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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근위대 기마척탄병연대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프랑스 제국 근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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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기마척탄병연대№1.jpg파일:기마척탄병연대№2.jpg
Regiment de Grenadiers-à-Cheval de la Garde Impériale[1]"Haut les têtes, la mitraille c'est pas de la merde!(고개를 들라! 저건 포도탄이지 똥이 아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
1. 개요2. 역사
2.1. 편제2.2. 전사(戰史)
3. 여담

1. 개요

기마척탄병연대는 프랑스 공화국의 총재 근위대에서 기원한 프랑스 제1 제국의 중기병 연대이다.[2] 기마척탄병연대는 원래 고참 근위대인 제1 기마척탄병연대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청년 근위대인 제2 기마척탄병연대[3]가 창설되면서 둘을 묶어 부르는 말이 되었다.

2. 역사

2.1. 편제

기마척탄병연대의 기원은 총재 정부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1795년, 공화력 3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112명으로 이뤄진 기병대 2개 중대가 창설된다. 기병대는 1년 후인 1796년이 되어서야 복무를 시작했고, 그해 척탄병이라는 이름이 붙기로 결정되었다. 총재 근위대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와 통령 정부 수립 이후 개편이 이뤄졌는데, 1799년 11월 28일의 법령은 기마척탄병 부대와 기마샤쇠르 부대를 통합시킨 통령 근위대 산하 기마연대를 창설시켰다. 이 연대는 각각 86명씩 2개 중대로 이루어진 2개 전대를 보유했다. 1801년과 1802년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군에 의해 다시 한 번 개편이 이뤄졌는데 2개 중대로 이뤄졌던 전대가 4개 중대를 이끌도록 증편되었고, 참모진도 강화되어 1802년 3월 8일 기준으로 31명의 장교와 960명의 병사를 보유한 연대로 거듭났다.

1804년 5월 18일, 통령 근위대가 제국 근위대로 전환됨에 따라 아 연대도 제국 근위대로 편입되었고, 각 중대별 123명씩 총 1016명의 장교와 부사관, 사병 등 4개 전대 휘하 총 8개 중대로 연대를 편성했다. 다음 해, 두 개의 Vélite 전대(800명)가 연대에 합류했으나 1811년 8월에 5번째 전대 창설을 위해 폐지되었다. 모스크바 원정 직전에 비행대 수를 4개로 줄였지만 모스크바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1813년 1월 척탄병들은 제5 전대와 제6 전대의 창설과 함께 재편성되었다. 이 두 전대는 청년 근위대 소속으로 간주되며 "제2 기마척탄병연대"로도 알려져 있다. 이 청년 근위대 기마척탄병들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고참 근위대 전대와 함께 전투를 벌였다. 1813년 (Colonel Claude Testot-Ferry)클로드 테스토-페리 대령이 지휘하는 제1 정찰연대는 기마척탄병연대에 소속되어 "정찰척탄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차 왕정복고 당시 루이 18세의 명령에 따라 연대가 해산되어 프랑스 왕국군 흉갑기병 군단으로 넘어갔고, 제6 전대는 기마소총병대로 넘어갔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중 복원되어 자유 제정이 무너지기 전까지 대육군에서 복무하였다.

2.2. 전사(戰史)

파일:기마척탄병연대№3.jpg
마렝고 전투 중 돌격하는 기마척탄병연대.
기마척탄병연대의 첫 교전은 마렝고 전투에서 벌어졌다. 1800년 6월 14일, Novi(노비)로 진격하던 오스트리아 용기병 2개 중대는 통령 근위대 소속 기병 360기의 돌격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용기병은 285명 중 210명을 잃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수세에 몰렸을 때 장바티스트 베시에르는 통령 근위대 기병 전체를 동원해 대규모 돌격을 실시했고, 24명 사망, 24명 부상, 말 48필 손실이라는 피해를 입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군기 3개를 탈취하는 전과를 세웠다. 나폴레옹은 이 돌격에 대해 "그들은 이보다 더 시기적절하게 도착할 수는 없었다."라며 극찬했다.

이들의 활약은 아우스터리츠에서도 이어졌는데 러시아 포병대에 의해 1개 대대가 전멸하는 사고가 터지자 이를 수습키 위해 기마샤쇠르, 맘루크, 기마포병대와 함께 투입되었다. 처음에는 기마샤쇠르 2개 전대와 척탄병 3개 중대가 투입되었으나 러시아 근위 기병대의 투입으로 고전하자 나머지 기마샤쇠르와 맘루크, 기마척탄병이 투입되었다. 러시아 근위 기병대와의 격전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기마척탄병은 단지 2명의 사망자와 22명의 부상자를 낸 채 지휘관과 참모를 포함해 200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고, 27문의 포를 노획했다.

파일:기마척탄병연대№4.jpg
아일라우 전투 중 돌격하는 기마척탄병연대.
아일라우 전투 초반, 이들은 러시아 포병대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 이때 부대원들이 날아오는 포도탄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본 Louis Lepic(루이 르픽) 대령이 한마디를 날렸다.
Haut les têtes, la mitraille c'est pas de la merde!
고개를 들라! 저건 포도탄이지 똥이 아니다!

이후 프랑스군 기병의 대규모 돌격이 있었으나 이들이 러시아의 포위망에 갇혀버리는 큰 사고가 터진다. 이에 나폴레옹은 베시에르에게 근위 기병대의 투입을 명령한다. 곧 기마샤쇠르, 제5 흉갑기병연대 소속 흉갑기병, 근위척탄병들의 돌격이 이어졌다. 근위척탄병들은 러시아의 전선을 뜷어내었지만 갑작스럽게 닥쳐온 눈보라 때문에 고립되었고, 이내 러시아군에 포위당했다. 러시아군은 항복을 요구했으나 루이 르픽 대령은 "이 사람들이 항복할 사람들로 보이더냐!"라고 응수하며 돌격을 명령했고 이들은 결국 프랑스군 전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대는 이 전투에서 18명의 장교 손실이 발생했고,[4] 많은 병사들을 잃었으나 이들의 돌격으로 포위된 기병들이 프랑스군 진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 활약으로 루이 르픽 대령은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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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측 그림은 아일라우 전투에서 기마척탄병연대를 묘사한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드타유의 작품으로, 당시 레픽 대령은 기병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2] 때문에 기마척탄병연대는 제국 근위대 기병대 중 가장 오래된 부대이다.[3] 모스크바 원정 이후 손실을 메꾸기 위해 창설된 제5 전대와 제6 전대를 일컫는다.[4] 4명 사망, 14명 부상[5] 단, 레지옹 도뇌르 수상자에게는 다음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