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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병서.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친 명저.2. 척계광의 《절강병법》
16세기 무렵, 명나라 남부 해안에는 센고쿠시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후기 왜구). 이런 왜구들은 창과 칼을 이용한 단병접전에 능했는데,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어난 인물이 바로 척계광이었다. 척계광은 보병 위주의 왜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사(궁수), 포(총 포수), 감(창검수)으로 구성된 부대가 체계적으로 왜구를 토벌하는 전술을 개발했다. 이를 《절강병법》이라 칭한다. 단순한 보병전술서 수준이 아니라 병력의 징집, 훈련, 군수물자의 생산과 보급까지 총망라했다.척계광은 이런 《절강병법》으로 남쪽의 절강성과 복건성 일대를 침탈하던 왜구를 토벌했고, 이런 병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기효신서》였다. 7책 18권으로 구성된 《기효신서》는 명나라의 군사체계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참고로 집궁제원칙에 등장하며,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하여 널리 알려진
전추태산 발여호미(前推泰山 發如虎尾)
라는 구절이 바로 이 《기효신서》에서 비롯되었다. 단, 원문에 적혀 있는 정확한 문구는 이다.3. 조선의 군대를 바꾸다
1592년,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을 막기에 버거웠던 조선의 선조는 명나라 신종 만력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일본군의 특성을 감안해, 여진족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북방 기마병보다 왜구를 상대한 전술에 익숙한 《절강병법》에 단련된 남방 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이 잘 싸우는 모습을 보고 선조는 조선계 명나라 장수 이여송[2]에게 조선군에게도 명나라의 《절강병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으나, 이여송은 "군사기밀을 가르쳐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그러나 선조와 류성룡 등은 어떻게든 조선군을 명나라군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입수하려고 애썼다. 조선의 독자적인 군사서적들은 한양이 함락되면서 같이 불타버린 터라 명나라 책에 더 매달렸다. 마침내 류성룡이 이여송 휘하의 무관을 매수해 《기효신서》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책을 얻긴 했으되 훈련법이나 군대체계를 구성하는 방식은 알 수가 없어 고민하던 중, 병사 70여 명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에게 보내 은밀하게 《기효신서》의 병법을 배우도록 했다.
이러던 차에 한명회의 후손이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고 전공을 세운 한교가 천문, 지리, 복서 등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류성룡에게 천거를 받았다. 조선는 그를 훈련도감의 낭청으로 임명해 《기효신서》의 해석과 번역 작업을 담당하게 했다. 일단 한교는 《기효신서》에 따라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의문점이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명나라 장수에게 물어 이해한 다음, 훈련도감 병사들을 가르쳐 훈련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1594년 4월, 훈련도감은 조총병 포수 5초, 근접전 전문 병사인 살수 4초를 육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배운 《기효신서》의 병법은 조선 후기 군대의 체제를 바꾸었다. 훈련도감이 설치되면서 사, 포, 감의 삼수군을 육성했다. 또한 《기효신서》의 무술은 이후 조선이 일본의 왜 검법 등을 접목해 영조대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18가지 보병무예가 수록된 무예 신식, 즉 《무예신보》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마상무예 6가지를 더하여 24가지 무예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게 된다.
4. 관련 문서
- 《병학지남》
- 종로도서관 고문헌 검색시스템에서 원문 확인이 가능하다.[3]
[1] 대구(對句) 중 앞 구에서 '수여(手如)'를 빼고, 뒤 구에서는'후수(後手)'와 '악(握)'을 빼고 '발(發)'을 넣어 고쳤다.[2] 성주 이씨였다.[3] 종로도서관 소장 『기효신서』는 18권 6책으로 구성된 1566년 간행 중국본 계열로서 국내 그 전존본이 많지 않으며, 조선에서 간행된 기효신서와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원형자료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