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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9:59:49

존 테리/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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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테리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1.1. 웨스트햄의 유스, 첼시와 계약하다.

존 테리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관심을 뒀고 이스트버리 종합 중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역 선데이 리그 클럽인 Senrab에 입단해 축구 기술을 갈고 닦았다.[1] 테리는 1991년 11살의 나이에 웨스트햄 유스팀에 입단했는데, 처음에는 센터백이 아닌 미드필더로 뛰었다. 그는 웨스트햄 유스팀에서 4년간 활동하다가 1995년 첼시 유스팀으로 이적해 첼시의 유스팀과 리저브팀에서 활동했다. EPL에서는 첼시 유스로 인정되어 있다. 이무렵 첼시는 팀 내 센터백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키가 크고 수비적 능력이 우수한 테리의 포지션을 센터백으로 변경시켰다.

1.2. 첼시 FC

첼시 역대 최다 유럽 대회 출장자[2]
첼시 역대 최다 출장 3위[3]

이후 테리는 16살에 첼시 구단과 프로 계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테리는 1998년 10월 28일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겨놓고 출전했다. 이것이 그의 프로 데뷔전이었다. 이후 그는 올덤 애슬레틱과의 FA컵 3라운드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데뷔전을 치렀고 첼시는 이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초기엔 그렇게 인상적인 활약을 하지 못했고 첼시는 그에게 기량을 좀 더 가다듬고 출전 기회를 주기 위해 2000년 1월 노팅엄 포레스트로 임대 보냈다. 그는 포레스트에서 6경기를 소화했고 2000년 여름 첼시로 복귀했다. 그후 테리는 2000-01 시즌에 리그 22경기, 컵 대회 4경기에 출장해 총 26경기를 소화하며 팀의 주요 선수로 거듭났으며 올해의 첼시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2001-02 시즌엔 당시 첼시의 주장이었던 마르셀 드사이와 함께 첼시의 핵심 수비 요원으로 활약했다. 2001년 12월 5일에는 처음으로 첼시의 주장 완장을 차고 찰튼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첼시는 이 시즌에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4] 결승전에서 아스날에게 2:0으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2.1. '더 블루스'의 캡틴

2003-04 시즌, 테리는 계속해서 마르셀 드사이와 함께 첼시의 수비진을 이끌었다. 당시 첼시 감독이었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는 드사이가 부상으로 경기를 뛰지 못할 때면 항상 테리를 주장으로 삼았고 윌리엄 갈라스와 함께 또다른 수비 조합을 결성하게 했다. 테리는 갈라스와도 훌륭한 팀워크를 맺고 첼시를 리그 준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4강으로 이끌어냈다. 그러던 2004년 여름, 로만 아브라히모비치 구단주는 라니에리 감독을 경질한 후 첼시의 황금시대를 이끌어낼 인물을 선임한다. 그는 바로 주제 무리뉴였다.
파일:전성기 첼시.jpg
말대답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라. 선수들 앞에서 와 싸워야 한다. 그것이 주장의 임무다.
무리뉴는 첼시로 부임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하며 테리를 공식적으로 주장으로 삼고 전폭적인 신임을 아끼지 않았다. 테리는 그의 신임에 힘입어 '로얄 블루스'시대를 이끌어가는 핵심 멤버로 군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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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 시즌, 첼시는 무리뉴의 완벽에 가까운 지략과 탄탄한 선수진에 힘입어 PL을 문자 그대로 씹어먹었다. 리그 25경기 무실점, 리그 최소 실점 (15실점)[5], 역대 최다 승 (29승)[6][7], 역대 최다 승점 (95점)[8] 등 유수한 기록들이 바로 이 시즌에 달성되었다. 테리 또한 이 시기에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수비수로서는 드물게 PF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선보여 UEFA 올해의 수비수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세계 베스트 11에서 수비수 부분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테리는 2005-06 시즌에서도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절정에 달하는 폼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첼시가 승점 91점을 획득해 리그 2연패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2006-07 시즌에도 엉덩이쪽 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는 바람에 여러 경기를 뛰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훌륭한 활약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러던 2006년 10월 14일 레딩 전에서 페트르 체흐가 끔찍한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를 대신해 투입된 카를로 쿠디치니까지 부상으로 아웃되자, 테리는 그들을 대신해 골키퍼 노릇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골키퍼 역할을 잘 해내 팀이 1:0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9] 하지만 첼시는 아쉽게도 맨유에게 밀려 리그 2위를 기록해 리그 3연패를 달성하진 못했다. 칼링컵 결승전 때는 아부 디아비에게 얼굴을 맞으면서 그대로 실신하였다. 다행히 안드리 셰브첸코가 말려들어간 테리의 혀를 잡아주어 기도가 막히지 않게 도와주었고[10] 의료진들도 급히 테리를 치료를 해주면서 테리는 그 이후에도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2006-07 시즌이 끝난 뒤, 테리는 구단에 주급을 대폭 늘린 계약 조건으로 재계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기나긴 협상 끝에 7월 말에 13만 천 파운드에서 13만 5천 파운드 사이의 주급을 받는 조건 하에 제계약을 체결했다. 테리는 이로써 당시 EPL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주급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맞이한 2007-08 시즌에서, 그는 시련에 직면했다. 2007년 12월 16일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엠마누엘 에부에에게 발이 밟히는 바람에 발가락 뼈 3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테리가 여러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가뜩이나 이 시즌에 수비 불안으로 성적이 좋지 않던 첼시는 급격히 흔들렸다.[11]

그래도 당초 석달 동안 재활받아야 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빠른 속도로 회복하여 토트넘과의 리그컵 결승전을 앞두고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웨인 브리지의 대삽질로 연장전 끝에 준우승했다. 테리는 아브람 그랜트와 함께 첼시의 전열을 가다듬고 성적을 끌어올려 리그 준우승, 챔스 결승 진출을 이루며 유종의 미를 이루었다. 또한 무리뉴 시절 번번히 챔스 4강에서 고배를 마시던 첼시는 아브람 그랜트의 지휘하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까지 올라 마침내 고대하던 빅이어 획득을 눈앞에 뒀다. 그런데 리그 최종전 볼튼과의 홈경기에서 테리는 체흐와 충돌하여 팔꿈치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벌어져 챔피언스리그 결승 출장이 불투명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결승전에 선발 출장하였다. 테리는 결승전 상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맨유의 공세를 호날두의 헤더 골을 제외하고 모조리 저지했다. 그후 승부차기에서 모든 것이 결판나게 되었다. 체흐가 호날두의 슛을 저지해내면서 승부는 첼시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다섯 번째 키커로 나선 존 테리가 골을 넣는다면, 첼시는 승부차기에서 5:4의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어 빅이어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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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의 캡틴은 그만 미끄러지며[12] 공을 찼고 그의 슈팅은 골대를 맞히고 말았다.[13] 그후 첼시는 아넬카의 실축으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14] 그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2.2. 암흑기에도 빛난 주장

무리뉴를 떠나 보낸 후, 첼시는 암흑기에 빨려들어갔다. 아브람 그랜트,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가 연이어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무리뉴의 빈자리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선수들 및 로만과의 갈등 끝에 경질되고 말았다. 그래도 테리는 이 기간 동안에도 프랭크 램파드, 디디에 드록바와 함께 첼시의 든든한 핵심 멤버로서 꾸준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러던 2008-09 시즌 후반기에 거스 히딩크가 스콜라리를 대신해 부임한 후 첼시는 다시 잘 나가기 시작했고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진출해 결승전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4강전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 원정 0:0, 홈에서 1:1 무승부를 거둬 원정 골득실에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특히 홈에서의 4강 2차전은 지금까지 오브레보 심판의 판정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첼시 팬들은 현재까지도 이때를 두고두고 한스러워하고 있다.

1.2.3. 안첼로티 시대

2009년 7월, 맨체스터 시티가 테리에게 거액의 비드를 제시했다. 그러나 테리는 안첼로티 감독의 설득을 받아들여 첼시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 첼시는 안첼로티의 지휘하에 강력한 공격력과 탄탄한 수비력을 발휘해 리그를 씹어먹었고 테리는 주장으로서 첼시의 4번째 리그 우승을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FA컵 결승전에서도 포츠머스를 상대로 활약해 1:0 승리를 이끌어내며 개인 통산 4번째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테리는 2011년 12월 31일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 선발 출전했는데, 이 경기는 그가 프로에 데뷔한 이래 400번째로 치르는 경기였으며 첼시 역사상 가장 많은 출장 기록이기도 했다. 또한 테리는 2011년에 전 세계에 1000개 이상의 패스를 한 선수들 중 3번째로 패스 성공률이 높은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패스 성공률은 91%였는데, 이보다 높은 선수는 오직 사비 에르난데스(93%)와 레온 브리튼(93.3%)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이렇듯 잘한 것과는 달리, 첼시는 안첼로티의 두번째 시즌 때는 지난 시즌에 비해 위력이 떨어져 고전하다가 막판에 가까스로 순위를 올려 리그 2위를 기록했고 챔피언스 리그 8강에 진출했으나 맨유에게 패해[15] 준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에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성적이 불만족스럽고 리빌딩에 차질이 생겼다는 이유로 안첼로티를 경질했다.

1.2.4. 시련의

안첼로티가 경질된 후 안드레 빌라스보아스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첼시의 수비 라인을 끌어올려 경기 내내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는 전술을 시행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주력이 느려진 테리에게 보아스의 이 같은 전술은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테리는 2011-12 시즌에 크게 부진하고 말았고 첼시는 이로 인해 성적이 지지부진해졌다.

그러다가 보아스가 경질된 후 첼시의 레전드였던 로베르토 디 마테오가 부임한 후 전력을 가다듬은 첼시는 리그는 비록 로만 구단주 부임 이래 최악의 성적인 6위로 마감했지만 FA컵 우승을 달성하고 뒤이어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기적적인 행보를 보이더니 마침내 우승을 달성했다. 다만 테리는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알렉시스 산체스의 무릎을 걷어차는 행위를 저지르다 퇴장당하는 바람에 결승전엔 출장하지 못했다. 2008년의 악몽을 씻어버리고 싶었을 그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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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장답게 사진은 찍었다! 그렇게 테리는 첼시 사상 첫 빅이어를 들어올린다. 보싱와

2012-13 시즌은 그에게 또다른 시련을 안겨줬다. 그를 굳건히 신뢰했던 디 마테오 감독은 시즌 초반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그 뒤를 이은 베니테즈 감독은 그가 노쇠화했다고 판단하고 주전 자리를 게리 케이힐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 다비드 루이스[16]에게 넘겨줬다.

결국 테리는 이 시즌에 치른 경기들 중 상당수를 벤치에서 시작해야 했고 리그에서 겨우 14경기에 출전하는 등 예전에 비해 입지가 위태로워진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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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는 마침내 유로파 리그 우승까지 손에 넣었지만 이제 테리에게 남은 길은 계약 만료 때까지 백업으로 뛰다가 은퇴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것 밖엔 없는 듯 했다.

1.2.5. 무리뉴와의 재회

그러다가 2013년 여름, 무리뉴가 첼시로 복귀했다. 무리뉴는 테리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를 다시 주전으로 기용했다.[17] 이에 테리는 회춘한 모습을 보이며 첼시의 수비진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그 결과 첼시는 2013-14 시즌 리그 3위,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하는 등 선전했다. 이후 2014년 5월 14일, 테리는 첼시와 1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1.2.5.1. 2014-15 시즌
부동의 주전이었다. 활약상을 보면 제 2의 전성기라 할 만 했지만 센터백 파트너인 게리 케이힐이 시즌 초반부터 많은 실수를 범해서 테리가 할 일이 더 많았다. 구단의 정책 변화로 인해 30세 이상 선수들에게 1년씩 재계약하는 방식이 적용되면서 프랭크 램파드애슐리 콜 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많은 것 같다.

14-15 시즌 첼시의 통산 4번째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EPL 역대 2번째로 전경기 풀타임 출전 기록도 보유한 시즌.

첼시 수비의 테리 의존도는 매우 높다. 테리가 있는 경기와 없는 경기를 비교하면 테리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테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날은 선수들간의 간격이 유지되면서 완벽한 수비가 되지만 테리가 없는 날은 선수들이 우왕좌왕하고 정신차리지 못하며 실점하기 일쑤다. 정작 더 큰 문제점은 첼시가 아직까지 현실적인 테리의 대체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때 게리 케이힐이 테리의 대체자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14-15 시즌의 모습을 보면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주마는 지금 당장 대체자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테리와는 다른 스타일의 수비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1.2.5.2. 2015-16 시즌
15-16 시즌 초반에 몇 경기 나오더니, 9월달 부터 무리뉴 감독은 전술상의 이유를 들어서 주마-케이힐 조합을 선택하면서 계속 벤치를 달구고 있다. 하지만 테리가 주전에서 빠지자마자 첼시는 자동문 수비를 보여주는데, 최악의 폼을 보여주는 이바노비치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테리의 부재[18]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다시 주전을 잡으면서 2경기 째 무실점을 이끌고 있다.

리그 11라운드 리버풀전에서 1:3으로 패배했을 때는 워스트 플레이어로 뽑히는 등 기량이 극심하게 떨어진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현지 해설의 평가로는 그냥 축구장에서 뛰고 있는 노인[19]... 위에 언급된 일로 태업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폼이 저하된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두 가지 모두 전년도 우승팀 주전이라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태인 것은 확실하다.

2015년 11월 29일 토트넘전에서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을 하지 못했다. 테리 대신 케이힐이 출전하여 주마와 호흡을 맞췄는데 이 경기에서 주마는 평점 7.2점 케이힐은 평점 7점으로 각각의 활약상을 반영해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주마는 MOM으로 선정되기도 했다.[20] 주마-케이힐 조합의 안정감을 확인한 주제 무리뉴가 과연 부상에서 복귀할 테리에게 계속 선발 자리를 내어 줄 지 의문이다.

포르투전에서 선발 복귀, 흠 없는 수비를 하며 완승을 이끌었다. 주마 역시 경험 전수를 받은 듯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2015년 12월 18일 무리뉴는 첼시와 상호간의 합의로 계약을 해지했으며, 첼시 보드진인 에메날로는 첼시 선수들의 태업을 시인했다. 현재 존 테리는 자신의 개인 SNS에서 엄청난 욕을 먹는 중. 하지만 자신은 인스타에서 무리뉴에게 감사하는 메시지를 올리는 행동을 취하여 태업과는 멀어보인다[21].

리그 37라운드 선더랜드 원정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경고누적 퇴장을 당해 첼시 선수 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되나 싶었지만[22] 1년 재계약을 하면서 다음 시즌에도 첼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1.2.6. 2016-17 시즌

지난 시즌에 겪은 폼 저하와 팀 성적 부진 때문에 우려와 기대 속에서 새 시즌을 맞이 하였지만 큰 문제 없이 시즌 초반을 보내고 있다.

4R 스완지전 막판 부상 이후 리버풀, 아스날전에 모두 결장하였는데 첼시는 두 경기 모두 패배하였으며 특히 아스날전에서는 수비 문제가 대폭발하면서 존 테리가 아직 첼시의 수비진에 기여함이 큰 것을 입증했다. 게리 케이힐이바을과 함께 명실상부한 첼시의 구멍으로 자리잡았으며 다비드 루이스도 가출이 너무 잦다. 비록 그가 수비 커버 범위도 좁고 발도 느린데다가 현재 나이도 많아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만 그가 가진 리더십, 수비 조율 능력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버티는 것이었다.[23] 이 현상이 퀴르트 주마가 온다고 하더라도 해소될지는 의문이다.[24]

곧 부상에서 복귀한다고 기사가 났다. 맨유전을 기준으로 3-4-3 시스템이 팀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있는데, 스위퍼 자리에는 루이스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테리를 스토퍼로 쓰기에는 커맨딩 능력을 십분 활용하기 어려울 뿐 더러 스피드 면에서는 같이 느린 편에 속하는 케이힐보다도 떨어지기 때문에 콘테가 테리를 어떻게 기용할지 관심이 쏠리는 중이다.

11R 에버튼전에서 드디어 후반에 케이힐과 교체되어 복귀를 알렸다. 루이스 자리인 가운데에 있을 줄 알았지만 왼쪽 스토퍼 역할을 그대로 맡으며[25] 비록 늦은 후반이었지만 오버래핑해서 코스타에게 스루패스를 찌르는 등 자기 역할을 할 만큼은 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3백 전환 이후 그의 위상은 다시 백업으로 돌아갔다. 존 테리의 부상과 이바노비치의 부진으로 인해 만들어진 케이힐 - 루이스 - 아스필리쿠에타의 3백 라인이 7경기 동안 연승 및 1실점밖에 허용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수비력을 보여주는 탓에 테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가출이 잦았던 루이스는 감독 안토니오 콘테의 케어로 가출이 크게 줄어들면서 수비의 벽이 되었고, 부진하던 케이힐도 폼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심지어 센터백은 뛰어본 적도 없던 아스필리쿠에타까지 잘해주고 있어서 이바노비치는 물론 존 테리마저 주전을 파고들 틈이 없다. SFR 스포츠에서 윌리엄 갈라스가 인터뷰어로 이 건에 대해 테리와 인터뷰를 했는데 테리는 이 인터뷰에서 "좋은 의미로 자신이 선발 라인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자신이 선발에 들어가지 않아도 성적이 상당히 좋으니 자신도 이를 따르겠다고 한 것이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첼시를 떠난다고 한다 # 현역 은퇴를 하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동료들, 팬 가릴거 없이 모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발표 시기가 맨유 원정에서 2:0으로 무기력하게 패배한 이후였는데 이 은퇴발표가 팀에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파브레가스는 떠나는 테리에게 우승컵을 안겨주겠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팀은 FA 컵 4강 토트넘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시즌 더블이라는 목표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사실, 냉정히 말해서 현재 존 테리의 폼은 좋지 않다. 본인 말대로 '자신이 선발 라인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 한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의 현재 폼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발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예 은퇴 자체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현재 루머로는 MLS로의 이적이나 은퇴가 유력하고 첼시시절 코치였었던 폴 클레멘트가 이끄는 스완지가 존 테리 영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우승이 확정된 뒤 5월 15일 왓포드와의 주중 홈경기에서 8개월만에 리그에서 선발출전하여 선제골을 기록했다. 이 골로 17시즌 연속 프리미어리그 득점에 성공했다.

리그 38라운드 선더랜드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출전 하였고 26분에 동료들과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게리 케이힐과 교체되었다. 약 20년간의 첼시 선수 생활이 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파일:존테리의 마지막.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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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AIN, LEADER, LEGEND
717경기 67골

1.3. 아스톤 빌라 FC

시즌 초반은 팀이 상당히 언밸런스한 모습을 보이며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는듯했다.

전반기 16경기 선발 출장하여 1골을 기록하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점은 7.04로 준수한 수준.

그러나 리그 16R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경기에서 중족골 부상으로 21분 만에 교체 아웃 당했고 경기 후 정밀 검사에서 10-12주가량의 부상을 진단받았다. 제임스 체스터와 함께 전 경기를 선발 출장하며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던 찰나라 본인과 팀 모두에게 아쉬운 상황. 한편 테리의 부상 이후 주장 완장은 체스터가 차고 경기에 나서고 있다.

후반기가 되자 팀은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아마 플레이오프를 통해 승격팀이 정해질 듯하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팀은 풀럼에게 패배해버려서 1부 리그 승격이 좌절되었고 존 테리는 아스턴 빌라를 떠나게 되었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는 뉴스가 있으나 은퇴설을 부인했다는 기사도 나오고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현역 은퇴 소식을 밝혔고, 아스톤 빌라 수석코치에 부임했다.


[1] 참고로 솔 캠벨, 저메인 데포, 바비 자모라, 레들리 킹, 그리고 제이로이드 사무엘 등 훗날 PL에서 명성을 떨치게 될 이들도 어린 시절 이 Senrab이란 클럽에서 활동했다.[2] 124경기 출전[3] 717경기 출전[4] 이때 테리는 FA컵 준결승전에서 풀럼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1:0 승리를 이끌어냈다.[5] 2023년 현재까지도 PL에서 깨지지 않은 역대급 기록이다.[6] 이 기록은 16-17시즌의 첼시가 30승을 기록하며 한 번 더 갈아엎었다.[7] 이 기록은 다시 17-18시즌의 맨시티가 32승을 거두며 깨지게 된다[8] 이 기록 또한 17-18시즌의 맨시티가 승점 100점을 기록하면서 깨지게 된다.[9] 워낙 급박한 사태였는지라 이 때 테리는 당시 첼시의 서드 골키퍼였던 엔히크 일라리우의 골키퍼 유니폼 상의를 입고 골키퍼로 뛰었다.#[10] 혹자들은 이것이 셰브첸코의 첼시 입단 후 최대 업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 일화는 위기탈출 넘버원에서도 소개되었다.[11] 대표적으로 아스톤 빌라와의 홈경기에서 4-4로 비긴 경기가 있었다. 2003년 박싱데이 찰튼 원정 4:2 패배 이후 첫 4실점 경기였다.[12] 차기 직전 동료들이 땅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인지 운명의 장난.[13] 사실 웨인 루니에 의하면 존 테리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훈련할때 실축하는걸 본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페널티킥을 매우 잘찬다고 한다. 실제로 유로 2004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선 키커로 나와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14] 이후 존 테리가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는 일은 없었다.[15] 이 시즌에 맨유와 5번경기했는데 1번이기고 모두 패배했다. 커뮤 니티실드에서 1:3으로 패배했고 리그에서 2:1로 이겼지만 챔스에서 0:1, 1:2로 또 졌다. 리그 우승의 마지막 기회였던 36라운드에서도 1:2로 패해 버렸다.[16] 베니테즈는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를 기용하기 위해 기존에 라이트백 위치에서 뛰던 이바노비치를 센터백으로 썼고 이로 인해 루이즈가 미드필더에서 본격적으로 뛰게 되었다. 이 시즌 중후반기의 존 테리는 주전은 아니었다.[17] 프리시즌 기간에 가족과 저녁을 먹고 와인 한 잔 하려 했는데 무리뉴한테 전화가 와서 "JT, 난 너를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잘 알고 한 선수로서도 잘 알아. 밑바닥부터 시작하자. 너는 나의 핵심(main man)이고 너는 나의 캡틴이야. 내년에는 출전기회가 있을거야. 여름에 열심히 하자."라는 얘기를 듣고 동기부여가 되어 마시려던 와인을 안마셨다고 한다.[18] 디마테오 감독은 테리의 부재로인한 케이힐-루이스 조합으로 수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경질당했다. 결국 베니테즈가 케이힐-이바노비치 조합으로 수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19] Old man이라고 트래버 프랜시스가 BT Sports에서 평가하였다.[20] 기재한 평점은 데일리 스포츠에서 발췌해 왔으며 모든 선수들의 평점 또한 데일리 스포츠에서 확인 할 수 있다.[21] 16-17 시즌 첼시vs맨유 경기에서 무리뉴와 굉장히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포착된 것을 보면 무리뉴와의 관계에는 전혀 문제 없는 것으로 보인다.[22] 경기 내에서 퇴장당한 경우라면 보통 두 경기 출전 불가 징계를 받는다. 그리고 첼시는 (일정 조정때문에 늦춰진) 30라운드 리버풀전과 38라운드 레스터 시티전, 두 경기가 남아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인지 경기장을 빠져나가면서 표정관리가 안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23] 사실 테리를 기용하는 이유는 전성기 때나 지금이나 그의 리더십, 수비 조율 능력이 8할이다. 데뷔 때부터 발이 느렸던 선수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최고의 센터백으로 평가 받을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리더십과 수비 지능의 자신의 모든 단점을 상회하고도 남기 때문이다.[24] 주마도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수비 기술이 좋은 거지 위치 선정 같은 지능적 플레이에는 아직 미숙하다.[25] 루이스가 맡고 있는 중앙 스위퍼 자리를 맡기에는 테리의 수비범위는 너무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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