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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18:44:38

임효



任囂
? ~ 기원전 208년 추정[1]

1. 개요

진나라(영성) 말의 관료. 임오로도 불린다.

진나라에서 남해군위를 지냈으며, 남월을 건국한 조타(남월)의 상관이었다.

2. 생애

그가 통치한 남해군은 계림군, 상군과 함께 기원전 214년 진나라가 백월을 점령하고 설치한 군현들 중 하나였다.

진시황이 사망하고 이세황제가 즉위 후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임효는 중원의 도적들이 이곳까지 쳐들어올까 염려해 중원과 통하는 길을 끊어버렸다.[2] 그러나 병이 심해진 임효는 용천현령 조타를 불러 그를 후임 남해군위로 인정하고 사망했다.

3. 기록

위타는 진나라 때 남해군 관하 용천(龍川)의 현령(縣令)이었다. 이윽고 진시황이 죽고 이세황제가 뒤를 이었을 때 남해의 위(尉) 임효(任囂)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용천현령 조타를 불러 말했다.
「내가 들으니 진승 등이 난을 일으켰으나 무도한 진나라로 인하여 천하가 고통을 당하자 항우(項羽), 유방(劉邦),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등이 주군(州郡)의 백성들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다투고 있다고 하오.
이에 중원은 혼란에 빠져 언제 안정될지 알 수 없고 호걸들은 진나라를 배반하여 서로 자립하여 왕을 칭하고 있소. 이곳 남해는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도적들이 이곳까지 쳐들어 올까 나는 걱정하고 있소. 내가 군사를 내어 중원과 통하는 길을 끊어 제후들의 변란에 스스로 대비하려고 했으나 불운하게도 내 병이 심하게 되었소.
이곳 번우[3]는 험준한 산을 등지고 남해의 바다로 막혀 있으며 동서로 수천 리나 뻗쳐있을 뿐만 아니라 중원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있어 한 주의 중심지로 나라를 세울 수 있소. 군내의 높은 직위의 관리들 중에 함께 의논할만한 사람이 없기에 공을 불러 이 말을 하게 되었소.」
임효는 즉시 조타를 남해군의 위에 임명하는 문서를 만들어 그로 하여금 군의 직무를 맡아보게 했다. 이윽고 임효가 죽자 조타는 횡포(橫浦)、양산(陽山)、황계관(湟谿關)에 격문을 돌려 말했다.
「중원의 도적떼들이 쳐들어오려고 한다. 서둘러 길을 끊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는 서서히 법령을 이용하여 진나라가 임명한 군내의 높은 관리들을 죽이고 자기 사람을 대리하게 했다. 이윽고 진나라가 파멸하자 조타는 이웃하는 계림(桂林)과 상(象) 두 군을 병합하고 스스로 남월왕에 올라 무왕(武王)이라고 호칭했다.
사기 권53 남월열전 중

[1] 기원전 209년에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208년 사망한 진승, 오광이 할거하고 있는 것으로 발언한 점을 보아 기원전 208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 회계군수 은통처럼 자립을 시도하려던게 아닌가 추정된다.[3] 오늘날 광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