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 시절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SR 프리모리예주 니콜스크우수리스키(현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우수리스크 도시관구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1] 1935년 중국 만주의 간도에 있는 조선인학교인 광명중학교를 거쳐,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에 5기로 졸업했다. 졸업 성적 우수자로 추천되어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하게 됐는데, 보병에서 기병으로 병과를 바꿈에 따라 1년간 만주군 기병훈련소를 거치느라 동기인 김석범, 석희봉보다 한 기수 늦은 55기로 편입하여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이후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権)으로 창씨개명하고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였다. 만주군 헌병 장교로서 계인주, 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이 시베리아 철도를 폭파하려고 만든 특수부대 돌격대에서 3개월간 폭파 훈련을 받은 뒤 독립헌병대에 배치되어 랴오허 방면으로 출동했다. 1941년 신징에 있는 만주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하면서 3월에 헌병 중위로 진급했고, 1942년에는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에게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다''라며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2]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고등군사학교[3]에 입교하여 졸업 직전 일제의 패망을 맞이했다.
2. 해방 이후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헌병 대위였던 정일권은 부대명을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바꿨다. 소비에트 군이 신경에 입성하자 만주군과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군인 400여 명을 모아 '신경보안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았다. 후에 김석범에게 사령관 직을 넘겼으나, 소련군 NKVD 본부로 연행됐다. NKVD 본부로부터 모스크바에서 6개월간 재교육을 받고 북한으로 가서 군대 창설에 종사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감옥에서 소련군을 비방한 것이 발각되어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되었다. 이에 기차를 타고 소련으로 끌려가던 중에 탈출해서, 하얼빈 - 평양 - 개성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1945년에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1월 졸업과 동시에 조선국방경비대의 정위(대위에 해당함)로 임관하였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 중에서 기수 서열이 매우 높았다. 만주군 출신 장교들의 대부로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4]
1946년 5월 23일에 1대대[5] 소속 병사들이 영등포 보급중대에서 2개 차량의 보급품이 부정처분되었다며 이런 사이비 장교들을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색출하여 쫓아낼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B중대장의 대위 정일권이 훈시하여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불만이 많던 병사들은 정일권을 쫓아냈다.미군의 출동으로 겨우 그들을 진정시켰으나, 이날 저녁에 중대 선임부사관들이 정일권의 숙소를 찾아와 요구의 관철을 주장하고 대표자 체포에 항의하며 정일권을 폭행하는 등 7~8시간이나 난동을 부렸다.[6]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짧은 기간중에 빠르게 진급하여, 1949년 2월에 육군 준장이 되었다. 그 해 12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장이 되었다.
3. 6.25 전쟁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 육해공군총사령관이 서울 함락으로 해임되자, 1950년 7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육-해-공 3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7] 이후 낙동강 방어전, 인천상륙작전, 북진, 중국의 참전에 따른 후퇴, 38선 일대 재탈환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미국이 주도하는 UN군 사령부 지휘 하의 한국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이 드러나면서, 그에 따른 문책 차원에서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하였다.[8]
총사령관 사임 직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미국으로 파견되어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입교해 1952년 7월 졸업하였다.[9] 귀국 후 2군단장으로 영전하여 저격능선 전투[10], 금성 전투 등을 지휘한 후 휴전을 맞았다.
4. 정치 활동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이형근 장군과 같이 2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그 해 6월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하였다. 예편한 뒤에는 주터키대사, 주미대사 등 외국의 여러 국가에서 외교관을 지냈다.[11]1963년 12월 박정희 정권의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5개월 뒤인 1964년 5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일회담 당시에 외무부장관까지 겸임하며, 그의 국무총리 재임시절에는 이른바 '불도저내각', '돌격내각'으로 불릴 정도로 한일기본조약을 맺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1966년 한국비료공업(당시 삼성그룹 소속)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에게 똥물(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12] 그 후 1970년 12월 정인숙 살해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1년 7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2년에는 백남억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 당의장서리가 되어 집권당의 2인자가 되었다. 1973년 2월에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79년 초까지 6년간 국회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비록 유신헌법의 국회는 거수기나 다름이 없었지만, 여하간에 최장수 국회의장 이효상(8년)의 뒤를 잇는 영달을 누렸다.
1979년 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4.1. 말년
1980년 5.17 내란으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에서는 국정자문위원,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1989년 1월부터 박원근의 후임으로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아 2월부터 후신인 한국자유총연맹 출범을 주도하는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 1월 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되어 있다.[2] 덕분에 신경군관학교 1기에 광명중학교 출신이 11명이나 된다.[3] 1943년 신경에 설립된 고급장교 양성기관. 정일권은 제2기 합격생 25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4] 특히 만주국육군군관학교 후배인 박정희를 위기 때 구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대사의 한국군 동향 보고에 의하면 한국군 내 파벌에서 정일권은 함경도 파벌을 이끌고, 봉천군관학교 9기인 백선엽은 평안도 파벌을 이끌었다고 한다. 일본육사 출신인 이종찬은 입학 때부터 일본육사인 파벌을 이끌었다.[5] 대대장 채병덕[6]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대대장이던 채병덕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7] 1950년 4월 22일부로 미국 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갔으나, 전쟁초기 육군참모총장이자 3군총사령관인 채병덕 소장이 방어작전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하여 미군의 불신을 받았고, 미군정시기 양성한 주요 지휘관들당시 미군은 광복군이나 일본군, 중국군(중화민국군), 만주군 출신자들의 계급과 경력을 거의 다 무시하였다.이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여 했기에 참모총장으로 임명받을 수 있었다.[8] 19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당시의 발언도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검찰관이 정일권에게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이에 정일권은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발언했는데 정일권의 발언에 격분한 김석원이 "이봐! 오늘 답변 그게 뭐야! 당장에 계급장을 떼어버려!"라고 일갈했다. 당시 정일권은 소장, 김석원은 준장이었기 때문에 김석원에 대한 징계 얘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김석원은 일본군 대좌 출신이어서 그냥저냥 무마되었다.[9] 정상적인 군대라면 야전의 실병력을 지휘하는 코스를 거친 후 참모총장이 되어야 하는데 정일권은 그런 거 없었던 게 문제. 정일권 자신은 이 인사 조치를 일종의 좌천으로 여겼다 한다. 정일권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것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때는 문제없이 지나가더니, 국민방위군 사건에는 걸려서 물러났으니 말이다. 이 때문에 사단장에 임명된 정일권은 상심해 전역을 할 생각이었는데 백선엽 등 다른 장군들이 말려 하지 않았다.[10] 저격능선 초반 전투가 바로 중국군이 아직도 승전으로 여기는 상감령 전투이다.[11] 당시에는 예편한 고위 장성들에게 대사 자리를 주어 해외에 내보내는 관례가 있었다.[12] 이 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했고 김두한이 뿌린 오물을 직격으로 맞은 정일권은 양복과 시계에 심한 똥냄새가 배는 바람에 모두 버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