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명의 수상 내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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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임정명(林正明) |
생년월일 | 1958년 3월 3일 ([age(1958-03-03)]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188cm, 88kg |
학력 | 신일고등학교 (졸업[1])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 학사[2])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전공 / 석사[3]) |
병역 | 전시근로역[4] |
가족 | 부인 백은희, 아들 임우찬, 딸 임현지 |
포지션 | 센터 |
선수 | 삼성전자 (1980~1988) |
지도자 | 고려대학교 코치 (1988~1990/1991~1997) 삼성전자 농구단 코치 (1990~1991) 고려대학교 감독 (1997~2000) 서울 삼성 썬더스 수석코치 (2003~2004) 고려대학교 감독 (2008~2009) |
행정 |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 겸임교수 (2004) 한국대학농구연맹 부회장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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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 현역 시절 별명은 '불새' 혹은 '악바리'였다.2. 선수 시절
1958년에 태어나 신일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발군의 활약을 펼쳐 1977년 전체랭킹 1위로[5]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한 뒤, 대학생활 내내 농구부에서 박한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이충희, 이장수[6], 황유하, 이민현, 진효준, 정태균, 정해일 등과 함께 뛰며 49연승 쌓기에 기여했고, 1979년 삼성전자 농구단에 입단하여 센터로 활약하여 신동찬과 안준호, 박인규, 후배인 김현준, 김진과 함께 뛰며 1984/85 및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각각 두 번 트로피를 들었으며, 특히 고려대 77학번 동기였던 현대전자의 이충희와는 라이벌 관계였다. 현역 시절 포스트의 핵으로서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일어서는 악바리 정신으로 끈질기게 최선을 다했다.이 당시 고려대 2년 후배이자 코트의 신사(팬들은 신사라는 요소 중 하나인 스님으로도 부르기도 한다)라는 별명이 붙었던 슈팅 가드 김진과 절친했는데 김진이 선배 임정명에게 예의를 깍듯이 지키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03-04 시즌 김진 감독이 대구 동양 오리온스 감독 시절 삼성 썬더스 수석코치가 되었던 선배인 임정명 감독에게 인사드리는 장면이 KBS 중계에 나오기도 했다.
3. 지도자 시절
3.1. 코치 시절
3.1.1. 고려대학교 코치-감독 1기 시절
1988년 선수 은퇴 후 스승 박한 감독의 부름을 받아 고려대 농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1990년엔 삼성전자 코치로 잠깐 몸담았다가 이듬해 고려대 농구부로 돌아왔다. 90년대 농구대잔치의 주역이었던 이민형과 전희철, 현주엽, 김병철, 양희승, 신기성, 박재헌, 주희정 등 고려대 농구부 출신의 선수들이 다 그의 손을 거쳐갔다. 1994 고려대학고 농구부는 거의 역대급이었는데 박한 감독의 뒤를 잘 받쳤던 오른팔인 반면, 체벌을 안 하는 박한 감독과 달리 우렁찬 고함과 스파르타식 맹훈련으로 선수들을 가르쳤다.[7]1994 대학농구 우승멤버 중 현주엽은 오히려 임정명의 스타일에 가장 맞았다. 향후 방송해설위원 시절 존경을 표시했다.
1997년 박한 감독이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하자 감독직을 물려받았고, 1998년경부터 이민현과 최철권 코치 등의 보조를 받으며 임기 내내 이규섭과 이정래를 지도했으나, 농구전문 블로거 뚱이의 견해를 토대로 하면 감독 시절 성적은 그럭저럭이지만 평판은 안 좋았다고 한다. 스카우트전에서 정훈-방성윤-김동우 3인방과 김주성, 송영진 등을 성균관대와 중앙대 등 타 대학에 뺏기는가 하면 포워드를 중복투자해 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8] 체벌까지 동원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일삼아 학부모들의 원성을 샀다. 같은 시기 다시 강자로 떠오른 김주성의 중앙대 때문에 침체기를 거듭한 데다 라이벌 연세대에 대한 대응도 늦어져 해임설이 무성했고, 2000년에 모교 선배인 정광석 전 현대전자 감독에게 감독직을 승계하고 몇달 후 미국으로 농구연수를 떠났다.
3.1.2. 서울 삼성 썬더스 수석코치 시절
2002년에 미국 농구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2003-2004 시즌을 앞두고 안준호 수석코치의 후임으로 대선배인 김동광 감독의 부름을 받고 수석코치를 맡게 된다.이적해 온 정인교를 포함해서 삼성의 레전드로 00-01 KBL 통합우승의 주역이었던 주희정과 이규섭 등을 지도했지만 우승 실패의 책임론으로 인해 김동광 감독과 함께 1년만에 사퇴하게 된다.
김동광 감독은 00-01 삼성 썬더스의 유일한 KBL 통합우승을 이끌었으나 다음해 6강 플레이오프 탈락과 함께 2년 연속 5위로 추락하며 98-99 시즌 이후 6년만에 쓸쓸하게 물러나게 되었다.
3.1.3. 고려대학교 감독 2기 시절
2003년에는 이충희 대신 모교 감독이 되려다 무산됐고, 2004년에 체육교육학 박사과정을 이수한 후 겸임교수를 맡다가 2008년에 전임 진효준 감독이 스카우트 금품수수 혐의로 물러나자 8년만에 지휘봉을 잡았다.선임 당시 농구 전문가들 사이에서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 등으로 인해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있지만, 미국 유학과 프로팀 코치 경험, 나이에 따른 성숙미 등으로 인해 다르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이민형과 이정래 코치의 보조를 받으며 김태홍과 유성호 등을 배출했다.
취임 첫 해에 제1차 대학농구연맹전과 전국종별선수권대회 우승, 연고전 승리 등으로 선전하는 듯했으나 2009년 들어 학부모들이 일부 선수 특혜시비와 모 선수 퇴단조치, 강압적인 훈련에 따른 폭언, 구타, 각서 파동, 발전기금 강요 등의 내용을 담은[9] 탄원서를 체육위원회로 제출했고, 평소 자신이 선수 시절 무릎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는데도 제자들에게 육상트랙에서 뛰게 하고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 역시 학부모들의 원성을 사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동년 6월에 대학 측은 해임안을 발표하며 이충희를 신임 감독으로 내정한다고 했으나, 이충희 감독대행과 싸우며 모교 학부모 간의 법적공방까지 가는 진통을 겪은 채 8월 5일에 이기수 총장 등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그러는 사이 이민형 외 코치 2명이 떠나고 이지승이 새 코치로 들어온 바 있다. 다만 9월 25일에 징계위로부터 견책 처분을 받고 복귀했다가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2010년 초 이민형 전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지도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시절 고려대 농구부는 스카웃되었던 선수들이 차재영, 양우섭, 하재필, 정창영, 유성호 등이다. 다들 고교시절 대단한 유망주였으나 대학시절 심각한 기량정체를 겪으며 KBL 드래프트에서 가치가 급락했다. 임준수는 1학년도 마치지 못한 채 고려대를 떠나 성균관대로 재입학했다. 결국 두 감독은 모두 해임의 비극을 당하게 된다. 고려대 농구부는 이 와중에 은퇴한 지 얼마 안 됐던 비극의 창원 LG 세이커스 출신의 슈퍼스타였던 현주엽에게 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결국 코치 경험 없이 LG 감독으로 부임한 현주엽은 자신이 창단 시절부터 좋아했던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두번의 9위와 함께 LG 팬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4. 퇴임 이후
야인이 된 임정명 감독은 지인들과 낚시를 즐기기도 했고, 2014년 몸담았던 서울 삼성 썬더스의 클래식 데이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가족 중 딸 임현지는 과거 WKBL의 선수였고 매니저를 거치기도 했다. 또한 아들 임우찬은 체육교사로 임용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5. 관련 문서
6. 참고 자료
[1] 1974~1977[2] 1977~1981[3] 석사 학위 논문 : 長期間 칼슘投與에 따른 血液의 生化學的 變化가 運動遂行能力에 미치는 影響 : 籠球選手를 中心으로[4] 무릎인대 파열[5] 동기인 이충희도 77학번이었는데, 임정명이 그 이충희를 누르고 랭킹 1위로 대학에 입학했던 것이다.[6] 축구인과 동명이인.[7] 반면 그와 같이 일한 이재호 코치는 차분한 성격을 지녔으나, 차기 감독 물망에 오르지 못했다.[8] 특히 포워드 중복투자의 폐해는 후임 정광석 감독 재임기에도 이어졌다.[9] 반면 임정명 본인은 발전기금을 강요/착복하거나 각서를 강요한 사실이 없다고 했고, 이는 한겨레의 정정/반론보도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