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9:49:20

임옥상


<colbgcolor=darkslategray><colcolor=#fff> 임옥상
林玉相 | Ok Sang LIM
파일:임옥상.webp
출생 1950년 2월 3일 ([age(1950-02-03)]세)
충청남도 부여군
학력 용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 / 석사)
앙굴렘 미술학교
경력 광주교육대학 교수
전주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민족미술협의회 대표
국회 건출조경자문위원장
종로문화재단 이상
평창문화포럼 이사
종로구청 공간디자인위원
사단법인 세계문자연구소 대표
사단법인 흙과 도시 부이사장
사이트 임옥상미술연구소
1. 개요2. 작품관3. 작품활동4. 논란
4.1. 여직원 성추행 사건4.2. 일본군 위안부 기념시설 건립 논란
5. 개인전6. 수상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중 화백이다. 1950년 2월 3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정치적 탄압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국의 70년대와 80년대에 선도적으로 민중운동을 이끌었던 예술가들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민중운동의 시작을 같이한 비판지 '리얼리티와 위터런스'의 창간자 중 한 명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그는 사회증인, 증언자, 분석자, 선언자, 분사자 등의 역할을 맡았다. 임옥상은 세련되고 매력적인 미의 형태는 아니지만, 다소 거칠고 생기있고 본연 그대로 표현하는 예술적 언어를 가지고 있다.

2. 작품관

"6년의 학창 생활을 마무리한 나는 캔버스와 물감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고 대지로 나섰다. 대지에 직접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땅 위에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생각이었다.내 눈과 손과 발, 몸 전체로 이 땅을 보고 느껴보자. 발이 닳도록, 허리가 휘도록, 눈이 시리도록 국토를 뒤지고 살펴 맛보아 내 몸이 국토와 한 몸이 되도록, 국토가 내 몸이 되도록. 그러나 나는 대지위에 작업하는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분단시대, 독재시대의 국토는 이미 국민의 것이 아니었다. 신성불가침의 불가촉의 성역, 분단 이데올로기의 제물이었다. 반공법의 현장이었다. 영어의 땅. 그래서 나는 대신 그것들을 캔버스에 그리기로 작정하였다."

임옥상은 다양한 매체의 표현에 능숙한 화가다. 글쓰기, 페인트, 금속 외에 그는 인간 본연의 성질등을 표현하기 위해 종이와 점토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불의와 파괴의 힘에 대항하는 발언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보존하고 배려하는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그는 공공미술에 종사했고, 예술적 맥락을 구현하여 도시와 시민들 사이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공공미술은 대부분 그 장소에 관련이 깊다, 그래서 주로 시설의 지리적 위치 근처에서 발견되는 재료를 사용한다. 특히 미국 군사훈련에서 남긴 포탄과 둔기를 작품에 사용하며 특유의 재료 사용감과 메시지에 남다른 감성을 드러냈다.

3. 작품활동

그의 1970, 1980년대 젊은 미술가 시절에 그는 직설적이고 호소력 있는 그림을 주로 연출했다. 당시 그의 업적은 사회적 사건, 인간관계, 정치이념 등을 다루었고, 실용적이고 때로는 이상주의적인 어투도 종종 효과적이었다.

임옥상의 초기 그림은 혁신을 통한 사회갱생은 물론 사회적 부정과 억압에 대한 저항과 외침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해 대중에게 어필했다. 임옥상은 다른 현대 예술가들과 동맹을 맺어 당시 제도화된 예술계의 이상적이고 형성적인 성격과 구별하기 위해 진행된 이 예술 운동의 윤리와 행동을 결속시키는 데 일조했다.

1980년대 그는 세계사를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편입시켜 한국사의 맥락에 대한 시각을 넓히려 했다. 예를 들어 식민주의와 예속주의에 물든 아프리카의 현대사를 그려내고 이를 거울 삼아 한국사를 반영했다. 그는 아프리카인의 얼굴에 나타난 분노를 통해 한국 국민의 분명한 결의를 표현하고 아프리카의 땅을 적나라하게 훑으며 은유적으로 한국의 땅을 살폈으며, 개발 과정에서 독재자들이 자행한 전형적인 범죄를 직접 들여다보는 고도의 예술적 표현도 선보였다.

1980년 이후 임옥상은 자신의 표현방법과 형식을 내실화, 안정화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흙, 종이, 입체적 작업으로 재료를 확장했다. 그의 작품의 주제적인 문제는 계속 진화하여, 그 범위가 저항에서 생태계와 환경과 관련된 문제의 포괄적 해결로 확대되었다.

임옥상은 국립 현대 미술관,삼성 호암 미술관, 대안박물관, 가나미술관을 포함한 다 수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70년부터 2023년까지 베니스 비엔날레, 아태지역 현대미술 3년제, 광주비엔날레, 베이징비엔날레 등 100여 개의 단체전에 참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미술관, 삼성미술관 소장품이며, 청와대 세종실 벽면에는 그의 작품인 <광장을 장식하는 촛불혁명 속에 서 있다>가 전시되어 있다.

4. 논란

4.1. 여직원 성추행 사건

<rowcolor=#fff> 1심 항소심 상고심
2023년 8월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단독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2024년 5월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2부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2023년 6월, 강제추행으로 기소됐다. 자신이 운영하는 '임옥상 미술연구소'의 직원이자 미술계 후배인 A씨를 2013년 8월 성추행한 혐의다. 임옥상 측은 비공개 재판을 요청했으나 재판부가 공개 재판을 못박았다. 검찰은 추행 정도가 가볍지 않고 피해자가 임옥상에 대한 엄벌을 탄원하고 있음을 들어, 징역 1년을 구형하고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명령과 신상정보 공개 고지 명령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임옥상 측 변호인은 “임 작가는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피해자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당시에도 사과했고, 현재도 깊이 뉘우치고 있다”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반성의 뜻을 밝혔으니 깊이 참작해 달라”고 변호했다. 피해자 측은 재판에서 "피해자는 사건 발생 이후 지금까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며 "임씨가 어떤 법적·사회적 책임도 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를 잊은 적 없다"고 호소했다.#

서울특별시는 공공미술로서의 가치가 예술인의 성범죄로 인해 훼손되었다고 보고 법원의 유죄 확정 이후 그의 공공미술 5점을 청문을 거쳐 철거할 예정임을 밝혔다.#

2023년 8월 17일 1심 재판부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아울러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단독 하진우 판사는 선고에서 "임옥상이 피해자를 추행했다는 범죄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있고, 제출된 증거들에 의하면 자백이 뒷받침된다", "임씨와 피해자의 관계와 추행 정도, 범행 후 경과 등에 비춰보면 죄책이 가볍지 않다", "피해자가 이 사건 범행으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에게 용서받지도 못했다”고 했다. 다만 "임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고, 피해자를 위해 2000만원을 공탁한 점 등을 양형에 참작했다"고 밝혔다. 피해자 변호인인 김재련 변호사는 "공탁금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뜻을 재판부에 밝혔는데, 이를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한 것은 유감스러운 대목"이라고 했다.

민중 미술계의 대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던 그의 성범죄에 미술계는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그의 작품들 또한 철거논란이 휩싸이게 되었다.#

상기했듯 임옥상 변호인 측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반성의 뜻을 밝혔으니 깊이 참작해 달라"고 변호했으나, 조선일보 취재에 따르면 임옥상은 경찰 수사 단계에서부터 혐의를 일부 부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후 재판에서는 돌연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입장을 바꾼 배경에는 A씨가 제출한 녹취록이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사건 직후 임옥상이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는 음성 파일 및 녹취록을 증거로 냈는데, 임옥상 측은 이를 무너뜨릴 수 없던 것으로 보인다. #

2024년 5월 22일 2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2부에서도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아울러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가 선고되어 1심와 같이 판결이 유지되었다. #

4.2. 일본군 위안부 기념시설 건립 논란

강제추행 3년 뒤인 2016년,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인 '기억의 터' 건립에서 중역을 맡은 점이 뒤늦게 발견돼 논란이 됐다. #
파일:oksang.jpg
기공식에서 '기억의 터'에 관해 설명하는 임옥상 화백
기억의 터는 서울 남산 통감관저터에 1200m²(343평)규모로 착공됐다. 당시 임옥상은 디자인 등 조성 책임을 맡았다. 2016년 6월 29일 열린 기공식에는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를 포함해 박원순 서울시장, 윤정옥 초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 임옥상 화백 및 기억의터 추진위원들이 함께 했다. 추진위는 2016년 6월 28일 기준 19,600여명이 모금에 참여했으며 3억 4712만원 이상을 모금했다고 밝혔다. # #

[임옥상미술연구소] 2016년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
기억의터는 '세상의 배꼽'과 '대지의 눈'으로 구성된다. 기공식에서 임옥상은 "세상의 배꼽은 자궁, 혹은 오름과 같은 형상으로 오름을 올랐을 때의 평온과 행복을 담았으며 생명과 생명의 연결을 뜻한다"면서 "전국에서 모을 자연석은 할머니들을 상징하는데 세상의 평화를 갈구하는 할머니들의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연구소에서 미술계 후배이자 여직원인 A씨를 추행한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서울시는 '기억의 터'를 포함한 임옥상의 공공미술들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

임옥상의 성추행 피해자 A씨는 선고 전 재판부에 고소 결심 계기와 그간의 심경 등을 적어 제출했다고 한다. 이 글은 "임씨가 성추행을 저지른 후에도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작품을 만드는 등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며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며 엄벌을 탄원한 내용으로 알려졌는데#, 여기서 말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작품'이란 이 기억의 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 개인전

6.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