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ns de la Garde Impériale |
1. 개요
해병으로서 그들은 절대 후퇴하지 않았고, 최고의 군인임을 드러냈다. 필요할 때면 선원, 보병, 포병, 공병 모든 방면에서 가치있는 존재임을 보였다. 그들이 맡지 못할 임무따위는 없었다.
나폴레옹 1세
1803년 창설되어 1815년 해체된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해병대이다.나폴레옹 1세
2. 역사
1803년 9월 17일, 당시 프랑스 공화국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Garde Consularie(통령근위대)에 737명의 수병으로 구성된 대대를 창설할 것을 지시했다. 이 부대의 목적은 항구 또는 선박에서 국가 원수를 보위하는 것이었다.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 통령근위대 수병 대대는 820명의 장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폴레옹은 이들을 5개의 편대로 나누어 총 818명을 제국근위대로 편입시켰다.
이들은 영국 침공의 일환으로 1803년부터 Camp de Boulogne(볼로뉴 캠프)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1805년 트라팔가르에서의 패배 이후 독일 전역에 육전대로서 투입되어 울름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여한다.
1806년에는 102명의 해병이 프로이센 전역에 종군하여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중 단치히 포위에 참여했으며 이후 폴란드로 이동하여 아일라우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에 참여한다.
1807년 틸지트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로 복귀했지만 곧 반도 전쟁에 참전하여 바일렌 전투에 참여한다. 이때의 격전으로 대대원 중 ⅓을 잃었고, 나머지 ⅔는 포로가 되어 카디스로 압송되었다.[1] 대대는 1809년에 재창설되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150명의 중대급으로만 유지되었다. 이들은 주로 포병으로 바그람 전투에 참전하였다.
1810년 부대원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1,136명에 이르렀으나 러시아 전역에서 수많은 전투와 추위, 굶주림으로 부대원 대부분을 잃어버린 채 85명만이 독일에 도착하였다. 이후 새로운 신병들로 보충된 제국 근위대 해병은 청년 근위대와 같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프랑스 동맹에 맞서 싸웠다. 이들 중 21명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나는 나폴레옹을 따라간다.
1815년 백일천하 당시 150명으로 재편성된 이들은 워털루 전투에 참여하였고, 워털루 전투 이후 11일이 지난 1815년 8월 15일 완전히 해체되었다.
3. 모집 요건
- 최소 25세 이상
- 최소 3개 이상의 전역에 참여
- 키가 1m 78cm에서 1m 84cm 사이 [2]
- 신체 건강하고 도덕성을 갖춰야 함
- 읽고 쓸 줄 알아야 함
4. 참여 전투
- 오스트리아 원정 - (1805)
- 프로이센-폴란드 전역 - (1806 ~ 1807)
- 반도 전쟁 - (1808)
- 독일-오스트리아 전역 - (1809)
- 러시아 원정 - (1812)
- 독일 전역 - (1813)
- 프랑스 전역 - (1814)
- 벨기에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