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28 02:23:15

저주받은 이들을 위한 묵념

파일:Freljord_Silence_for_the_Damned.jpg

1. 개요2. 1장3. 2장4. 3장5. 4장6. 5장7. 6장8. 7장9. 8장10. 9장11. 10장

1. 개요

우디르세주아니, 그리고 볼리베어와 관련된 단편 소설이다.

2. 1장

얼어붙은 강물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불빛 쪽으로 가면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을 것 같았다. 우디르는 도시의 가정집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난롯불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그 옆에는 따뜻한 모피 침구가 있었다.

강의 얼음이 큰 소리를 내며 갈라지자 우디르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입고 있던 털옷은 진눈깨비에 젖어 있었다. 곧 해가 넘어가면 훨씬 더 추워질 터였다. 세주아니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우디르 역시 세주아니와 논쟁을 계속하거나 그녀의 군대에 다시 합류하고 싶지는 않았다.

발아래로 펼쳐진 계곡에 세주아니의 군대가 나타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겨울 발톱 부족은 십여 개의 소규모 부족과 돌 이빨 부족 전체를 거둬들였다. 수천 명의 노련한 전사, 기갑병, 매머드 기수와 냉기의 화신을 휘하에 둔 세주아니는 진정한 전쟁의 어머니로 거듭났다.

본대 앞에서 세주아니의 친위대 소속 전사들이 천막을 치고 있었다. 피의 서약자가 묵을 숙소이자 정찰대 본부로 쓰일 곳이었다. 야영지 한가운데에는 세주아니의 푸른색 천막이 있었고 룬 문자가 수 놓인 가죽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우디르는 야영지로 다가갔다. 극심한 허기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지만, 길쭉한 턱은 이미 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옆을 지나가는 울프하운드를 보고 나서야 우디르는 이 감정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우디르는 울프하운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마음대로 움직이는 턱을 제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머릿속을 파고드는 울프하운드의 의식을 밀어냈다.

우디르는 피의 서약자와 함께 천막을 치고 있는 세주아니를 보았다.

우디르는 자랑스러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세주아니다운 모습이었다. 어떤 일이 됐건 간에 그녀는 앞장서서 행동했다. 젖은 땅에 매머드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세우는 일은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세주아니는 무릎을 꿇고 엄니로 만든 말뚝을 진흙 속에 박아 넣었다. 옆에는 세주아니와 피의 서약을 맺은 전사들이 눈비를 맞으며 돕고 있었다. 그들은 궂은 날씨를 저주하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세주아니의 모습을 보고 우디르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녀의 몸집은 몰라볼 정도로 커져 있었다. 오래전에 만났던 빼빼 마른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다고 그때의 모습이 그립진 않았다. 당시 세주아니는 절박하게 우디르의 도움을 갈구했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그는 세주아니에게 짐이 될지도 몰랐다. 우디르는 걱정이 앞섰다.

세주아니가 빗속에서 소리쳤다. "우디르, 날씨를 봐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우디르가 대답했다. "서쪽으로 며칠만 가면 바르킨 부족의 영토야. 강을 건너지 않고 기습할 수—" 순간 옆으로 십여 마리의 말이 지나가면서 우디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는 말들의 근육이 추위 때문에 오그라든 것을 느꼈다. 우디르는 그중 가장 가까운 말에게 소리쳤다. "그만! 지금은 귀리 못 줘!"

그 모습에 깜짝 놀란 피의 서약자들이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세주아니가 경고의 눈짓을 하자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무리 피의 서약자들이라고 해도 부족 주술사의 기이한 행동에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우디르는 등 뒤로 손을 숨겼다. 그리고 주머니에 몰래 손을 넣어 은으로 만든 작은 못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명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손에 느껴지는 고통은 머릿속을 비우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우디르는 인간의 대화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바르킨 부족 마을까지는 엿새면 충분해. 그 마을에는 울타리도 없다고." 우디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세주아니는 우디르를 잠시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요." 세주아니는 늘어진 천막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강 건너 도시를 점령하지 않으면 우린 얼어 죽을 거예요!" 그녀의 손은 다시 근처 전사들에게 향했다. "전사들은 자식들을 먹이느라 며칠째 식사도 못 했어요. 어제는 오르가이네 딸아이가 죽어서 내가 함께 묻어 줬어요. 두 살배기였지만, 갓난아기처럼 작고 연약했죠." 세주아니는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버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더는 추위에 아이들을 잃을 수 없어요."

"그럼 지금 공격해." 우디르가 강 너머의 도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전사들을 믿어. 도끼를 휘두르고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물어뜯으면 돼. 옛날 방식대로 말이야."

"옛날 방식은 최고의 전사들로 전투를 치르는 거예요. 지금 어사인족보다 강한 부족이 누가 있죠? 그들의 도움 없이 강을 건너면 수많은 전사들이 희생될 거예요. 굶주린 전사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없어요. 난 그들에게 힘과 승리를 약속했단 말입니다." 세주아니는 우디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건 애쉬의 군대라네." 우디르가 세주아니의 말을 가로챘다. "애쉬는 날이 갈수록 위세를 더하고 있어. 날마다 새로운 부족들이 아바로사 동맹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겨울 발톱 부족의 힘을 키우고 싶다고 했지? 어사인족의 도움을 받으면 노예를 거둘 수 없고 적 전사들을 전향시킬 수도 없어. '잊혀진 자들'이 저 도시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릴 테니까."

"우리는 겨울 발톱 부족입니다. 그들은 아군이고요. 내가 일으킨 전쟁이니 내가 멈추라고 하면—"

"어사인족은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아!" 우디르가 확신하며 소리치자 못으로 손바닥을 찔러도 맑아지지 않던 정신이 마침내 깨끗해졌다. 우디르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놈들은 피에 굶주려 있어. 함께했다간 우리도 그렇게 될 거야."

세주아니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나는 평생 당신의 조언을 따르며 살았지만, 이번엔 아니에요. 우리는 내일 저 도시를 반드시 점령할 겁니다."

"이보다 더 힘든 상황도 이겨냈잖아." 순간 우디르의 머릿속으로 멧돼지와 말, 늑대, 사람, 엘누크의 의식이 밀려 들어왔다. 우디르는 머릿속을 비워내려고 애썼다. 이 기회를 놓치면 세주아니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주아니." 우디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칼키아[1]는 지도자로서 흠이 많았어. 쉽게 타협했고 포기도 빨랐지. 그래서 네가 얼마나 실망했는지도 알아. 하지만 진짜 겁쟁이는 네 할머니였어. 약한 모습을 보이기 두려워했지. 그리고—"

"헤지안 할머니를 욕보이지 말아요." 세주아니가 경고했다.

"칼키아조차 네 할머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어." 우디르는 말을 뱉으면서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실수가 뭐죠? 어머니로부터 날 거둔 거요?" 세주아니의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당신은 내가 어머니처럼 남부의 겁쟁이가 되고, 족장 자리에 집착하길 원해요? 술에 절어 방탕하게 살길 바랍니까? 어머니는 전사로서, 지도자로서 실패한 분이었어요." 세주아니는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할머니의 실수는 어머니의 통치를 묵인한 것, 그뿐이에요."

"헤지안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너를 키운 거야."

"나는 그걸로도 감사해요."이제 세주아니의 표정에는 우디르를 향한 일말의 친근함이나 존중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잊혀진 자들'을 부를 겁니다. 나를 도와 어사인족과 협상을 하든지, 아니면 이 추위 속에서 얼어 죽든지 마음대로 해요."

이제 우디르에게 희망은 없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다. "그럼 나는 떠나야겠군. '쫓기는 자'는 나를 그리 반기지 않을 테니까." 우디르 역시 그자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세주아니의 표정이 풀리더니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뇨.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거예요, 우디르."

3. 2장

우디르의 머리 위로 노래나무가 보였다. 나뭇잎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디르는 붉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동안 자신이 붉은색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향에서는 언제나 흰 눈 위에 흩뿌려진 붉은색만 볼 수 있었다. 프렐요드의 붉은색은 폭력의 색이자 죽음의 색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붉은색은 생명의 색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인간과 동물의 몸 안에는 붉은색이 있었다.

우디르는 눈을 떴다.

명상을 하려고 켜 놓은 촛불이 붉게 빛났다. 비를 맞은 모닥불은 소리를 내며 점점 약해졌고, 바람은 밤을 넘기기 전 가죽 천막을 무너뜨리려는 듯이 세차게 불어댔다. 바닥에 깔아 놓은 가죽 장판 옆으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흘렀다. 우디르가 앉아 있는 곳은 아이오니아의 수도원이 아니었다. 여기는 세주아니의 야영지였다.

'내 고향은 여기다.' 우디르는 억지 자부심을 품으며 생각했다.

몇 주 만에 명상에 성공한 우디르였지만, 그 기쁨을 음미할 시간은 없었다. 천천히 정신을 차리려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디르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불협화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근처의 엘누크들, 드류바스크와 말들의 생각이 그의 의식을 잠식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우디르처럼 강력한 정령 주술사들에게 이 소리는 천둥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절대 잦아들지 않았다. 동물들의 소리가 사그라지면 사람의 감정이 들렸다. 사람 역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수많은 생각의 조각들로 우디르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분노, 공포, 비통, 냉정—

우디르는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만 아플 뿐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목소리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우디르는 은으로 만든 못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못을 쥐자 손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우디르는 못으로 손바닥을 쉬지 않고 찔렀다. 죽을 만큼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목소리만 사라진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4. 3장

세주아니는 어사인족을 불러내는 데 소모되는 물자를 헤아렸다. 거대한 모닥불에서 솟아오른 불꽃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세주아니의 전사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굶주린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불꽃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피로가 가득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마른 장작은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잊혀진 자들이 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모닥불의 장작은 죽음의 매듭을 본떠 겹쳐진 삼각형 형태를 하고 있었다. 차례로 쌓아 올린 장작들은 마치 불타오르는 탑을 연상시켰다. 모닥불 주위에는 어사인의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쇠말뚝이 박혀 있었고, 그 옆에는 마치 불쏘시개처럼 무기와 뼈가 쌓여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전사들은 '붉은 축복'을 통해 의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주아니가 곰의 정령을 모시는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은 커다란 나무 그릇을 들어 서약을 노래하는 자들 위로 곰의 피를 부었다. 붉은 액체가 몸을 타고 흘러내리자 서약을 노래하는 자들은 곰 발톱 토템을 움켜쥐며 나지막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나선 서약을 노래하는 자는 열 살짜리 소녀였다. 곰의 정령을 모시는 시종이 까마귀 깃털로 만든 숄을 소녀의 목에 두르자 소녀는 몸을 떨더니 모닥불 주위로 서 있는 전사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마치 바람이 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각기 다른 높이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약을 노래하는 자들이 내는 괴이한 장송곡은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화음을 맞추며 울려 퍼졌다. 세주아니는 끊임없는 굶주림처럼 뱃속을 파고드는 공포를 느꼈다.

"우디르를 데려와." 세주아니는 옆에 있던 피의 서약자 두 명에게 말했지만, 모닥불에 홀려버린 그들은 의식에서 눈을 떼지도 못한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술사를 찾아!" 세주아니가 소리쳤다.

세주아니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세주아니는 모닥불을 뒤로하고 브리슬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자신은 전투를 이끌 준비가 됐음을 부족민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세주아니는 커다란 드류바스크 위에 올라탔다. 거대한 멧돼지 같은 모습의 브리슬은 그녀보다 두 배나 컸고 장정 십여 명보다도 무거웠다. 브리슬의 콧소리에서 세주아니는 불안을 느꼈다. 주술사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브리슬은 세주아니의 불안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브리슬의 발아래 얼음이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어사인족을 부르면서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자뿐만이 아니었다.

모닥불에서 튄 불똥이 하늘로 날렸다. 불똥은 티끌만 한 불빛을 내며 공중에서 춤을 췄다. 흩날리는 불똥 뒤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번개가 치자 짙게 드리운 먹구름이 번쩍였다.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 세주아니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첫 번째 벼락이 큰 소리를 내며 쇠말뚝 위로 떨어졌다. 세주아니는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브리슬의 검고 뻣뻣한 털을 쓰다듬었다. 말이나 다른 작은 동물이었다면 달래 주었겠지만, 세주아니는 대신 이렇게 속삭였다. "나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제 모든 건 주술사에게 달렸어."

5. 4장

아침은 오지 않았다.

시커멓게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우디르는 추위에 몸서리쳤다. 전날 내린 비는 간밤에 얼어붙어 있었고, 추위에 바지가 굳어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우디르는 정신이 혼미했다. 너무 많은 동물, 너무 많은 사람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우디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세주아니는 숲 끝자락 강가에 전사들을 쌍각 대형으로 배치했다. 전열의 전사들 뒤로 보이는 언덕에 야영지와 온기가 필요한 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 모두 무기를 뽑아 든 채 어사인족이 오기를 기다렸다. 경험 많은 전사들은 방패를 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군임을 확인하기 전에는 무기를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게 프렐요드의 방식이었다.

순간 겨울 발톱 부족의 갑옷, 검, 도끼에서 전기 불꽃이 일어나더니 각자의 무기 사이로 호를 그리며 뻗어갔다. 전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이 신기한 광경을 바라봤다. 우디르는 그들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부대의 선두에 있던 세주아니는 망토를 화려하게 벗어 던졌다. 부족민들에게 자신이 전쟁의 어머니이자 냉기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려는 목적이었다. 세주아니의 핏속에는 얼음 마법이 흘렀고, 전투만이 그녀에게 필요한 유일한 온기였다. 전사들은 환호했다.

우디르는 세주아니를 따라 숲의 끝자락으로 이동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입에서 송곳니가 솟아났다. 송곳니는 뒤로 휘어지며 우디르의 몸집만큼이나 커졌다. 피부에서는 털이 솟아나더니 곧 그의 몸을 파도처럼 뒤덮었다. 우디르는 으르렁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입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떴다.

"왔군."

숲속에 정적이 감돌았다.

검은 숲의 나무 사이로 첫 어사인족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로 물든 피부는 갈색빛을 띠고 있었으며 오물이 묻은 머리카락은 머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들은 야만인이었다. 일부는 곰 가죽이나 넝마를 걸치고 있었지만, 몇몇은 그마저도 없이 발가벗고 있었다.

다음으로 야수들이 나타났다. 대부분 곰이었는데, 크기나 털의 색깔이 각양각색이었다. 우디르가 아는 종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형태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곰의 몸에 영원히 갇혀버린 정령 주술사들이었다.

그리고 괴물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곰과 다른 생명체가 기이하게 뒤섞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전설이나 꿈, 아니면 신화에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이들 역시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야생의 정수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그 정도가 심한 나머지 평범한 동물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중에서 몸집이 가장 큰 괴물은 곰과 비슷했다. 검은 깃털로 뒤덮인 갈기 위에는 머리 대신에 썩어버린 엘크의 두개골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푸른색 눈을 빛내며 입을 벌리자 어두운 기운과 함께 소름끼치는 형체가 보였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악몽 같은 존재들이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어사인족은 세주아니의 군대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한데 모여 있었지만, 진형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공격 태세를 갖추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거칠었던 우디르의 숨소리가 점차 느려졌다. 더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진 않았지만, 최면에 걸린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양손에서 느껴지던 고통은 사라진 상태였다. 우디르는 벌판 건너편에서 낯익은 영혼들을 보았다. 한때는 수행자였거나 스승 혹은 서약을 노래하는 자였던 이들이었다. 술을 마시며 친해졌던 주술사들이자 전투에서 만났던 전사들이었다. 예전 의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몇몇은 자신의 영혼을 깎아 무자비한 곰의 정령으로 탈바꿈했고, 광기에 가까운 자신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때 나무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까마귀 깃털로 장식된 커다란 두건과 곰 가죽으로 만든 망토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쫓기는 자'였다.

"볼리베어 님의 뜻을 전하러 왔다." 남자가 말했다.

우디르는 몇 년 전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나자크라는 이름의 소년은 정식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위대한 정령 주술사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디르의 첫 번째 제자였던 그가 지금은 어사인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다. 우디르는 남자를 둘러싼 마법에 집중하면서 나자크의 정신에 귀를 기울였지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때의 그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네 스승으로서 실패했구나.' 우디르는 속으로 생각하다가 나자크가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신은 겁쟁이었다." 쫓기는 자가 우디르의 생각을 읽고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타고난 정령 주술사의 재능을 억누르면서 그 진정한 힘을 부정했지." 얼어붙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귀신이 내는 소리 같았다. "겨울 발톱 부족이여, 왜 우리를 불렀지?"

"어사인족의 힘을 빌리고 싶소." 세주아니가 대답했다. "쫓기는 자여, 우리와 함께 싸워 주시오."

나자크는 고개를 세주아니 쪽으로 돌렸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용없다. 나는 단지 볼리베어 님의 목소리일 뿐이다."

"볼리베어의 대리인으로서 당신이 약속하면—"

"나는 볼리베어 님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 없다. 나는 단지 그분의 수하일 뿐이다." 쫓기는 자는 세주아니의 말을 가로채더니 그녀를 뚫어질 듯 노려봤다. "주군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볼리베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디르는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우디르를 끝없이 괴롭히던 인간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심지어 바로 옆에 서 있던 세주아니 특유의 참을성 없는 목소리마저 점점 작아졌다. 볼리베어가 와 있었다.

나자크 뒤로 늘어선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니 매머드보다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터질듯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몸통에는 사람보다 커다란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전투를 함께하고 망가져 버린 고대의 판금 갑옷은 말라붙은 피 때문에 갈색빛을 띠고 있었고 등과 어깨에 박혀 있는 무기들은 녹이 슨 채 부러져 있었다. 얼굴은 엉망이 되었으며 입에서는 시커먼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네 개의 눈은 세주아니와 우디르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곰 정령의 화신이 가까이 다가오자, 우디르의 머릿속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졌다. 덕분에 우디르는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떤 소리도, 어떤 감정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우디르 자신의 생각조차 희미해졌다. 그는 오직 볼리베어만 느낄 수 있었다. 볼리베어가 가져온 정적은 어떤 인간이나 동물과도 달랐다. 볼리베어가 지닌 순수한 의식은 다른 모든 것들을 짓눌렀다.

6. 5장

세주아니의 부대는 어사인족보다 백 배는 숫자가 많았지만,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볼리베어를 보고 뒷걸음질 쳤다. 거대한 전쟁 매머드와 인간, 트롤, 바스타야를 상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전사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세주아니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곰 정령의 화신이 자신의 부름에 직접 응답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잊혀진 자들보다는 그들의 족장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볼리베어가 천천히 다가오자 세주아니는 브리슬의 안장에 앉은 채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얼굴에선 공포가 아닌 패기가 느껴졌다.

7. 6장

우디르는 정적에 맞서면서 말을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야기에 따르면 볼리베어 역시 과거에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위대한 정령 주술사였지만, 곰의 정령에 굴복한 후 몸과 영혼이 완전히 잠식당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괴물은 과거에 인간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볼리베어가 세주아니 앞에 서자 등 뒤로 번개가 내리쳤다.

볼리베어의 궁금증이 우디르의 정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우디르를 압도했다. 마치 볼리베어가 내뱉는 말이 우디르의 몸을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전쟁의 아이여, 왜 우리를 불렀는가?"

8. 7장

볼리베어의 목소리는 그곳에 있던 모든 어사인족과 정령 주술사들의 입을 통해 울려 퍼졌다.

세주아니는 쫓기는 자의 눈이 뒤집히더니 새카맣게 변하면서 고개가 뒤로 꺾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깡마른 그의 몸에서 눈사태와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목구멍 안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우디르 역시 볼리베어가 한 말을 작게 속삭였다. 세주아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주아니는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양쪽 병사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남부 부족들의 농장을 불태우고 아이들을 사냥할 겁니다. 그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집을 허물겠습니다. 다시는 우리에게 맞서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세주아니는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이 내리는 땅은 모조리 우리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내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이며 '우리' 부족은 영원히 프렐요드를 지배할 겁니다."

세주아니가 말을 마치자 정적이 감돌았다. 우디르의 망토가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힘이 필요한가?" 볼리베어가 말했다.

9. 8장

우디르는 온 정신을 집중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은으로 만든 못을 꺼냈다. 못의 냉기가 팔을 얼얼하게 했다. 세주아니가 계약을 맺기 전에 말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인간의 언어를 입 밖으로 낼 수만 있다면... 아직 시간이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세주아니가 대답했다. 우디르는 온 힘을 다해 세주아니와 볼리베어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우디르는 못으로 손바닥을 찔렀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통은 물론이고 금속의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디르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볼리베어의 의식에 사로잡힌 우디르는 무릎을 꿇었다.

"누구를 제물로 바칠 테냐?" 우디르와 쫓기는 자가 볼리베어의 목소리로 말했다.

우디르는 눈을 감고 붉은 낙엽이 날리던 아이오니아의 언덕을 떠올렸다. 명상을 익히고 힘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던 그때의 기억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곳은 고향이라 부를 수 없는 땅이자, 다시는 보지 못할 땅이었다. 그리고 프렐요드로 돌아와 어린 세주아니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우디르는 세주아니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전쟁의 어머니로 거듭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우디르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뱉었다. "곰의 정령이여, 세주아니는 아무것도 바치지 않는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전쟁과 죽음뿐이다."

분노한 볼리베어가 포효하자 우디르는 그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주아니 쪽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볼리베어가 마법에서 깨어났다.

10. 9장

세주아니는 혼자서 얼음용을 사냥했다. 과거 십여 회에 달하는 전투를 치르기에 앞서 항상 머리카락을 죽음의 매듭 형태로 묶으며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다고 맹세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한 어둠 속에 뛰어들어 트롤들과 싸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볼리베어가 마법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괴물을 보며 세주아니는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볼리베어의 털은 전부 곤두서 있었고, 살갗 아래에서는 번갯불이 번쩍였다. 흉터 자국에서는 빛이 났으며 입에서는 벼락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극심한 공포를 느낀 세주아니는 하마터면 자신의 부족 전체를 어사인족에게 제물로 바칠 뻔했다.

이것이야말로 볼리베어의 진정한 힘이었다.

하지만 우디르는 이 압도적인 힘에 맞서고 있었다. 세주아니는 그런 그를 경외하며 바라보았다.

"위대한 곰의 정령이여. 우리의 전쟁이 두려운가?" 우디르가 볼리베어를 향해 소리쳤다.

볼리베어가 다시 포효했다. 그리고는 곰의 모습이 아닌 점점 알 수 없는 형체로 변해갔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과 근육, 털가죽은 셀 수 없이 많은 번개 줄기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볼리베어가 공격을 준비하자 세주아니는 우디르 앞으로 달려나갔다.

"폭풍과 자연의 반신이여. 우리와 함께 싸울 텐가? 아니면 우리의 전쟁이 두려운가?" 우디르가 계속 소리쳤다.

한참 뒤 볼리베어가 대답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11. 10장

우디르는 도시의 허물어진 관문 아래로 걸어갔다. 이제 이 강가 도시에 밤의 추위로부터 몸을 녹일 화롯불은 없었다.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까만 골격만이 남아 있었고, 돌무더기 위에는 불타버린 대들보와 돌로 만든 굴뚝만이 우뚝 서 있었다.

우디르는 그을음으로 뒤덮인 바닥에 잿빛 발자국을 남기며 도시 중심부로 이동했다. 사방을 둘러싼 시커먼 연기 사이로 도시의 거리와 석조 건물의 잔해가 희미하게 비쳤다. 연기가 잠깐 걷힐 때면 십여 명의 겨울 발톱 부족 전사가 보였다. 그들은 불타는 방어 탑을 빙 둘러싼 채 생존자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살기 위해 밖으로 기어 나오는 도시 경비병들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사인족 전사 한 명이 상점 주인을 무참히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짐승 같은 얼굴을 돌려 우디르를 바라봤다. 털가죽이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어사인족 전사는 고함을 지르며 계속 도끼를 휘둘렀다. 옆에선 겨울 발톱 전사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경비병을 끝장냈다.

이들은 우디르가 처음으로 본 생존자들이었다. 먼저 도시의 방어선을 붕괴한 쪽은 어사인족이었다. 세주아니의 부대는 뒤이어 진입했지만, 잔혹하기로는 어사인족에 뒤지지 않았다. 우디르는 지금도 잔혹하고 무자비한 곰의 정령이 주변 모든 생명체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사인족의 힘이 세지고 있었다.

우디르는 폐허가 된 광장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괴물을 보았다. 도시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볼리베어 주위로 시체들이 즐비했다. 시체에서 검은 가지와 뿌리가 자라나 마치 지렁이처럼 볼리베어를 향해 뻗어갔다. 그러자 볼리베어의 얼굴에서 새 살과 털이 돋아났고, 몸의 근육은 더 두꺼워졌다.

볼리베어는 시선을 돌려 다가오는 우디르를 바라봤다. 볼리베어의 얼굴에는 십여 개의 새로운 눈이 생겨나 있었다. 그 눈들은 마치 거미의 그것처럼 어둡고 차가웠다. 겨울 발톱 부족의 주술사에게서 낯선 마법의 냄새를 맡아서인지 몰라도, 볼리베어는 우디르를 찬찬히 살피더니 말했다. 우디르는 볼리베어가 자신만 들을 수 있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자식이여."

우디르는 망토를 벗고 저녁 명상 때마다 연습했던 자세들을 차례로 취했다. 불사의 독수리 태세, 영리한 살쾡이 태세, 강철의 멧돼지 태세 외에도 십여 가지 야수 정령의 힘을 끌어냈다. 곰의 형태를 취하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지만, 곧 자신 앞에 서 있는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디르는 곰의 숙적이자 불과 난로, 대장간의 정령인 거대한 숫양 태세를 취했다.

우디르는 볼리베어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우디르의 머릿속은 조용했다. 그것이 좋지 않은 징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주아니가 그랬듯이, 우디르 역시 볼리베어에게 잠식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우디르는 마치 아버지처럼 세주아니를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맹세를 지킬 생각이었다.

"세주아니는 넘겨줄 수 없다." 우디르가 내뱉듯 말했다.

볼리베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소름 끼치는 회복 의식을 계속했다.


[1] 세주아니의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