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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19:48

조니 헤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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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헤인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풀럼 FC 로고.svg

18대
}}} ||
조니 헤인즈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61 Ballond'or
수상
오마르 시보리
2위
루이스 수아레스
3위
조니 헤인즈
}}} ||
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파일:Johnny_Haynes_crop.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조니 헤인즈
Johnny Haynes
본명 존 노먼 헤인즈
John Norman Haynes
출생 1934년 10월 17일
잉글랜드 런던 캠던 켄티시 타운
사망 2005년 10월 18일 (향년 71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
[[잉글랜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윔블던 FC (1951)
풀럼 FC (1952~1970)
토론토 시티 (1961 / 임대)
더반 시티 FC (1970~1971)
웨얼드스톤 FC (1972~1973)
감독 풀럼 FC (1968 / 감독 대행)
국가대표 56경기 18골 (잉글랜드 / 1954~1962)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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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헤인즈_동상.png [1]

잉글랜드의 전 축구선수이며 풀럼 FC의 레전드이다.

'The Maestro' 라는 별명을 가졌고 잉글랜드 최고의 패서라고 불렸지만 전성기 시절에 안타까운 교통사고를 당하고 기량이 하락한 비운의 선수이다.

2. 클럽 경력

2.1. 풀럼 FC

풀럼 FC 통산 658경기 157골[2]

58/59시즌, 헤인즈가 34경기에서 26골을 넣는 활약에 힘입어 풀럼은 2부리그에서 2위를 기록해 1부리그 승격을 이루어 낸다.

그 다음 시즌인 59/60시즌엔 1부리그에서 10위를 기록하여 당시 풀럼 역사상 최고 성적을 이루어 낸다.[3] 60/61시즌 역시 헤인즈는 1부리그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고 그 해 발롱도르 3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1962년, 블랙풀에서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한 헤인즈는 양쪽 무릎과 발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게 되고, 62/63시즌 이후 한참 전성기를 달리던 나이에 기량이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

팀 에이스인 헤인즈가 부진하자 결국 67/68시즌 팀은 강등을 당하게 되고, 그 다음 시즌인 68/69시즌엔 더 최악으로 3부리그로 강등당하게 된다. 1970년, 헤인즈는 풀럼을 떠나게 된다.

3. 국가대표 경력

1960~63년 동안 국가대표 주장직을 맡으면서 두 번의 월드컵에 출전하여 활약을 했다. 특히 1966년 월드컵에서는 팀의 중심으로 활약을 할 전망이었지만 1962년 교통사고로 인해 기량을 잃게 되고 1966년 월드컵에 차출되지 못했다.[4]

4. 평가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이자, 잉글랜드 최고의 패서로 평가받는다. 선수 시절 인사이드 포워드로 뛰었는데, 골을 넣는 목적이 아닌 다른 선수를 보좌해주는 역할로 많이 뛰었다.[5] 풀럼에서 우승컵을 한번도 든 적이 없지만 발롱도르 3위에 랭크된걸 보면 개인 기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운의 교통사고로 인해 망한 선수지만 전성기 시절엔 발롱도르도 노려볼만 했던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1] 크레이븐 코티지 앞에 세워진 조니 헤인즈의 동상.[2] 풀럼 FC 역대 최다 출장 1위, 역대 득점 순위 2위[3] 2003/04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9위를 달성해 기록이 깨지게 된다.[4] 공교롭게도 1966년 잉글랜드는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축구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헤인즈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전성기의 기량을 유지했더라면 1966년에 월드컵에서도 주장 완장을 달았을 것이고, 당시 주장이었던 바비 무어 대신 우승컵을 들었을 것이다.[5]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대표적인 선수로는 닐스 리드홀름, 레몽 코파, 발렌티노 마촐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