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국시대 말기 연나라가 제나라를 침공해 치른 전쟁(기원전 284년~279년).2. 상세
2.1. 전쟁의 원인
제나라와 연나라는 남북으로 서로 이웃한 국가로, 전국시대 국가들이 그렇듯 서로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험악하지는 않았다.[1][2] 하지만 두 나라 간 전쟁의 원인이 되는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연나라의 왕인 쾌가 갑자기 멀쩡한 태자 평을 두고 제요 도당씨와 제순 유우씨의 사례를 들어 재상 자지에게 선양을 한 것이었다.[3] 이에 반발한 태자 평과 찬탈자 자지 간에 내전이 터지며 연나라가 난리가 나자 당시 선왕의 치세하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제나라가 광장 휘하의 군사들을 보내 자지와 연왕 쾌를 죽이고 쾌의 서자인 공자 연직을 연나라의 왕위에 앉히며 속국화하고, 연나라의 희성 연씨 종묘를 불태우며 대약탈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2.2. 전쟁의 준비
2.2.1. 연나라의 상황
연왕 쾌의 서자인 공자 직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연소양왕이다.소양왕은 제나라가 자신의 부왕인 쾌를 자살로 몰아 죽이고, 왕실의 종묘와 수도인 계를 약탈했던 과거를 기억하며, 제나라에 대한 복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양왕은 곽외를 스승으로 두며 여러가지 부국강병책을 시행했는데, 가장 먼저 곽외의 월급을 올려주어 천하의 인재들에게 연나라로 가면 출세할 수 있겠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는 정책을 폈다.
이 정책은 실제로 큰 효과를 거두어 명장 악의, 추신, 극신 같은 인재들이 연나라로 몰려들었고, 소양왕은 이들을 등용해 무려 28년 동안 내정에 집중하며 군사와 군량을 늘리면서 제나라를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2.2.2. 제나라의 상황
제나라는 전성기를 이끈 선왕이 승하하고, 선왕의 장남인 민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민왕은 초기에는 영특하여 조부인 위왕, 아버지인 선왕의 정책을 잘 계승했다. 게다가 유능한 맹상군을 재상으로 기용해[4] 제나라의 영토를 늘리는 등 절정기를 이끌었던 명군이었다.하지만 제민왕은 원래부터 인성이 좋지 못하여 정적들이 많았고, 게다가 말년에는 방탕해져 재상인 맹상군을 추방하고 서쪽의 이웃나라인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등의 '삼진'을 상대로 갑질을 일삼으며 어그로를 끌어, 점점 사망 플래그를 세우게 된다.[5]
2.3. 전쟁의 상황
2.3.1. 초기: 제나라의 위기
당연히 제나라의 갑질 행위를 연소양왕이 모를리 없었고 소양왕은 그동안 제민왕에게 원한이 깊었던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등의 삼진에 접근해 동맹을 맺고 제나라를 치기로 결의했다. 거기에 진나라까지 합세했는데, 이것이 바로 5국 연합군으로, 총사령관은 악의로 결정되었다. 연합군은 바로 제나라의 국경을 공격했으며, 전국시대의 후반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전쟁이 시작되었다(기원전 284년). 악의가 이끄는 5국 연합군은 제나라의 중앙군을 제수(濟水) 서쪽에서 대파했다(제서(濟西) 전투). 이후 악의는 진군과 한군을 돌려보내고, 위군은 옛 송(宋)나라 지역을, 조군은 하간(河間)을 점거케 하면서, 자신은 연군을 이끌고 깊숙히 진격했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져 민왕은 수도인 임치에서 도주했고, 악의의 연군이 임치(臨淄)에 들어가 보물과 규성 전씨 종묘의 제기를 빼앗아 연나라로 보냈다. 구원을 푼 연소양왕은 친히 제수(濟水)로 나아가 군사를 위로하고, 포상하며 큰 잔치를 열었다. 또한 대공을 세운 악의를 창국군(昌國君)으로 봉하고 나머지 성읍을 공략하도록 했다. 이때 도피한 제민왕은 소국인 위(衛)나라로 갔으나 불손하게 굴다가 공격받아 추(鄒), 노(魯)로 다시 도주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교만하게 굴다가 거부당해서 거(莒)성으로 도주했다. 이때 악의는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를 포함해 72개의 성 중 70개의 성을 정복했다.[6] 오직 즉묵과 거 2개 성만이 남은 상황에서 거로 피신한 제민왕은 초경양왕에게 구원군을 요청했고, 초나라는 장수 요치 휘하의 지원군을 보냈지만 제민왕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어그로를 잔뜩 끌다가 열받은 요치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7] 게다가 악의가 즉묵성과 거성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하면서 제나라는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하늘은 아직 제나라를 버리지 않았다.2.3.2. 명장 전단의 등장
민왕도 죽고, 두 개의 성만이 간신히 버티는 위기의 상황에서 아직 하늘이 제나라를 버린 것이 아닌지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전단이라는 하급관리였다. 전단은 제나라의 방계 왕족으로 수도 임치를 관리하는 하급관리였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9급 공무원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전단 역시 수도 임치가 함락되자 즉묵성으로 피난을 가던 상황이었는데, 여기서 전단은 수레에 사슬을 끼우고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사람들은 뭔 헛소리냐며 무시했지만 오히려 사슬을 채운 전단 가족의 수레가 빨리 가자 사람들은 전단의 지혜에 감탄을 했고, 제나라군의 총사령관이 죽자 제나라 사람들은 전단을 제나라군의 총사령관에 앉혔다. 최악의 상황에서 제나라군의 사령관이 된 전단은 우선 태자 법장을 옹립하고, 패잔병들을 수습해 즉묵성과 거성에 집중 배치한 다음 성에서 결사항전하기로 결정했다.2.3.3. 중기: 연합군의 총공격과 즉묵성의 결사항전
악의가 이끄는 5국 연합군은 남은 두 개의 성인 즉묵성과 거성을 끝장내기 위해 전병력을 배치하며 총공세에 나섰다. 첫 번째 목표는 전단이 이끄는 제나라 중앙군이 주둔한 즉묵성이었다. 당시 연합군의 사령관이었던 악의는 제나라 중앙군이 주둔한 즉묵성만 무너뜨린다면 남은 거성은 무너진다는 계획을 세우고, 전병력을 즉묵성에 투입하여 함락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즉묵성은 전단의 지휘 아래 계속 결사항전하며 버텨냈다(기원전 283년). 당시 즉묵성은 둘레가 3리인 내(內)성과 사방 5리의 외(外)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친 병사가 7,000명이 있었다. 악의는 거와 즉묵을 포위한 지 1년이 되어도 함락이 되지 않자 포위를 풀고, 거와 즉묵의 9리 떨어진 곳에 보루를 축성했다(기원전 282년경). 악의는 항복한 자들을 진휼하고, 백성들을 안정시켰으나 3년이 지나도 거와 즉묵 두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연소양왕은 악의를 참소하는 자들을 연회를 열어 유인한 후 참수하고, 악의를 제왕으로 봉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즉묵성이 긴 시간 동안 함락되지 않자 악의는 주변 지역에 선정을 베풀며 즉묵성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효과가 나타날 때 즈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2.3.4. 후기: 연소양왕의 죽음과 화우지계
즉묵성 공략에 나서던 악의에게 청천병력의 소식이 날아드는데 자신을 지지하던 연소양왕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연혜왕이 즉위했다는 것이었다(기원전 279년). 연혜왕은 태자 시절 악의를 의심해서 부왕인 소양왕에게 악의를 내쫓을 것을 건의했다가 두들겨 맞는 바람에 악의에게 원한이 깊었는데, 이를 안 전단은 이간계를 써 혜왕으로 하여금 악의를 실각시키도록 만들었다. 어리석은 연혜왕은 악의를 내쫒고 기겁이라는 장수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기겁은 어리석기로 유명했고, 전단은 일부러 성안의 병사들에게 곡소리를 내게 하거나 아니면 부자들에게 가서 기겁에게 뇌물을 바치도록 했다. 이는 기겁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략이었으며, 이에 속은 기겁은 제나라는 어차피 끝났다며 경계를 소홀히 했다. 이를 안 전단은 몰래 성안에 구멍을 낸 다음 수많은 소를 준비해 뿔에 칼을 달고, 꼬리에 불을 붙인 채로 연나라군의 진영까지 돌격시켰고, 5,000명의 병사들을 이끌며 연나라군의 후미까지 기습해 연나라군을 격파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도록 했다. 또한 총사령관인 기겁까지 전사시키는 맹활약을 펼쳤는데, 역사상 이를 화우지계라고 한다(즉묵 전투).이후 전단이 이끄는 제나라군은 연나라군에 대한 총공세에 나서게 되었고, 그 결과 5년만에 빼앗긴 70개의 성을 수복하며 연나라군을 몰아냈다.
3. 결과
연•제 두 나라 모두 큰 피해를 봤다. 제나라의 경우 멸망 직전에서 전단의 분전으로 승리했지만 국력에 큰 타격을 받았다. 제양왕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했지만 예전만큼[8] 회복하지 못한 채 끝내 진왕 영정에 의해 멸망했다.연나라 역시 소양왕이 승하하고 연혜왕이 악의를 실각시키는 트롤링으로 인해 주력군을 죄다 날려버리고, 게다가 계속되는 연혜왕의 실정[9]으로 인해 국력을 회복한 제나라가 전단을 위시로 공세를 가하면서 반대로 중양 땅을 제나라에게 빼앗기고 계속해서 제군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바쁜 실정으로 바뀌었으며, 조나라에게도 공격을 받는 등[10] 더블 크리티컬로 타격을 받고 역시 진왕 영정에 의해 멸망했다.
4. 여담
실각한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했고, 참패로 인해 후회하게 된 연혜왕으로부터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지만 거부했다. 대신 연혜왕은 악의의 아들인 악간을 등용했다.제나라의 영웅이 된 전단은 남송의 악비, 명말의 원숭환 같이 중국의 명장들이 당하는 토사구팽없이 안평군에 봉해졌고, 전후 제양왕을 보필하며 국정을 이끌어나갔다.
전쟁에 참여했던 그 누구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사자들이 아닌 진나라에게만 좋았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도 진나라는 주변국인 위, 한, 초 삼국의 영토를 끊임없이 잠식해 가고 있었으며 그걸 그나마 상대할 국력이었던 제나라가 자업자득이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멸망의 위기에 놓이게 되어 진나라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반대로 보면 그렇게 진나라한테 털리는 와중에도 옆 나라들이 제나라 만큼은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그 진나라도 포함한 동맹을 맺은 것이니 제나라 민왕의 패악질이 그만큼 심했다는 거지만. 차라리 연나라가 제나라를 완전히 병합하고 그걸 기반으로 국력을 신장시켰으면 진나라의 새로운 라이벌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걸 또 혜왕의 잘못으로 주력군은 괴멸당하고 기껏 얻은 영토는 모두 빼앗겨 버렸으니... 이후 그나마 진나라를 상대하던 조나라마저 장평대전으로 몰락함에 따라 진나라의 천하통일이 가속화되었다.
대만의 열차 등급 중 하나인 쥐광하오(거광호)는 이 전쟁에서 따 온 장제스의 훈시인
"거 땅에 있었던 시절을 잊지 말고 대륙을 광복시키자"
에서 따 온 것이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1] 연장공 시절 연나라가 산융족의 침공을 받자 패자인 제환공이 구원하기도 했다.[2] 의외로 이웃나라인데 제나라와 연나라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전쟁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은 별로 없다. 바로 이웃동네인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등의 '삼진'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초나라도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전쟁을 걸었으며, 진나라도 전쟁을 많이 하기로는 마찬가지였는데 어째서인지 제나라와 연나라는 서로 간에 평온한 편이었다.[3] 이게 정말 어이가 없이 일어난 일인 것이, 재상 자지 일파의 신하인 녹모수가 연왕 쾌에게 "요임금과 순임금의 예를 따라 자지에게 선양해보시죠? 그럼 왕께서 덕이 높다는 것이 천하에 알려질 겁니다. 아, 물론 자지는 절대 안 받을 거고요." 라는 식으로 꼬드겼는데 연왕 쾌는 무슨 생각인지 거기에 낚였다.[4] 나중에 맹상군이 제민왕에 의해 쫓겨났을 때 그의 식객이었던 풍훤은 위나라 왕에게 찾아가서 "제나라를 이렇게 강하게 만든 건 맹상군" 이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위나라 왕이 그 말에 반박은커녕 오히려 풍훤의 말에 낚여 맹상군을 초청하려고 한 걸 보면 당대에 맹상군의 능력은 대단했다고 알려진 듯하다.[5] 전국 7웅에는 끼지 못했던 송나라의 군주 송강왕이 왕을 칭했다는 것을 이유로 삼진을 끌어들여 송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이후 연합군을 군사력으로 위협해 쫒아내고 송나라의 영토를 홀라당 먹어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6] 당시 연나라군은 승승장구했고, 제나라의 성읍은 모두 소문만 듣고도 붕괴했다. 악의는 연군을 정비해 노략질을 금지하고, 제나라의 숨은 현사를 찾아 두터운 예로 후대하며, 조세를 너그럽게 하고, 포학한 령을 없앴으며, 낡은 령을 정비하니, 민왕의 사치와 폭정에 시달리던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악의는 좌군을 보내 교수(膠水)를 건너 동쪽으로 동래(東萊)에 진격하게 했고, 전군은 태산(泰山)을 돌아 바다까지 가게 해 낭야(琅邪)를 취하도록 했다. 또한 우군은 황하와 제수(濟水)를 돌아 아(阿)와 견(鄄)에 주둔해 위나라군과 연합하게 했고, 후군은 북해(北海)를 끼고 천승(千乘)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중군은 수도 임치에 남아 진압하도록 했다. 당시 제나라 사람으로, 연나라로부터 식읍을 받은 자가 20여 명이었고, 연나라의 도성인 계(薊)에서 작위를 받은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악의는 6개월 동안 제나라의 70여 개 성을 함락시켜 모두 연나라의 군현으로 편입시켰다.[7] 초나라 장수 요치가 제나라를 구원하러 오니, 민왕이 그를 재상으로 삼았으나, 야심을 품은 요치가 연나라와 제나라를 나누어 가지기 위해 민왕을 잡아 거(莒) 부근의 고리(鼓里)에서 시해했다. 당시 요치는 민왕의 허벅지를 활로 쏘고, 근육을 뽑은 뒤, 묘당의 대들보에 매달아 하루 아침에 죽게 만들었다. 그후 왕손인 전가가 400명을 모아 요치를 공격해 죽이니, 신하들이 민왕의 아들을 찾아 옹립하려고 했다.[8] 과거 제민왕의 실정 이전까지는 전국칠웅 중 가장 강한 진나라가 "우리가 동제, 서제라는 칭호를 만들어서 진나라가 서제, 제나라가 동제를 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는 제안을 할 정도로 강성했다. 제나라도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였던 환공 이후 몇번의 약해지는 시기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춘추시대 초기부터 꾸준히 강국이었다. 비록 이때의 제나라는 강성 여씨의 제나라(강제)가 아닌 규성 전씨의 제나라(전제)였지만 강제 시절의 제나라에서 국군만 바뀌고 나머진 그대로 이어받은 국가였다. 이에 비해서 한, 위, 조의 삼진은 춘추시대 최강국이었던 희진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각각의 국력이 나머지 국가들보다 앞서지 못했고, 외교 측면에서도 일관된 정책없이 박쥐처럼 왔다갔다하느라 국제 정세의 주축이 되지 못했다. 연나라는 구석에 쳐박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장평대전으로 남자의 씨가 마른 조나라한테조차 처참하게 깨질 정도로 악의의 시기를 제외하면 힘을 쓰지 못했다. 또한 서쪽의 영진도 상앙의 변법 이전까진 희진과 위나라한테 효산에서 입구컷을 당해 중원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편 초나라는 땅은 넓었지만 개발이 덜 된 지역이 많아 실제 국력은 크기에 비해 약했다. 그래도 춘추시대를 북방의 희진과 양분했으며, 전국시대에도 서방의 영진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꾸준히 강대국이었다.[9] 사실 연혜왕의 병크는 이 제-연 전쟁에서 저지른 것 외엔 잘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재위 기간도 7년밖에 안되는 왕이기도 하고, 바로 뒤에 나오는 중양 땅을 빼앗긴 것도 다음 대인 연무성왕 때의 일이었다.[10]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의 레전드급 명장이었던 백기에 의해 포로들이 대량 학살당해 조나라 남자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는 장평대전을 겪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문제는 이런 조나라를 상대로 연나라가 공격을 했다가(장평대전으로부터 9년 뒤 일이다) 외려 염파가 장군으로써 지휘하는 조나라 군대에게 역공을 당했다. 어느 정도냐면 수도 계를 포위당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