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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08:34:26

장 드 푸아

성명 장 드 푸아
Jean de Foix
생몰년도 1410년 ~ 1485년
출생지 가스코뉴 공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카스텔노드메독
아버지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
어머니 마르그리트 달브레
누이 이자보, 아녜스
아내 마가렛 커데스톤
자녀 가스통, 장, 카트린, 마르그리트
직위 켄달 백작, 루시용 총독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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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된 가스코뉴 공국의 귀족, 군인.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왕국에 충성을 바치면서 프랑스 왕국에 항전했지만, 카스티용 전투에서 패배한 뒤 7년간 구금되었다가 잉글랜드로 넘어갔지만, 거기서도 장미 전쟁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

2. 생애

1410년경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이자 카스티용 자작, 그레일리의 영주를 맡고 있던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와 알브레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이자보[1], 아녜스[2]가 있었다. 1445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보르도 시의 방어를 강화하고 가스코뉴 영토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51년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휩쓸었을 때 일시적으로 복종했지만, 1452년 10월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에 상륙하자 즉각 호응해, 가스코뉴 서부 대부분이 잉글랜드 쪽으로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 참가했다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타유부르 성에 이송되었고, 기옌의 세네샬인 올리비에 드 코에티비의 포로가 되었다. 1460년 1월 18일, 장은 23,850 에쿠스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석방된 뒤 잉글랜드로 갔다. 이후 잉글랜드 왕실에 의해 켄달 백작에 선임되었지만,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조를 추종했다가 체포된 뒤 런던 탑에 구금되었다가 워릭 백작인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구금에 맡겨져 프랑스로 돌아갔다.

1461년 7월 샤를 7세가 사망하고 루이 11세가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되었다. 이때 그는 여전히 올리비에에게 18,000에쿠스의 빚을 지고 있었지만, 루이 11세는 올리비에에게 이 빚을 탕감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루이 11세의 봉신이 되었으며, 1463년 6월 14일 루이 11세에게 갓 복속된 루시용의 초대 총독에 선임되었다. 1485년경 카스텔노드메독에서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로도 18세기까지 켄달 백작위를 이어갔다.

3. 가족



[1] 튀렌 자작 르노 6세 드 폰스와 초혼, 산티스테반 백작 피에르 드 페랄타와 재혼.[2] 페이 포통 드 라멘산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