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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0:15:13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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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iovanni_di_Bicci_de'_Medici.jpg
이름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Giovanni di bicci de' Medici)
출생 1360년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 1429년 2월 20일 (향년 69세)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배우자 피카르다 부에리 (1386년 결혼)
자녀 코시모, 로렌초
아버지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
어머니 자코파 스피니
형제 프란체스코, 안토니아

1. 개요2. 생애3. 개인적인 성품과 처세술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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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라 불리는 피렌체의 은행가.[1]

2. 생애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가문이 풍족하지 못해 부친의 얼마 안 되는 유산을 미망인과 다섯 아들에게 나누어줬다고 하며,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처럼 치옴피의 난을 일으킨 일반 평민층에 해당하는 '미누토 포폴로'에 공감했다. 그러나 '미누토 포폴로'들이 인기가 많았지만 피렌체인들이 지나친 야심가를 불신하는 것을 알았으며, 이들이 몰락한 이후에도 메디치 가문이 평민의 당과 연계되자 이러한 의혹을 없애기 위해 급속히 팽창하는 은행업으로 돈을 벌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했다.

초창기에는 로마에서 사촌인 비에리 디 캄비오 데 메디치의 견습 사원으로 일하다가 제노바에 신규 지점, 로마에 두번째 지점, 피사 정복으로 활발해진 무역 시장 덕분에 브뤼주와 런던에 거래처를 세우고, 피렌체에서 모직업이 번성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내인 피카르다 부에리와 결혼해 얻은 상당한 지참금 덕택에 재산이 더욱 증대했지만 아내와 두 아들인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함께 비아 라르가의 수수한 집에서 살았다. 비아 라르가에서 두오모 광장의 저택으로 이사했으며, 두오모 광장의 저택은 크기는 약간 더 컸지만 전혀 허식이 없으면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1402년에 역병이 돌아 산 조반니 바티스타라는 성당에 새 문을 만들자 당대의 예술가 일곱 명이 도안 제출을 할 때 심사 위원으로 나섰으며, 피렌체에서 부유한 상인은 정부에 관여해야 번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402년, 1408년, 1411년에 시뇨리아의 프리오리 직을 맡았다가 1421년에는 곤팔로니에레 직을 수락했다. 업무 시간 이외에는 정산소에서 조용히 일을 했고, 공공 재단이나 사적인 자선 단체에 폭넓게 기부하면서 부유한 알비치 가문이 친지들이나 시뇨리아의 임명자들을 통해 정부를 통제하는 것도 묵과했으며, 피렌체에 모직 작업장 두 곳을 소유한 근거로 '아르테 델라 라나'의 회원이 되었고, 주된 관심사인 은행업에 따라 '아르테 델 캄비오'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2]

그를 은행가로 유명하게 한 것은 교황청의 은행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것 덕분으로 대립교황 요한 23세[3]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메디치 사람들이 교황청의 업무에 가장 밀착되어 있었는데, 메디치 가문이 10,000 두카트를 제공해 매입하게 한 결과로 이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립교황 요한 23세와 교류하면서 많은 사업을 하였으며, 교황에게서 '나의 매우 절친한 친구'라 불렸다.

교황청의 예산을 집행하는 교황 의회와 매우 유리한 관계를 맺어 그레고리오 12세를 지지하는 나폴리의 라디슬라우스 왕과 교황 요한 23세 사이의 전쟁에서도 요한 23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1412년 6월에 교황 요한 23세와 라디슬라우스 왕이 협정을 맺을 때, 나폴리에 지불할 95,000 플로린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반니는 이런 거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했던 이유는 교황의 재정을 처리하면 나오는 거대한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이득은 메디치 은행의 수입 중 반 이상이 로마 지점 두 군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1414년 10월에 교황 요한 23세를 따라 콘스탄츠 공의회로 떠났다가 공의회에서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이단, 성직 매매, 배반, 알렉산드로 5세의 독살, 남색, 근친상간, 볼로냐의 200명 이상의 여인들을 유혹하는 죄에 대한 혐의로 폐위되고[4] 하이델베르크 성에 3년간 투옥되어 병이 들자 38,500 길더를 지불해 풀려나게 했다. 요한 23세가 바르톨로메오 데 바르디를 동반하고 피렌체로 오자 그를 받아들여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부탁해 요한 23세를 투스쿨룸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되게 했다.

요한 23세가 폐위된 이후에 알프스 북쪽의 도시들을 여행해 독일,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의 여러 지점들을 방문하면서 2년 동안 돌아다녔으며, 1419년에 요한 23세가 죽을 쯤에 피렌체로 돌아왔다가 로마 지점장이 되면서 아내에게 두 아들인 코시모와 로렌초를 맡기고 또 다시 로마로 떠났다고 한다.

아들 코시모와는 달리 서책에 전혀 관심이 없어 1418년에 재산 목록은 《성 마르그리트의 라틴어 일대기》, 라틴어로 된 《조반니 수사의 설교집》, 이탈리아어로 된 《복음서》 사본 세 권이 보유한 서책의 전부였으며, 그 대신 시의 명예를 중시하면서 명예를 중시하는 부유한 시민들이라면 공공 건물과 설립과 기존 건물의 치장에 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20년 9월 9일에 마르티노 5세가 12명의 추기경을 대동해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할 때 황금 박차를 달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영예로운 피렌체 시민인 '카발리에리'의 자격으로 대열에 따라갔는데, 이때 교황청의 사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요한 23세 때 누렸던 여러 특권을 향유할 수 없었다.[5] 1420년경 스피니 가문이 사업에 실패해 파산하자 메디치 은행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체가 되어 유럽 전역에서 가장 수익이 많은 가족 사업체로 발전했다.

3. 개인적인 성품과 처세술

개인적인 성품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정직하며 이해심이 많고 인정이 있다는 평판을 즐겼지만 그의 처세술에 능란한 예리한 시선이나 커다란 턱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을 간과하는 이는 드물었다. 달변은 아니지만 재기가 엿보이는 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재기는 창백한 얼굴에서 풍겨나는 처량한 표정과 어우러져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나 신중하고 사려가 깊어 평생 겸손과 중용을 유지해 알비치 가문이 공화국 정부에 대한 과두 정치의 영향력을 강화하자고 요청했을 때 협조를 거부했으며, 알비치 가문의 적대파들이 과두 정치에 반대하는 것에 도움을 달라고 하자 사업상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어서 정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도움을 줄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알비치 가문이 새로운 유형의 수입세와 재산세를 도입해 악명 높은 피렌체의 세제를 개혁하자고 제안했을 때 극도로 신중하게 제안에 수긍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조건과 유보 조건을 걸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일생 동안 이런 식으로 질시당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책임져야 할 약속을 피했으며, 죽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부유한 자와 강한 자를 거스르지 말면서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는 항상 자비로울 것을 권고했다.

4. 대중매체에서

아들인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인 <메디치: 마스터스 오브 플로렌스>에 등장한다. 배역은 헐리우드의 연기파 배우인 더스틴 호프먼이 맡았다. 위의 언급된 것과는 달리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 아들들을 냉철히 이용하고, 뒷공작도 열심히 하는 등 극도로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인 코시모를 철저히 은행가로 키우고자 하며 이로 인해 예술가의 꿈을 가졌던 코시모와 대립한다. 코시모는 이후 아버지와 비슷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기도 한다. 지오반니는 암살당하는데 그의 죽음은 시즌 1을 관통하는 큰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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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코시모가 사랑한 여인이었던 비앙카를 떼어놓으면서 그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훗날 둘째 아들인 로렌조의 사랑하는 사람마저 이런 식으로 제거한다. 아들이 없는데다 재정 상황이 악화되어 가문의 이름만 남은 바르디 가문을 찾아가 그의 어음을 후려쳐 사주는 대신에 콘체티나를 며느리로 맞이한다. 이후 독미나리가 발라진 포도를 먹다 암살당하며 코시모는 계속해서 그의 죽음을 추적하지만 결국 시즌 1에서는 그의 죽음을 밝히지 못한다.

사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오래된 충복으로 나오는 우고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로렌조의 애인이었던 로사가 임신하자 지오반니는 우고를 시켜 그를 미혼모 시설로 보내게 했고 로사는 그곳에서 아기를 낳다 아기와 함께 사망한다. 이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우고는 지오반니를 찾아가 이를 따지게 되고, 지오반니가 이에 대해 뉘우침없이 '하나님의 의지'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자 그가 자주 포도를 따먹던 과수원에서 포도에 독을 발라 그를 암살한 것이었다.


[1] 엄밀히 말하면 조반니는 "실질적인" 창시자이자 중시조로, 이름뿐인 메디치 가문의 태동은 보통 12세기다. 전주 이씨와 비교해 보자면 그는 전주 이씨 시조 이한보다는 전주 이씨를 조선의 국성으로 만든 초대 국왕 이성계에 더 가깝다고 보면 좋다.[2] 조반니가 가입한 '아르테 델 캄비오'라는 길드는 1252년부터 '피오리노 도로'(플로렌스, 플로린)라 부르는 금화를 발행해 급속도로 신용을 얻어 전 유럽에 통용시켰고, 이 때문에 이 금화를 처음으로 만든 피렌체 시와 은행가들이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1442년에는 200만 플로린이 통용되어 72명의 은행가, 어음 중개인이 메르카토 베키오 주변에서 사업을 했는데 그중에서 메디치 가문이 가장 번성하면서 팽창했다고 한다.[3] 20세기의 요한 23세와는 다른 사람으로 로마, 아비뇽, 피사 등 세 곳에서 교황이 생긴 교회 대분열시대 때 피사의 교황을 지낸 사람이다.[4] 진짜로 저 범죄를 다 저지른 것은 아니고, 세 교황을 다 처리할 필요가 있던 공의회에서 사퇴를 거부한 요한 23세를 먼저 덤터기를 씌워서 제거한 것이다. 뭐 몇몇 범죄는 실제로 저질렀겠지만... 이후 그레고리오 12세베네딕토 13세역시 실권을 잃고 마르티노 5세가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된다.[5] 이때 교황의 신임을 얻은 것은 메디치 가문의 오랜 라이벌인 스피니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