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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2:51:51

장성호(유도)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장성호
蔣盛皓 | Jang Sungho
파일:유도인 장성호.jpg
출생 1978년 1월 12일 ([age(1978-01-12)]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마천초등학교 (졸업)
오주중학교 (졸업)
보성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학사)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1])
용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박사[2])
종목 유도
체급 -100kg
신체 192cm, 103kg
종교 개신교(장로교)[3]
가족 배우자 김성윤, 아들 장예준, 딸 장예은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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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유도 선수이며, 현재는 용인대학교 유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 선수 경력

2.1. 1998년~2001년

한양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8년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전기영을 허리후리기 한판승으로 이기며 등장했고, 1999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여 결승전에서 일본의 이노우에 코세이한테 패하며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알제리 선수한테 한판패를 당하며 탈락하였다. 2001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2. 2002년~2008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4] 참고로 당시 대회에 참가한 모든 선수단 중에서 발 사이즈가 가장 컸다. 국내대회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어 국가대표의 자리를 유지했으나, 국내대회의 화려한 수상 기록과는 달리, 국제대회에서는 모두 은메달에 만족해야 하여 "2인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렇지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2번 만나 2번 모두 졌던 일본의 이시이 사토시를 상대로 통쾌한 한판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4년 2월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은 그는 올림픽을 앞두고 당한 부상을 숨기고 시합에 임했으나 8강에서 몽골의 나이단 투브신바야르에게 패배했고 패자전에서도 조지아 선수에게 효과 하나 차로 패배해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올림픽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하였다.

3. 은퇴 이후

2010년 2월 용인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용인대학교 유도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우리동네 예체능 유도 해설위원, SBS 유도 해설위원[5] 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재미있게도 본인 이후 17년만에 한국 선수 중 최초로 -100kg급 결승에 진출한 후배 조구함의 경기를 중계하기도 했다. 경기 전 조구함이 자신이 따지 못한 금메달을 따주기 바란다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비록 아쉽게도 연장전 끝 한판 패를 당하게 되자 "잘 버텨줘서 고맙다. 너무 고생 많았다”며 마찬가지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4. 수상 기록

올림픽
은메달 2004 아테네 -100kg
세계선수권
은메달 1999 버밍엄 -100kg
동메달 2001 뮌헨 -100kg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6 도하 -100kg
은메달 2002 부산 -100kg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9 웬저우 -100kg
금메달 2005 타슈켄트 -100kg
은메달 2003 제주 -100kg
은메달 2004 알마티 -100kg
은메달 2008 제주 -100kg
동메달 1999 웬저우 오픈
동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1 오사카 -100kg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2001 베이징 무제한급
은메달 2001 베이징 -100kg


[1] 석사 학위 논문은 유도선수의 훈련목표 설정수준과 신체적 자기효능감과의 관계다.[2] 박사 학위 논문은 국가대표 유도선수의 경기력 향상을 위한 심리기술훈련 프로그램 개발 및 효과 검증이다.[3] 소망교회에 다닌다.[4] 장성호 이후 17년 동안 조구함2020 도쿄 올림픽 유도 -100kg급 금메달 결정전 진출에 성공하기까지 한국 선수가 유도 -100kg급 금메달 결정전에 진출한 적이 없었다.[5] 원래는 이원희가 해설위원을 하기로 했었지만, 개막 직전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대타로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