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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5:56:17

장아이링

파일:장애령.jpg
예명장아이링(張愛玲, Zhāng Àilíng)[1]
본명장잉(張煐)
국적중화민국[2]미국
민족한족
출생1920년 9월 30일[3]
상하이시 징안구(静安區)
사망1995년 9월 8일(향년 75세)
로스앤젤레스
학력황씨소학(黄氏小學)
성 마리아 여학교
홍콩대학 문과
배우자후란청(胡蘭成), 라야(Laya)

1. 개요2. 생애3. 저작4. 기타

1. 개요

중화민국, 미국의 소설가, 산문가, 영화 작가.

본관은 허베이성 펑룬구(豐潤區)이나 출생지는 상하이시 징안구이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중국에서 활발히 창작 활동을 하다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 소설을 썼고, 1969년부터는 은거하여 중국 고전작품을 연구하며 지내다 1995년 만 7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집필을 활발히 했던 1940년대엔 땐 그저 그런 통속소설가 1 취급을 받았지만 1960년대부터 문학평론가 겸 교수인 샤즈칭(夏志清)[4]으로부터 '루쉰과 동급'이라며 크게 호평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중국 대표 문인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2. 생애

청나라 관료의 후예이자 수구파였던 장즈이(張志沂, Zhāng Zhìyí)와 유학 경험자인 신여성 황이판(黄逸梵, Huáng Yìfán)의 사이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 1살 아래 남동생인 장쯔징(張子静, Zhāng Zǐjìng)은 중화민국 시절에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상하이로 이주하여 중학교 교사로 전직했으며 1997년 사망했다. 친할머니인 리쥐어우(李菊藕, Lǐ Jú'ǒu)는 이홍장의 딸이었다.

1923년 아버지를 따라 톈진로 이사를 갔고, 이듬해인 1924년,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고모와 함께 자기와 남동생을 두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유학을 가 버렸다. 남매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고, 이때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쾌락촌(快樂村)》을 냈다. 당시 7세. 1928년 아버지의 사직으로 장씨 가족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삼국지연의와 서유기, 칠협오의를 접했다.

1930년 어머니와 고모가 돌아오고, 장잉은 10살에 어머니의 고집으로 미국 교회 산하인 황씨소학에 6학년으로 편입했는데 이때 영어 이름 아일린(Eileen)을 본떠 장아이링으로 개명한다. 같은 해 부모는 이혼하여 아버지와 살게 되었고, 이듬해 상하이의 성 마리아 여학교에 입학해 1년 후인 1932년에 그 곳에서 첫 단편소설 《불행한 그녀(不幸的她)》를 교지[5]에 실었다. 이 작품은 《국광(國光)》 등 교외 잡지에도 실린다. 1933년엔 산문 《늦깎이(迟暮)》를 발표하는 등, 1937년 졸업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투고했다.

하지만 계모의 사소한 오해로 친부에게 심한 학대를 받아 1938년 친모에게로 도망쳤고, 같은 해에 런던대학교 국제프로그램 입학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런던대학 입학을 포기해야 했고, 1939년 홍콩대학 문과에 입학해 첫 번째 작품 《천재몽(天才夢)》을 출간했지만, 1942년 진주만 공습으로 홍콩대학마저 휴교를 하여 상하이로 돌아가 세인트존스 대학교에 지원했지만 국어 점수가 낮다고 불합격하여 학업을 중단했다. 대신, 타임(주간지) 등 영문 잡지에 기고를 하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을 준비를 한다.

1943년 5월 《자몽란(紫羅蘭)》이라는 월간지에 《첫 번째 향로(沉香屑·第一炉香)》를 발표하여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두 번째 향로(沉香屑·第二炉香)》, 《재스민 차(茉莉香片)》, 《결국은 상하이 사람이다(到底是上海人)》, 《심경(心經)》, 《경성의 사랑(傾城之戀)》, 《금쇄기(金鎖記)》등을 발표했다.

1944년 《봉쇄(封鎖)》를 투고한 걸 계기로 친일 장교인 후란청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후란청은 3개월 만에 불륜을 저질렀고, 계속 그를 찾아 헤매다 지친 장아이링은 결국 1946년 그와 연을 끊었다. 이때 《꽃이 지고(花凋)》, 《홍예희(鴻鸞禧)》, 《붉은 장미와 흰 장미(紅玫瑰与白玫瑰)》를 썼으며 소설집 《전기(傳奇)》와 산문집《유언(流言)》을 출간했다. 1947년 영화 『아줌마 만세(太太萬歲)』와 『못 다 이룬 사랑(不了情)』의 각본을 썼다. 1951년 량징(梁京)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십팔춘(十八春)》을 연달아 발표한다.

1952년 7월에 홍콩 미국신문처(美國新聞處)에서 번역 일을 맡았고, 노인과 바다 등을 번역했다. 이때부터 다른 사람과 거의 만나지 않았다. 1955년 미국으로 간 장아이링은 이듬해 뉴잉글랜드에서 65세의 라야라는 독일 출신 작가를 만나 재혼했으나, 2년 후 그와 사별했다. 1967년 뉴욕 래드클리프 여학원에 머무르며 《해상화열전(海上花列傳)》[6]영어로 번역했다. 1969년 대만에서 구작 《십팔춘》을 《반생연(半生緣)》으로 고쳐 출간했고,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 중국연구센터에 들어가 2년 일하고 나왔다.

197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본격적으로 은거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색, 계(色,戒)》[7], 《망연기(惘然記)》, 《대조기(對照記)》 등의 명작을 남기고 홍학[8]에도 전념하다 1995년 9월 1일경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9월 1일경이라고 쓴 것은 그가 사망할 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 정확한 사망일을 알기 어려웠고, 시신을 부검한 의료진이 그날 죽었을 거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시신은 9월 8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견되었으며, 부검이 끝난 뒤 화장되어 9월 30일 태평양에 뿌려졌다.

3. 저작

- 소설
- 영화 각본

- 학술논문

4. 기타

상하이시 징안구(静安區)에는 장아이링이 1942년부터 고모와 같이 살았던 생가인 창더(常德) 아파트가 있다. 1936년 건축된 이 아파트는 당시엔 에딩턴(爱丁顿, Eddington) 아파트라고 불렸으며, 여기서 장아이링이 많은 작품을 썼다고 한다.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권 국가들에서 스파이를 뽑을 때 이 인물의 사진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1] 영어 이름인 아일린 창(Eileen Chang)을 음차한 것이다.[2] 이전에 대만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대만(중화민국)에서 산 적이 없다.[3] 그의 대만 여권, 미국 시민권, 혼인증, 사망진단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4] 1921~2013. 예일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딴 이후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받아 1961년 《중국현대소설사》를 집필했다.[5] 봉조(鳳藻) 12호[6] 1894년 청나라 말엽에 한방경(韓邦慶)이 오어로 쓴 소설. 1999년 허우샤오셴영화화했다.[7] 1979년 중국의 시사지 《인간(人间)》에 발표한다.[8]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