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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23 10:43:37

임록재



파일:임록재.jpg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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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식물학자, 정치인.

2. 생애

1920년 11월 24일, 황해북도 황주 칠촌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황주보통학교에 진학, 황주원예학교를 거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으며 1940년 4월, 도쿄제국대학 원예약초학부에 진학하여 1943년 8월에 졸업했다. 귀국후 1943년 9월, 경성제국대학 생역연구소 조교로 부임하여 1944년 10월까지 근무했으나 식물에 조선어 이름을 붙였다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생약연구소 약초원 주임으로 일했으나 1946년 12월에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초대약용식물학 강좌장으로 부임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최고사령부 군의국 중앙위생소 소장으로 배치되었고 1951년 6월, 평양의학대학에 배치되어 1954년 12월까지 조선중앙위생화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55년 1월부터 1958년 12월까지 국가과학원에서 일하였다. 1959년 4월에 평양식물원 원장으로 배치되어 굉장히 오래 일하였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나 1964년 11월에 부원장으로 강등당하기도 했다. 1965년 10월, 생물학 박사 자리를 받았고 1972년 4월,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76년 1월, 교수칭호, 4월에 공화국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77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조선식물명집》, 《조선식물지》, 《조선식물도감》, 《조선산림수목》, 《조선약용식물》, 《조선약용식물지》등을 집필하였으며 인삼 재배에 관한 10여 편의 논문을 투고하였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81년 11월, 중앙식물원 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 조평통 상무위원이 되었다. 1982년 3월, 중앙식물원 원장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1986년 3월, 산림과학원장을 겸하였으며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았다. 1986년 7월, 산림과학원 대표단장으로 동독에 다녀왔으며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조선식물학회 위원장이 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예산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임록재를 얼마나 아꼈는지 "나는 리승기동무도 사랑하고 임록재동무와 김상련동무도 사랑합니다."라고 교시하기도 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02년 1월 17일, 81세를 일기로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김정일이 애도를 표하며 화환을 보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이 북한을 대표하는 과학자 중 한명으로 임록재를 특별히 언급하였다. 2023년 6월 23일자 로동신문에서 임록재 특집기사 "나라의 식물학발전에 공헌한 과학자 원사 교수 박사 임록재선생"을 게재하였다.

3. 여담

한때 남한에서 림록재라고 과잉수정해서 부른 적이 있는데, 북한에서도 임록재라고 부른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