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22><colcolor=#fff> 장프랑수아 드 갈로 라페루즈 백작 Jean-François de Galaup, comte de La Pérouse | |
출생 | 1741년 8월 23일 |
프랑스 왕국 알비 | |
사망 | 1788년 (향년 46~47세) |
솔로몬 제도 바니코로섬 인근 해안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군인, 탐험가 |
군 복무 기간 | 1756년 ~ 1788년 |
계급 | 해군 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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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인, 탐험가.2. 생애
알비에서 귀족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고 1756년 해군 장교로 입대해 7년 전쟁당시 벨일 해전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4년 뒤 포로 협정으로 석방되었다. 1764년 중위로 진급해 10년간 프랑스에서 복무하다가 인도에서 2년간 복무했다.이후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해 허드슨 만의 영국 해군기지를 공격해 큰 공을 세우고 대령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카리브해에서도 영국군과 전투를 치렀다.
1785년에 루이 16세의 명을 받고 배 2척 선원 220명, 당대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 태평양 탐험에 나섰다. 대서양을 건너 칠레 해협을 돌아서 하와이, 알래스카, 필리핀을 거쳐 1787년 5월에 제주도와 울릉도 근방을 지나갔다. 이 과정에서 울릉도에는 '다즐레'(Dagelet)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 후 사할린과 아시아 본토 사이의 타타르 해협을 지나가려다가 실패하고[1] 대신 남쪽 해협을 지나갔는데 그 해협이 바로 이 라페루즈 해협이다. 그밖에도 사할린 크릴론 곶, 인근의 모네론 섬 등 이 일대 다양한 지역을 명명하였다.
하지만 이 해협을 통과한 후 9월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서 잠시 쉬었다가 오세아니아로 향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솔로몬 제도인근을 지나가다가 좌초되어 행방불명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에선 구조대를 파견하려 했으나 번번히 취소되었다.
배의 잔해는 1826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한때 생존설이 나왔으나 섬에 가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사망처리되었다.
3. 여담
-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족의 신분으로, 인도 식민지에 근무하던 프랑스인 하급 관리의 딸과 결혼했으며 직계 자손은 없다.
- 이 항해의 유일한 생존자인 바르텔레미 드 레셉스는 해군장교인 그는 라페루즈 탐험대장의 비서 겸 통역으로 탐험에 참가했다. 그는 함대가 캄차카 반도의 아바차에 기항했을 때, 그때까지 작성된 항해 일지, 지도, 학술 보고서 등 문서를 시베리아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육로로 프랑스 파리까지 가지고 왔다. 레셉스는, 1870년대에 수에즈 운하의 대역사를 완성하여 세계 지도를 바꾼 페르디낭 마리 레셉스의 삼촌이기도 하다.
- 이 인물이 지나쳐간 곳 중 하나인 울릉도에는 리조트 라페루즈가 존재한다.
[1] 이 해협은 매우 좁고 얕아서 겨울에는 얼어붙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