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c1e31><colcolor=#FFFFFF> 조경연 趙敬衍 | |
출생 | 1918년 3월 20일[1][2]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신안마을 | |
사망 | 1991년 2월 2일[3] (향년 72세)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신안마을 | |
묘소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신안마을 |
본관 | 풍양 조씨[4] |
학력 | 강진공립보통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졸업) 진해고등해원양성소 (기관과 / 졸업) 관립 고베고등상선학교 (졸업여부 불명) |
군사 경력 | |
임관 | 해군사관학교 특별교육대 (9차) |
복무 | 대한민국 해군 |
1950년 10월 23일 ~ 1962년 8월 31일 | |
최종 계급 | 중령 (대한민국 해군) |
주요 보직 | 압록함 전기관 항공반장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장 함대항공대장 |
참전 |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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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항공기 개발자, 조종사. 본관은 풍양(豊壤). 초창기 대한민국 해군의 항공기 개발 및 운용을 주도했다.2. 생애
2.1. 임관 이전
1918년 3월 20일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에서 아버지 조남택(趙南宅, 1900.11.7. ~ 1972.11.28.)과 어머니 수원 백씨(1899.1.25. ~ 1968.8.15.)[5]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남택은 성전면장을 지냈다.성전면장을 지낸 조남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 시절부터 배와 항공기를 만들어 시험비행을 했던 그는 강진공립보통학교와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한 뒤 4년제 진해고등해원양성소 기관과에 진학하여 1937년 3월 9일 졸업하였다.(김재승, 2001, p.127)[6] 이후 관립 고베고등상선학교를 다녔다(정인재, 노경우, 2018, p.271). 이후 귀국하여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향에서 라디오방을 운영했다.[7]
2.2. 임관 이후
2.2.1. 해취호 개조
1950년 해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성전면장의 장남이었던 조경연은 조선인민군이 고향 강진군을 점령하자 생존을 위해 기술자로서 협력했고, 조선인민군이 퇴각하자 부역자로 몰리는 것을 피하고자 해군사관학교 내 특별교육대에 9차 생도로 입교하였고, 1950년 10월 23일 해군 중위로 임관하였다고 한다.[8] 모교인 진해고등해원양성소 교사에 따르면 개전 이전인 1950년 4월 20일 특별교육대 9기로 임관했는데(김재승, 2001, p.127), 만약 사실이라면 증언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9]
임관 이후 PF-62 압록의 인수요원으로 첫 발령되어 압록강함의 전기사관으로 줄곧 복무하였다. 그러던 1951년, 불시착한 미합중국 공군의 AT-6 항공기를 불하받아 이를 수리하고 개조하기 위해 14명의 항공기술자를 모집한 뒤, 해군 공창 항공반을 조직해 4월 1일 항공기 제작에 착수하였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항공기인 해취호를 완성하였다.[10] 1951년 10월 21일 대위로 진급하였다. 육상기인 기존 AT-6를 수상기로 개조한 해취호는 인원 수송, 업무연락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 그 해 11월 착수 중 사고로 손실되고 항공반도 해체되었다(정인재, 노경우, 2018, p.272). 이후 해군사관학교 이공과 교관으로 복무하였다.
2.2.2. 휴전 이후
1953년 조경연은 야마나시 항공기술학교[11] 출신 문관 정학윤(鄭學允)[12]을 포함한 23명의 기술자를 모아 해군 항공반을 재조직하고 단발 비행정인 SX-1 서해호의 개발에 나선다(장학근, 방수일, 2017, p.187). 해취호와 달리 처음부터 새로 설계된 서해호는 1954년 5월 31일 제작이 완료되어 초도비행한 뒤 6월 14일 정식으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서해(誓海)라는 이름을 받고[13] 이듬해 5월까지 활동하나 해수에 의한 부식으로 퇴역한다. 1955년에는 일본 항공잡지에 소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단발 육상기인 SX-2의 개발에 나서나 시험비행 중 사고로 폐기한다(정인재, 노경우, 2018, p.273).1956년 기존의 항공반이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로 개편되었으며, 1956년 9월 1일에는 조경연이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이어 1957년 1월 1일 함대사령부 작전참모실 항공과장으로 발령되자 새로운 항공기 개발에 나서는 동시에 육군 항공대 비행 조종 훈련을 이수하였다. 강원도에서 L-19 연락기용 엔진 네 개를 습득한 후 이를 이용해 1957년 3월 30일 신형 쌍발 비행정인 SX-3 제해호를 개발하였다. 완성된 제해호는 한 명 내지 두 명이 탑승하고 100~200마력 수준의 왕복엔진을 하나 탑재하던 이전의 다른 국산 항공기들과는 달리 200마력급 엔진 두 개를 탑재해 최대 여섯 명이 탑승하고 로켓, 기관총과 같은 무장을 탑재할 수 있는 당대 최대 규모의 국산 항공기였다.[14]
제해호의 개발 성공을 기초로 1957년 7월 17일 정식으로 해군 함대항공대가 창설되고 조경연은 1957년 4월 1일 중령으로 진급해 초대 함대항공대장에 부임했다. 함대항공대장으로서 L-19를 개조한 수상기 SX-5 통해호를 1958년 10월 18일 추가 제작하고 육상형 L-19를 수리, 배치해 함대항공대를 5대의 항공기와 10명의 조종사, 22명의 정비사를 포함한 규모까지 키워냈다. 그러나 미국 군사고문단이 미국이 제공하지 않은 미인가 장비에 대한 군수지원을 거부하면서 1961년 2월 항공기는 내무부 치안국 해양경찰대로 이관되고 뒤이어 1963년 3월 함대항공대는 해체되었다(장학근, 방수일, 2017, p.190).
2.2.3. 함대항공대 해체 이후
항공기 이관 이후 조경연 중령은 해양경찰대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한 뒤 1962년 8월 31일 예편(장학근, 방수일, 2017, p.191), 고향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신안마을로 돌아갔다. 이후 1991년 2월 2일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자동차 차동장치에 대한 특허[15]를 출원한 것 외에는 별다른 대외활동 없이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서화와 낚시, 수렵, 발명 등 개인 활동에 힘을 쏟았다.[16]3. 여담
-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신안마을에는 그가 말년을 보낸 생가가 강진군 향토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 있다.[17]
- 해군항공사령부에는 그와 그가 제작한 항공기의 이름을 딴 경연관과 서해관, 제해관이 존재하며[18] 조경연과 함대항공대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한 항공역사관[19]을 운영하고 있으나 2022년 11월 기준 코로나19로 인해 휴관중이다.
4. 참고문헌
- 김재승. (2001). 鎭海高等海員養成所校史 : 韓國海運과 海軍 創設期의 主役들. 부산 : 鎭海高等海員養成所同窓會.
- 장학근, 방수일. (2017).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본부 해군역사기록관리단.
- 정인재, 노경우. (2018). 초기 해군 항공기 개발 역사 (우리 항공의 선구자 조경연 선생님 업적 중심으로), 한국항공우주학회지, 46(3). 269-273. Doi: 10.5139/JKSAS.2018.46.3.269
5. 관련 문서
[1] 음력 2월 8일[2] #. 풍양조씨세보 6중간 병술보 7권 권156 547쪽에는 1918년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20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풍양조씨세보 6중간 병술보 7권 권156 547쪽에는 1989년 12월 18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감사공(監司公)-직장공파(直長公派) 26세 연(衍) 병(昺) 항렬.[5] 백남빈(白南斌)의 딸이다.[6] 1940년에 졸업했다는 자료도 있다.[7] #[8] #[9] 조경연의 임관 날짜는 4월 20일이라는 자료와 10월 23일이라는 자료가 모두 존재한다. #[10] 정인재, 노경우, 2018, p.271[11] 현 일본항공고등학교 야마나시 캠퍼스[12] 이후 장교로 임관, 함대항공대에서 대위까지 진급하고 항공기가 해경으로 이관된 1961년 해경으로 이직해 비행을 이어간다(장학근, 방수일, 2017, p.187). 제해호 표류 당시 정조종사로 탑승했으며 다른 세 명의 승무원들과 사흘간 빗물과 오줌을 마시며 생존한다.[13] #[14] #[15] 출원번호 20-1981-0001474 자동차의 차동장치(差動裝置)[16] #[17]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3153030?sid=102[18] https://www.ktv.go.kr/content/view?content_id=579085[19] https://www.yna.co.kr/view/AKR20130730145600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