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조호성 趙浩成 | Cho Hosung | |
출생 | 1974년 6월 15일 ([age(1974-06-15)]세) |
경기도 부천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약대초등학교 부천북중학교 부천고등학교 중앙대학교 무역학 학사 |
종목 | 사이클 |
주종목 | 트랙(포인트레이스) |
신체 | 175cm, 72kg |
소속 | 기아자동차(1993~1997) 서울특별시청(1998~2003, 2009~2014) 경륜훈련원(2004~2008) |
지도자 | 서울특별시청 사이클 코치(2013~2017)[1] 서울특별시청 사이클 감독(2018~)[2] 사이클 국가대표팀 옴니엄 종목 감독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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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사이클 선수이다. 現 서울특별시청 사이클 팀 감독, 사이클 국가대표팀 트랙종목 감독이다.2. 선수 경력
2.1. 경륜선수 전향 이전
커리어 초기에는 포인트레이스로 활약하던 선수였다. 90년대 중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당시 최고의 사이클 실업팀이었던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였다. 이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순식간에 사이클계에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당시 기아자동차에는 단거리(스프린트부터 1km 트라이얼까지)에 정성기, 지성환, 현병철, 홍석한, 도로에 용석길 등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사이클계의 레알 마드리드라고 보면 된다. 원래 기아자동차는 자전거 생산으로 출발한 회사이고, 그게 바로 지금까지 국내 1위인 삼천리자전거이다. 당시에는 삼천리자전거가 아시아자동차나 기산건설처럼 범 기아 그룹의 일원이었다. 자전거에 관심이 큰 회사라 실업 팀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호성을 포함해 기아자동차 소속으로 저기 언급한 선수들 모두는 경륜계에 입문, 각 기수별 훈련원 성적 1위로 졸업하였다. 물론 프로 입문 후 그랑프리 1번 씩은 먹은 선수들이 태반이었다. 저기서 정성기, 용석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랑프리 1번 이상 땄다. 물론 조호성 지성환 현병철 홍석한 저 4명이 초괴수들이라 그렇지 용석길 정성기도 그랑프리에 나간 적이 있는 나름 훌륭한 선수들이였다. 그리고 홍석한은 그랑프리 3회 우승, 조호성은 그랑프리 3회를 연속으로 우승했다. 당시 기아자동차 사이클단의 위엄을 알 수 있을 대목이다.
하지만 기아자동차가 IMF 때 모회사가 부도나면서 팀도 해체, 그 이후로 사이클 팀 중 가장 큰 곳은 삼양사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삼양사에도 여자사이클 국가대표 몇몇이 활약하고 있다. 남자 선수들은 대부분 군청, 시청 등에 소속되어 있다. 조호성은 국내 실업팀 중 가장 지원이 많은 서울시청 소속이다.
그 후에도 승승장구하였고 국내 최초로 1999년 세계선수권 포인트레이스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3] 그 이후로 국내에서 사이클 지원이 늘어났다. 국가대표 후배들인 양희천, 최래선, 장선재, 장찬재, 박성백 등이 스위스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사이클 훈련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찌보면 조호성의 세계대회 입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모두 메달을 딴 조호성이지만,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나마 2000 시드니 올림픽 40km 포인트레이스에서 1점이 모자라 4위 입상한 기록이 최고였으니 말이다. 이 4위를 하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사실 조호성은 마지막 포인트에서 3위까지 노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입상권에서 멀어진 홍콩의 웡캄포라는 선수가 전력을 다 하여 포인트를 따는 바람에 조호성이 3위보다 1점이 모자라게 된 것. 결국 그 이후로 올림픽에서 조호성은 4위 이상의 성적을 거둔 적이 없고, 그나마도 조호성의 4위 기록이 국내 사이클 올림픽 선수중에 제일 메달에 근접했던 선수였다. 현재까지 한국 사이클이 올림픽에서 딴 메달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2. 경륜 진출
결국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었던 조호성은 경륜에 입문한다. 이는 경륜이 사이클 선수들에게 충분히 돈이 되기 때문이다. 경륜은 기본급이 없고 경기에 참여할 때만 출전수당, 착순 수당 등 각종 수당을 지급받는다. 이 수당들이 등급이 높고 높은 순위로 입상할 경우 그만큼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다. 조호성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10연속 1착시 5% 추가 보너스까지 지급되었다.사실 조호성은 나이가 많아 경륜에 입문할 수 없었다. 조호성이 경륜에 입문할 2003년 당시, 경륜선수 지원은 만 28세까지였다. 조호성은 1살 차이로 걸려 들어갈 수 없었는데, 경륜운영본부에서 최고의 선수를 위해 그 규정을 31세로 올려버렸다. 그러니 선수로 지원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경륜 운영본부의 배려 덕분에, 무사히 훈련원에 입소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장거리 출신인 조호성에게 단거리 경륜은 근육 자체를 바꿔야 했다. 간단히 말해 마라톤 뛰던 선수가 100m 달리기를 해야하는 격이다. 조호성은 그런 어려움도 극복해낸다. [5] 당시 조호성의 기수였던 11기에는 아직도 굉장한 실력을 보이는 선수들이 여럿 있었다. 국대 출신이었던 조현옥, 양희진부터, 김배영, 황순철, 김현경, 김종력 등이였다.[6] 하지만 조호성은 이들을 모두 누르고 훈련원을 1위로 졸업했다.
이런 조호성 선수를 위해 경륜운영본부는 이례적으로 온갖 지원을 다 했다. 대표적인 것이 훈련원 1위 조호성을 특선급에 바로 진출시켰다. 원래 각 신인 기수들은 훈련원 졸업시 우수급에서 경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11기만 이를 따르지 않고 바로 특선급으로 올려버렸다. 당연히 조호성 다음 순위인 김배영, 양희진, 조현옥 등등도 모두 특선급 입성. 물론 조호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저 셋만 하더라도 대상에 줄곳 3위 안에 꾸준히 들던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11기는 인원도 많았던 만큼 훈련원 때 스플릿처럼 상하위 급수를 나누어 각 급수끼리 훈련원 점수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조호성은 상위 클래스에서 동기들 중 가장 경쟁력 있는 선수들과 시합을 할 수 있었다. 이는 곧 경륜에서의 적응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연속 1착 수당 등등... 이렇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조호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륜 세계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조호성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앞으로 보여질 엄청난 성적들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경륜 입문 후에는 기록만 봐도 그의 무시무시한 성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2.1. 경륜에서 남긴 그의 아름다운 업적
- 그랑프리 3연속 우승 (2005, 2006, 2007)[7]
- 그 외에 각종 대상경륜 우승, 한일대항전 1위 등등
- 통산 연대율[8] 90% 이상, 삼연대율[9] 95% 이상
- 4년 연속 최다 상금 수입자 (2004, 2005, 2006, 2007)
- 연승기록 : 47경기[10][11]
경륜계의 최종 보스
2015년 최다 연승자인 이현구가 20연승도 못했고 2016년에는 박용범이 그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으나 6월 말에 낙차처리 + 상대선수 낙차 유발로 인해 실격처리되면서 결국 기록달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2017년에는 신예 성낙송도 가세했지만 16연승에서 연승행진을 멈춘 상태. 정종진도 그의 연승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지만 2017년 상반기 대상경주에서 정하늘에게 제압당하며 26연승에서 연승행진을 마감했다. 그 이후 다시 연승행진을 하던 정종진이 2018년 50연승을 기록하면서 조호성의 기록을 깼다. 또한 정종진이 세운 기록은 2022년 6월 11일 임채빈이 51연승을 기록하여 기록을 갱신하였다.[12]
보통 경륜계 최고 상금수입이 대개 2억 안팎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조호성이 경륜계 거의 10억 가까이 번 셈이다. 조호성이 활약하던 당시 경쟁자라고는 현병철, 홍석한, 김민철, 노태경, 송경방, 황순철, 김현경 등이었는데, 다들 조호성보다 한 끗 부족하였다. 특히 조호성 입문 전까지 경륜 최강자였던 홍석한은 그 자리를 내 주게 되었다. 물론 조호성의 커리어 막판이었던 2007년에 김민철이 조호성의 47연승을[13], 홍석한이 김현경, 이홍주와 함께 그랑프리 4연승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다.[14] 경륜이 겜블스포츠인 만큼, 배당으로 말하자면 조호성의 단승은 1.0이었다. 100000원을 조호성 단승으로 걸면 얻는 게 없었다. 그리고 조호성이 나오는 경기에서, 조호성을 빼놓고 베팅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돈 잃겠다는 소리였다.[15] 조호성의 약 4년여 경륜 커리어에서 4위 이하의 성적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낙차나 기재고장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실격도 단 한 번도 없었다.[16]
2.3. 아마추어 무대로 복귀
수억대의 연봉이 보장되었던 경륜판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지만, 올림픽에서의 메달을 꼭 따겠다는 소원을 이루고자 2008 그랑프리 결승을 고별전으로 은퇴하였다. 이런 조호성에게 경륜운영본부는 은퇴식을 나름 성대하게 치러준다. 나름 인터뷰도 하고, 기념 트로피도 주고, 퍼레이드까지 시켜줬다. 은퇴하는 대부분의 경륜선수들이 심각한 위반 행위나, 지나치게 저조한 성적으로 퇴출당하는 등 불명예스럽게 피스타를 떠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의 위치에서 떠난 조호성의 은퇴식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2.3.1.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추발 결승에서 홍콩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건 국가대표팀의 모습[17] |
홍콩과의 단체 추발 결승전에서 1000m 지점부터 리드를 잡고, 4분07초872의 기록으로 홍콩의 기록 4분10초859에 약 3초차로 앞서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이후 무려 8년만에 거둔 금메달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종목 포인트레이스에서는 경기 초중반까지 선두권을 유지하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우즈베키스탄의 바딤 사에코프와의 추돌사고로 낙차하며 결국 7위로 레이스를 마무리했다. 경기 직후 조호성의 장모님이 그의 낙차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쓰러져 응급실에 급히 실려갔다. 조호성은 기자회견장에서 인터뷰 대신 장모님을 급히 업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2.3.2. 2012 런던 올림픽
2012 런던 올림픽부터 신설된 옴니엄 종목으로 출전종목을 바꾸어 첫 올림픽 메달을 노렸으나, 각 종목들에서 10위~12위 정도의 성적에 머무르며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초에는 런던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려고 했다고 한다.
2.3.3.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3. 은퇴 이후
2013년부터 플레잉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었으며, 현재는 서울시청의 코치로 활동 중이다.2016년 1월에 사이클 국가대표팀 옴니엄 감독으로 부임했다. 현재 옴니엄 종목의 박상훈을 집중 지도한다고 밝혔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감독으로 박상훈을 데리고 출전하였는데, 포인트 이전 5경기에서 16~18위에 머물러 메달권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마지막 포인트 경기에서 영국 팀의 마크 캐번디시가 코너에서 가속하며 내려오는 중 뒷바퀴로 박상훈의 앞바퀴를 건드려 낙차하고 마쳤다.
2018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마치는 정태윤 감독의 후임으로 서울시청 감독직을 맡고 있다.
4. 수상 기록
세계선수권 | ||
동메달 | 1999 베를린 | 포인트레이스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994 히로시마 | 포인트레이스 |
금메달 | 1998 방콕 | 팀추월 |
금메달 | 2002 부산 | 매디슨 |
금메달 | 2002 부산 | 포인트레이스 |
금메달 | 2006 도하 | 포인트레이스 |
금메달 | 2010 광저우 | 팀추월 |
금메달 | 2014 인천 | 포인트레이스 |
은메달 | 1998 방콕 | 포인트레이스 |
은메달 | 2014 인천 | 옴니엄 |
아시아선수권 | ||
금메달 | 2013 뉴델리 | 스크래치 |
금메달 | 2013 뉴델리 | 포인트레이스 |
5. 관련 문서
[1] 2013년~2014 인천 아시안 게임까지는 플레잉코치. 그 이후 완전히 지도자로 전향했다.[2] 2001년부터 감독을 역임했던 정태윤 감독이 2017년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자리를 이어받게 됐다.[3] 이후로 이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다가, 2020년 여자 경륜에서 이혜진이 은메달을 획득하며 갱신되었다.[4] 이때 막내 송경방이 접촉 후 스스로 낙차하면서 팀 전체가 낙차기권했다. 물론 송경방은 굉장히 뛰어난 선수다. 저땐 긴장했을테지만 경륜계 입문하면서 그랑프리도 먹었을 정도. 데뷔 5년 만에 그랑프리 2관왕에 대상 10개 먹은 이명현이 신나게 끌어주고 같은 팀 노태경과 잘 연대해서 먹은 거지만 그래도 실력은 실력이다.[5] 경륜 은퇴 후, 현역으로 복귀할 때는 이 반대의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6] 조호성의 훈련원 룸메이트였다. 당시 21살로 11기 최연소 선수였는데, 최고참 조호성 덕분에 여러모로 조언도 많이 얻고 친해졌다고 한다. 2010년 매일경제배 대상경륜에서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조호성 선수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였다.[7] 정종진이 4연속 우승으로 밀려났다. 다만 정종진이 도핑 논란으로 사실상 영구제명 됐기 때문에 그랑프리 3연속 우승이 최고기록 이다.[8] 2위 안에 들어간 기록[9] 3위 안에 들어간 기록[10] 당시 1위 기록이었으나 2018년 정종진이 50연승을 하며 2위로 밀려남[11] 2022년 임채빈이 51연승을 하며 3위로 밀려났다. 다만 임채빈과 정종진이 도핑 논란으로 사실상 영구제명 됐기 때문에 다시 1위로 올라섰다.[12] 임채빈과 정종진이 도핑 논란으로 사실상 영구제명 됐기 때문에 연승기록 1위로 다시 올라섰다.[13] 이후로 김민철은 실업 시절 내내 무명이었던 설움을 벗고 전라도를 대표하는 국내 최고의 경륜선수로 거듭난다. 다만 잘 나가던 중 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는 큰 위기가 있었지만, 잘 이겨내었고 작년에는 오랜만에 대상경륜에서 1착을 하였다. 현재 SS급으로 활동 중이다.[14]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경륜은 암묵적인 연대 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2008 그랑프리는 사실상 홍석한, 김현경, 이홍주의 충청권과 조호성 독자승부였다. 천하의 조호성이지만 특유의 지구력을 앞세운 이홍주와 몸싸움에 강한 김현경, 막판 추입은 독보적이었던 홍석한까지 셋을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그 이전에는 김영섭 등 같은 팀 선수가 한 명 이상 있었기에 팀 동료가 먼저 끌거나 견제해주면, 조호성이 비교적 쉽게 1위를 할 수 있었다.[15] 당시 조호성는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고 한다. 1위를 못하면 온갖 욕을 먹었기 때문에 반드시 1위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항상 괴롭혔다고 한다. 탈모 현상까지 왔을 정도라고 한다.[16] 겜블 시합의 특성상, 경륜은 그 규칙을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한다. 가령 상대방을 낙차시키거나 상대방의 자전거를 고장내는 기재고장을 유발한 경우, 해당 선수는 즉시 실격된다. 또한, 전력질주의무 위반이라고 하여 한 경주의 1위 입상이 예상되는 선수가 4위 이하의 성적을 거둘 경우, 바로 실격된다. 요즘 경륜계를 보면 잘하는 선수들은 커리어 내내 실격이 최소 2~3번 이상 있는데, 조호성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실제 조호성이 몸싸움을 하는 경기는 아예 없다. 같은 팀 소속의 김영섭이나, 동기인 김종력이 몸싸움하는 것을 보면 정말 자전거 타는 것보단 럭비에 가깝다.[17] 이 사진의 두번째 인물이 조호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