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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9 01:46:14

1994년 주사파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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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발단3. 전개
3.1. 8월 25일 이전까지3.2. 재야세력의 비판과 보수 언론들의 반격3.3. 파이널, 여의도클럽 발언과 그 이후
4. 출처 및 관련 자료

1. 개요


1994년 7~8월 사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진 안보/공안 관련 파문을 일컫는 말.

2. 발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1994년 7월 8일에 북한김일성죽자 7월 11일에 이부영 등 몇몇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김일성 장례식에 조문사절단을 파견하려는 문제를 거론했는데 우파 언론들은 이를 비난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7월 13일자 기자수첩 <속 조문 사절론>을 통해 일부 의원들의 조문사절론을 "주체사상을 콧잔등에 바르고 다니면서 어른들의 속을 썩히는 일부 철없는 풋나기 학생들과 동열에 서는 것"이라고 평가했고 사설 <조문 의원들의 경우>에선 "그건 다음 선거 때 이들을 뽑은 선거구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태도 역시 한결같았다. 김영삼은 "어떤 형식의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간주해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당초 김영삼은 "남북정상회담의 합의 원칙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보였다가 불과 며칠 뒤 "북한의 상황은 대단히 불안하고 김정일이 권력을 확실히 승계할지도 불확실하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이러한 태도는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북한은 7월 15일부터 대남 비방방송을 재개하고 남한과의 공식적인 전화통화까지 거부해 남북관계가 다시 냉랭해졌다.

3. 전개

3.1. 8월 25일 이전까지

조문파동이 불거진 시기인 1994년 7월 18일에 서강대학교 총장 박홍 루카 신부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 주재로 전국 14개 대학 총장을 불러내서 연 오찬 자리에서 "주사파의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해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의 말의 요지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이 있으며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북한은 해외 6개 지역의 범민련 본부에서 팩시밀리를 통해 남한의 주사파에게 지령을 보낸다. 이미 북한은 학생들에게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미군기지 반납운동 등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문파동'에 이어 '주사파 파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정국은 공안정국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가 그동안 학생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왔지만, 국가수호를 위해 무차별 폭력과 낡아빠진 공산주의를 맹종하는 학생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사파 학생들에 대해 강력한 척결 의지를 밝히면서 '반공 히스테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으며 이 사실은 다음날인 19일자 각 신문의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특히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우리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 "제2의 박 총장이 필요하다" 등의 캠페인성 기사를 양산했다.

특히 같은 날 중앙일보 사설 <병균은 색출해야 한다>에서 "주사파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등식은 대학 내부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며 향후 북한을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삼아야 하느냐 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된다"는 식으로 주장했으며 다음날인 20일자 조선일보 사설 <김정일의 직접지도>에서 "박 총장의 발언을 증거로 주사파가 북한의 관장하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또 박 총장은 8월 1일에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했고 12일에는 종교, 언론, 정당, 문화계에까지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8월 8일 국회 국방위에서 민주당의 임복진 의원은 국군에 주사파가 1천 5백여 명이 있을 것이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검찰이 박 총장의 발언을 근거로 해 발표한 '한총련 북한 교신내용'은 이미 상당수가 과거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 공개된 내용이고 또 이러한 자료가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도 될 수 없다. 또 명백한 자료를 가졌다고 자신한 박홍 신부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는데 그가 말했다는 증거라고는 3년 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북한 사람들이 남한 전대협 사무실에 팩스를 보냈다는 걸 직접 확인했다는 것과 1994년 6월 중국 연변의 한 세미나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들었다는 얘기뿐이었다. 그러나 운동권 학생들이 북한에 팩스를 보낸다는 게 북한의 지령에 따른다는 증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거니와 반공주의자가 북한 대학교수의 말을 믿는 것도 이상했다. 또 박 총장은 학생들에게 들은 얘기도 있다고 했으나 그 학생들을 밝히면 이들이 맞아 죽을지도 몰라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더 나아가 그가 지목한 사노맹 역시 PD 계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보수 언론과 사회 유력인사들은 박 총장을 지지했다. 7월 21일에는 서강대 경영대 교수들이 먼저 박 총장 지지 성명을 표했고 23일에 20개 대학 총장들이 박 총장 지지 및 학원 내 친북세력 근절 성명을 발표했다. 심지어 "증거를 요구하라는 건 공산당을 모르는 소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도대체 이 나라 정부와 안기부는 뭘 하고 있길래 일개 대학 총장이 알고 있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왜 여태까지 몰랐냐?"는 추궁은 하나도 없었다.

7월 19일 정부는 몇몇 대학생들로부터 박 총장을 납치하려는 협박전화가 서대문경찰서에 걸려 왔다며 서강대에 전의경 3개 중대 4백여 명을 배치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박 총장 보호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검찰은 박 총장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공안사건을 줄줄이 발표했다. 7월 21일에는 한총련과 범청학련 간의 팩스교류 사례를 공개했고, 25일에 법무부는 주사파를 사면/복권에서 제외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8월 3일에는 검찰이 장상환 등 경상대 교수 아홉 명이 공동으로 쓴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를 이적표현물로 몰아 수사에 착수했고[1] 8월 4일에 경찰은 김일성주의청년동맹을 적발 검거했다고 발표했으며 9일에는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의 이창복 의장 등 2명을 구속했고 15일 제5차 범민족대회에 경찰 헬기와 병력을 투입해 공중에서 최루액을 뿌리면서 해산작전을 펼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재야 인사/학생들이 한해 동안 주사파로 낙인찍혀 120명이나 구속되었고 105명이 수배되었다. 당시의 공안사건 목록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3.2. 재야세력의 비판과 보수 언론들의 반격

박 총장의 발언에 비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7월 21일 기자회견에서 "박홍 신부의 발언은 편견과 무지에 의한 것이며, 사제이자 대학총장으로서 기본적인 양심과 상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했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역시 "박 총장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성직자와 교육자로서의 이성을 되찾고 제자와 학부모,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한총련과 사노맹 구속자 가족 등이 포함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역시 7월 19일에 박 총장의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기자회견장까지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신문들에 의해 공격당했다. 동아일보 7월 22일 사설 <박 총장 발언의 경우>에선 "사정이 이러하다면 박 총장 발언에 증거와 해명을 요구하는 건 구차한 일이다"라고 했고 조선일보 23일자 사설 <사찰단의 파견>에서는 박 총장의 발언이 우리의 '상식과 정서'에 맞으며 증거를 대야 할 자는 박홍 신부가 아니라 박홍을 비판하는 사람들이란 논리를 폈다. 즉, 한총련이 주사파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주사파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증거를 대는 건 박홍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홍을 비판하려면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8월 4일 교육부장관 김숙희는 "주사파 등의 문제로 대학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으리라고는 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이미 송복 연세대 교수는 7월 24일자 칼럼 <한국대학-주사파의 천국>에서 한국의 대학은 '주사파의 천국'이라고 하여 이들을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된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그리고 중앙일보도 8월 8일자에서 <주사파 군 와해 노린다>라는 제하로 "60만 대군을 1천 5백명 사병이 와해시킨다"는 임복진 민주당 의원의 폭로를 1면 헤드라인에 크게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 행태에 대해 한국기자협회 회지인 <기자협회보> 8월 2일자에선 보수 신문들의 보도 태도와 관련해 신공안정국을 선도하는 조선일보는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북한과 협상/타협할 소지가 있는 정부 내 대북 온건론자들에게 자사의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경고하려는 의미로 강한 냉전논리를 내포하고 있으며 동아일보도 이미 1993년부터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한 만큼 조선일보 독자들을 주 목표로 삼아 조선일보가 독차지한 보수 독자층을 잡기 위해 '지상 레이스'를 펼 수밖에 없었고 동아/조선을 잡아 1등 신문으로 올라서려는 중앙일보도 일단 사상적 선명성을 확보하는 게 상업성이 있으리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박홍 신부의 발언을 믿던 대검찰청 공안부도 8월 19일에 "박 총장의 발언이 대부분 제3자에게 들은 것이며 자료 역시 공안 수사기관에서 대다수 확보하고 있던 것이어서 근거를 찾기 어렵다"면서 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지만 보수 언론들은 이를 작게 보도했다.

3.3. 파이널, 여의도클럽 발언과 그 이후

8월 25일 박홍은 전/현직 방송인들의 모임인 여의도클럽 주최 하의 토론회에서 "주장의 근거가 희박하고 계속해서 했던 말을 번복해 신빙성이 떨어졌는데 증거를 댈 용의는 없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박 총장은 "답답하다. 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나. 수사는 검사가 할 일이고 찾아서 계도하는 일은 언론의 몫이다. 증거는 북한에 보낸 팩스와 모 월간지를 보면 모두 알 수 있는 사실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발언으로 공안 분위기가 형성되는 등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는데 국민에게 납득할 만한 증거를 댈 순 없는지"란 질문에서도 "답답하다. 이런 일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언론이 나서서 국민의 경각심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박 총장은 "주사파가 야당에 750명이나 있다고 했다가 다시 과거에 주사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을 번복했다"는 식의 질문에 대해서도 "언론이 나의 말을 왜곡했다. 야당이 아니라 여당까지 포함한 정당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재 여야 정당과 언론계, 교수 등 750명의 주사파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1987~1994년까지 전국 대학의 학생회장만도 550여 명이나 배출됐다. 학생회 간부까지 합치면 15,000여 명의 주사파가 언론과 정당 등 사회 각 계층에 진출해 있다"고 했다.

또 그는 "주사파가 사회를 전복시킬 만큼 큰 위협이 아닌데 국가 차원에서 과민반응하는 거 아닌가"란 질문에도 "에이즈균은 작아도 일단 몸에만 들어가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하다"고 했다며 그 예로 "6개월씩 집을 나간 학생의 부모들이 와서 통사정을 하여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아들을 만나게 해 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아들은 '몸은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사상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나의 몸은 이미 김일성 수령의 것'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주사파에 한번 빠지면 인륜과 도덕이 무시되고 오직 북한 지령과 김일성만 신봉하게 된다. 주사파가 한 줌이라고 무시하면 온 사회에 독버섯같이 퍼질 것이다"라고 했다.

심지어 TV 역시 박홍 총장의 여의도클럽 토론회를 생중계하기도 했는데 동아일보는 해당 토론회의 시청점유율[2]이 MBC 및 SBS에서 46%로 기록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통계는 두 방송사의 시청률 24%, 22%를 합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겨레신문은 해당 생방송에 대해 당시 시청률이 미디어서비스코리아 조사 기준으로 각각 8.6%, 8.3%라는 저조한 시청률에 그쳤다고 보도했다.

반면 조선일보 8월 26일자에선 3면과 5면을 박 총장의 여의도클럽 초청토론회 기조 발언에 할애했다. 3면에선 박 총장의 발언 중 요점 발언을 다뤘고 5면에선 모 NL 운동권 출신이 박 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실었다.

주사파 약발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8월 27일 조선일보는 사설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를 통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박홍 신부를 옹호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반면 소설가 최일남은 8월 21일자 동아일보 칼럼 '아침을 열며' <7백50명이라는 숫자>에서 박홍 사태가 몰고 온 '도덕적 훼손감'을 지적했으며,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종철도 31일자 '아침햇밭' <'사랑의 사제'와 '공포의 총장'>에서 박홍 신부가 더 이상 '공포의 총장'이 아닌 '사랑의 사제'로 돌아갔으면 하는 심정으로 매카시즘을 얼른 끝내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1995년 대학입시에서 서강대학교는 면접시험에서 학생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고 "좌경폭력혁명에 가담않겠다."는 서약서 제출을 강요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4. 출처 및 관련 자료


[1] 2005년에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되었다.[2] 전체 TV 대수 중에서 특정 프로그램 시청으로 따지는 시청률과는 달리 켜져 있는 TV대수 중 특정 프로그램을 시청한 TV 대수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