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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9-19 03:30:40

조재복

파일:조재복.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취오(聚五)
본관 창녕 조씨[1]
출생 1897년 10월 8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월지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월지마을)[2]
사망 1952년[3] 4월 14일[4]
경상북도 영천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30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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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조재복은 1897년 10월 8일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월지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월지마을)에서 아버지 조계환(曺啓煥, 1869. 5. 2 ~ 1924. 8. 14)과 어머니 안동 권씨(1873. 7. 26 ~ 1930. 1. 8)[5]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조규백(曺奎伯, 1900. 11. 19 ~ 1952. 9. 27), 조규삼(曺奎三, 1903. 11. 10 ~ 1951. 11. 10)[6] 등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천군 신촌면 입석동(현 영천시 화북면 입석리)에 살던 홍종현은 지곡면 오산동에 있던, 조재복과 13촌 지간의 족숙(族叔) 조주생(曺周生, 1894. 1. 5 ~ 1971. 9. 12)[7]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영천면 장날인 4월 1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전날인 11일 홍종현은 마을 상점에서 붉은 목면(木棉)을 사들고 같은 마을에 사는 조재복과 20촌 지간의 족조(族祖) 조병진을 찾아가 깃발로 만세를 부를 것이니 태극무늬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였고 조병진은 홍종현의 계획에 찬동하며 깃발에 태극무늬를 그려주었다. 이어 홍종현은 조주생의 집에서 역시 같은 마을에 살던 그를 찾아와 동일하게 만세를 부를 것이라며 「대한독립만세 군위 양곡(良谷) 홍종현」이라고 깃발에 써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이때 조재복 또한 홍종현의 계획에 찬동하며 글씨를 써주었다.#

거사 당일인 12일 오후 3시 30분경, 1천여명의 상인과 주민들이 모이자, 조재복은 홍종현·조병진·조주생 등과 함께 영천면 창구동 영천공립보통학교[8] 교문 앞 시장에서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호응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마침 이곳을 순찰중이던 순사보 김배석(金拜石)에게 체포되었다.

조재복은 그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 90도를 선고받고 형벌을 받은 뒤 불구의 몸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지역의 후학들에게 독립 사상 및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1952년 4월 14일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별세하였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2년 5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1] 희천공파(熙川公派)-사의공계(司議公系) 25세 규(圭) 희(喜) 재(在) 기(基) 항렬. 족보명은 조규열(曺奎烈),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조규열(曺奎列).[2]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조병진도 이 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이원대는 이웃의 오산리 운산마을 출신이다.[3] 1953년이라고도 한다.#[4] 창녕조씨희천공파보 권2 상 801쪽에는 3월 1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복야공파(僕射公派) 산갑(山甲)계 31세 권치순(權致淳, 1839 ~ 1917. 4. 25)의 장녀로, 권응수의 후손이다.[6] 일명 조규삼(曺奎).[7] 족보명 조주환(曺周煥).[8] 지금의 영천시 금노동에 있는 영천초등학교를 말한다. 당시에는 영천향교를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고, 1929년 현 위치에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