 헤어진 차라투스트라는 가까운 도시에 들어섰다. 그곳 시장에는 줄타기 곡예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들에게 자신의 넘쳐흐르는 지혜의 가르침 ㅡ 위버멘쉬에 대해서 말해보지만, 군중들은 줄타기 공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도리어 되지 말라고 말한 '인간말종'이 되겠다고 아우성이다.

바로 그때, 줄타기 곡예사가 두 개의 탑에 걸쳐진 밧줄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중간쯤 이르렀을 때 탑에서 작은 문이 열리더니 광대[4]가 나와 재빠른 걸음으로 앞에 있는 곡예사[5]를 뒤쫓았다. 그러고 광대는 "너는 지금 너보다 뛰어난 자의 앞을 가로막고 있잖아!" 이렇게 소리치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줄타기 곡예사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에 줄타기 곡예사는 그만 넋을 놓고 허둥대다가 밧줄을 헛딛고 곤두박질쳤다. 곡예사는 그렇게 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기꺼이 위험을 업으로 삼은 곡예사를 높게 평가하곤 그를 묻어주기로 결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곡예사를 등에 메고서 길을 나섰다. 깜깜한 밤이었다. 도중에 광대의 경고를 받았으며, 도시의 성문에서 무덤파는 자들과 만나기도 하다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어느 외딴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차라투스트라에게 빵과 포도주를 건냈다. 노인은 심지어 죽은 곡예사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먹으라고 말하고는 축객령을 내렸다.[6] 그 후 차라투스트라는 길과 별빛에 의지해서 동이 틀 때까지 걸었다. 그는 늑대로부터 보호하고자 죽은 자를 속이 빈 나무 속에 넣고서는, 곧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난 차라투스트라는 아침놀의 햇살을 받으며, 살아 있는 길동무[7]가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위버멘쉬의 가르침은 군중이 아니라 길동무에게 말했어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다짐을 하면서 정오[8]에 이르자 하늘 위에 뱀을 목에 휘감은 독수리 한 마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날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짐승들이다!"[9] 차라투스트라는 문득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위험한 길임을 깨닫고는[10] 좀 더 영리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하강은 시작되었다.

3. 상징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상징과 패러디로 가득차 있어서 상징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 그저 시집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에 어느 정도 상징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 각각의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4. 미디어 믹스

5. 패러디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숙명적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지 中
패러디가 많은 책이다. 내용 곳곳에 신약성서 패러디가 많으며, 책 제목도 자라투스트라[23]의 패러디로 볼 수 있다.

6. 기타

7. 읽을 만한 글귀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데에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만한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나는 사랑하노라. 하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서문 4절[25]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 홀로 가련다! 그대들도 이제 홀로 떠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아니 차라리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그대를 속였을 수도 있으니... 언제까지나 제자인 채로 머무는 것은, 스승에 대한 제대로 된 보답이 아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명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아라.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1부 22.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살을 하며
바로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 中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의 길' 中
그대들은 "삶이란 견디기 힘들다." 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아침에는 긍지에 가득차 있다가 밤이면 체념하고 마는가?
삶이란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우리는 모두 사랑스러운 노새가 아니던가?
한방울의 이슬에도 몸을 떠는 장미 한송이와 우리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삶에 친숙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데 친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알면서 두려움을 제압하는 자, 심연을 보지만 자긍심이 있는 자가 대담한 자다.
심연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붙잡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아 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닷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테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1] 옛날에는 소설장르로 분류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거의 대부분 철학장르로 분류하고 있다.[2] 『이 사람을 보라』 서문 4절.[3]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을 모든 사물의 운행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바퀴로 본 최초의 인간이었다. 도덕을 힘, 원인, 목적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번역한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이미 답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인 도덕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오류를 인식하는 점에서도 최초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 도덕의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사상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경험을 쌓았다. 역사 전체가 사실상 이른바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명제 대한 실험적인 반박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237~239)[4] 교양 교육을 받은 엘리트. 도덕과 종교를 대표하는 자이다.[5] 교양 교육(도덕, 종교 등)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 하지만 마음이 유약해서, 자신보다 늦게 출발한 엘리트(광대)가 자신을 넘어서자 끝내 좌절하고는 죽고 만다.[6]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교적인 '이웃 사랑'을 상징하는데, 노인은 삶이 죽어버린 자에게도 이웃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일화는 동정에 기반한 그리스도교의 믿음 강요를 비판하고 있는 장면이다.[7] 군중들은 타인이 정해놓은 길을 쫓아가기만 급급한 사람들을 말한다면, 길동무는 어설프게나마 '자신의 길'을 갈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8] 여기서 정오는 만물의 '그림자(거짓과 위선)'가 사라지는 시간을 말한다.[9] 독수리는 긍지를 의미하는데, 이제 '자기 자신'이 긍지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10] 위험한 까닭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11] '자신의 선택에 의해 (옳고 그름이) 필연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은, 객관적인 옳고 그름은 없으며 오직 주관적인 옳고 그름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2] 여기서 어릿광대는 사회가 원하는 가치, 즉 돈, 명예, 이성 등을 추구하며 안정된 생활을 꿈꾸는 엘리트를 말한다. 사회가 하라는대로 해서 물질적으로 성공한 엘리트를 말한다. 그렇다고 어릿광대가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니체는 (그리스 로마 전통을 추구하긴 하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은 무시하기 때문이다.[13] 꿈에서 양치기로 나오는데, 뒤에 그 꿈의 양치기가 차라투스트라 본인임을 밝힌다.[14] 정말이지 나는 모든 것을 다 좋다 하고 심지어는 이 세계를 최선이라고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자를 나는 매사에 만족하는 자라고 부른다. 모든 것에서 맛을 느낄 줄 아는 매사에 대한 만족. 이런 것은 최선의 취향이 아니다! 나는 극도로 반항적이고 까탈스러운 혀와 위장을 존중한다. "나"와 "그렇다"와 "아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씹고 소화한다는 것. 이것은 진짜로 돼지의 특성이다! 허구한 날 '이-아(옳다)' 하는 것. 이런 일은 나귀와 나귀 정신을 가진 자만이 배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97~398)[15] 나귀가 비극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짊어질 수도 팽개쳐버릴 수도 없는 짐에 눌려 몰락한다는 것... 철학자의 경우.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6)[16] 언젠가는 그대들의 씨앗으로부터 나의 진정한 아들과 완전한 상속자가 자라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녕 요원하지만. 어쨌든 그대들 자신은 내 유산과 내 이름을 물려받을 자가 아니다. (중략) 더 높고, 더 강하고, 더 승리를 구가하고, 더 쾌활한 자들을, 신체와 영혼이 올곧은 자들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웃는 사자들은 반드시 출현하고야 말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554~555)[17] 내 아이들이 첫봄을 맞이하여 서로 가까이 나란히 어우러져 함께 바람에 흔들이며 푸릇푸릇 자라고 있다. 내 정원과 최고의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참으로! 저런 나무들이 나란히 어우러져 함께 바람에 흔들리며 푸릇푸릇 자라고 있다. 내 정원과 최고의 통양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참으로! 저런 나무들이 나란히 어우러져 있는 곳, 바로 거기에 지복의 섬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는 그 나무들을 뽑아내어 따로따로 심을 것이다. 각각의 나무가 고독을 배우도록, 반항과 예지를 배우도록. 나무들은 각각 불굴의 삶의 살아 있는 등대로서, 울퉁불퉁 마디와 굽어 있는 모양새와 휘어지는 강건함으로 바닷가에 서 있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29~330)[18] 내가 여전히 옳다는 증거로, 다른 불개에 대해 말할 테니 들어보라. 이 불개는 진짜로 대지의 심장으로부터 말을 하지. 그의 숨결은 황금의 입김과 황금의 비를 내뿜는다. 그의 심장이 그것을 원하지. 그러니 재와 연기 그리고 뜨거운 점액이 그에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불개로부터는 웃음이 오색찬란한 구름처럼 흩날린다. 이 불개는 너의 꾸르륵거림과 침뱉기와 내장의 격통을 혐오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275)[19] 3부 7장 「지나쳐가기에 대하여」[20] 니체는 왼편 왕이 비교적 말을 아낀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왼편의 왕과 오른편의 왕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21] 학자는 "실로 나는 나 자신의 피로 나 자신의 지식을 키워오게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거머리가 자신의 지식이라는 것.[22] 가장 추악한 자는 하나의 왕관을 쓰고 두 개나 되는 자줏빛 띠를 두르고 있었다. 추악한 자 모두가 그러하듯 그도 변장하고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548)[23]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본명 Zaraϑuštra(자라수슈트라). 독일어로는 Zarathustra(차라투스트라)며, 영어로는 Zoroaster(조로아스터).[24] 이하 백승영 교수 강의 동영상 25분 20초부터 참조[25]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