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오하라 에이시(大原永錫) |
자 | 달천(達天) |
본관 | 신안 주씨[1][2] |
출생 | 1915년 10월 29일[3] |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 고원동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호월리 고원동마을)[4] | |
사망 | 1944년 9월 3일[5]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105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주영석은 1915년 10월 29일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 고원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호월리 고원동마을)에서 아버지 주병룡(朱秉龍)[6]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영달(權永達)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34년 사립 울진제동학교(濟東學校)를 졸업하고 그 후 잡화점 점원과 면포조합(綿布組合)·하우차마차조합(荷牛車馬車組合) 등의 서기로 근무하였다.
1939년 10월 1일 그는 임시헌·남원수·노하순·주진욱·남정성·전만수·전원강·남복이 등과 만나 독립운동을 펴기로 뜻을 모으고 1939년 10월 28일 남복이의 집에서 회합하여 조선독립 및 농민사회제도의 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창유계(暢幽稧)를 조직하였는데, 창유계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계모임을 가장하여 소규모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그들은 결성 이후 1942년 5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내부 조직의 결속강화, 반일선전 활동에 주력하며 시기적절한 독립운동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는 창유계의 계원으로 참여한 외에 1941년 12월 6일 준향계(準香契)에도 참여하였다. 준향계는 1938년 12월 6일 임시헌·남원수·전찬문(田燦文)·장세전·최효대 등 울진 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인데 창유계와 조직규모·이념·활동방침이 유사하였다. 그러나 1943년 3월 일본 경찰에 창유계와 준향계가 발각되어 와해되었고 곧 체포되었다.
1944년 5월 31일 대구지검에서의 예심으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7월 21일 대구지검의 1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해군형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다가,
그해 8월 23일 고등법원에서 보석 보증금 100원을 당일에 납부할 시 출옥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 보석금을 내고 출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결국 그해 9월 3일 순국하였다. 그가 순국한 후 10월 5일 고등법원에서 2심이 개정되었으나 공소 기각 결정이 났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4년 10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