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 |
장르 | 대체역사, 빙의 |
작가 | 구오 |
출판사 | KW북스 |
연재처 | |
연재 기간 | 2022. 08. 24. ~ 2023. 07.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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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작가는 대조선 광산재벌을 집필한 구오.[1]2. 줄거리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너라고 나보다 잘할 것 같으냐?
밤새 키보드배틀을 떠서 이긴 상대가 인조였다
아니, 이건 아니지.
그래도 내가 너보단 잘한다!
밤새 키보드배틀을 떠서 이긴 상대가 인조였다
아니, 이건 아니지.
그래도 내가 너보단 잘한다!
3. 연재 현황
카카오페이지에서 2022년 8월 24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2023년 7월 14일 완결되었다.
4. 등장인물
4.1. 조선
4.1.1. 조선 왕실
- 인조
주인공. 키보드 배틀로 인조의 영혼을 떡바르고, 그 보복으로 거사 당일 인조의 몸에 빙의한다. 거사 당일 천운을 자신의 능력으로 포장해 광해군을 폐주로 몰아내면서 서인들보다 우위에 선 채로 즉위하며 정권을 잡는다. 또한 북인들의 숙청을 부패한 자들을 일소하는 선에서 막아내고, 서인 정권의 거물인 김류, 이귀 등을 통제하면서 조선의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이후, 장창방진의 개발과 홍이포를 도입해 개발한 소 홍이포의 대량 개발, 군적의 개혁을 통해 수천명 이상의 평안-황해 방어선 구축, 한명련에 정충신, 장만과 김충선 등 신분과 연령(...)을 가리지 않는 병력과 인재 기용으로 확충해 수만 기병대군도 막아낼 수 있는 군사력을 조선 북방에 만들어낸다. 그 결과로 자신들을 옥죄는 인조를 축출하기 위해 쳐들어온 홍타이지의 후금군을 대파해 명분과 권력을 틀어쥔 절대군주가 되며, 이제 홍태주의 후방을 괴롭히면서 조선의 물산을 임진왜란 이전까지 돌려놓겠다고 개혁을 다시 시작할 것을 알린다.
도르곤과 홍타이지라는 당대 동아시아에서 손에 꼽는 양 명군주들의 내전을 조율하며 강역 확충과 내정을 동시에 돌보고 있다. 후금을 몰락시키고 목줄을 채운 승전과, 문신과 무신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입지로 조선에서 더할나위가 없는 절대군주로 통한다.[2] 이앙법, 산둥반도 진출, 서얼 허통 등 많은 개혁을 하느라 업무가 넘쳐나고 있다.
끝내 요동과 화북 어느쪽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고 조선의 속국 신세가 된 금나라, 조선과의 관계도 어그러지고, 국체가 너무나 무너져서 장강을 넘으려면 몇백년은 걸리게 된 처지의 남명을 두고 대륙의 조율자 포지션을 차지한다. 그 후 만주로 진격해 과거 자신이 보냈던, 혹은 대청에게서 도주한 소수 세력가들을 봉림대군을 앞세워 포섭하면서 만주를 조선의 강역에 넣는다.
- 소현세자
인조의 장남. 아버지를 잘 따르고 존경한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여긴 인조도 곧 소현을 아들처럼 아껴주며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150화 기준으로 아버지가 된다. 전쟁통에 인조의 명으로 왕통 보존을 위해 피난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충을 체험했고, 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누 보급을 추진한다. 먹고 죽을 기름도 없다는 인조의 반대에 막히긴 했지만, 일단 화장품으로나마 시장의 좋은 반응을 얻는 데는 성공한다.
북경후금, 남명, 조선령 등주와 요동 등으로 중원의 정세가 대략 정해진 후부터는 인조에게 왕위를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능력은 뛰어나나 암수에는 재주와는 별개로 의지를 안 보이는 것이 약점.
- 봉림대군
인조의 차남. 형 소현세자가 잘 성장하고 있지만, 원 역사의 효종도 유능한 군주임을 기억하는 주인공에게 기대받고 있다. 형 소현세자의 위치가 확고했기에 인조는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봉림대군을 한양 밖으로 내보내서 자기 앞길을 개척하게 만든다. 이후 조선 동북면에서 후금 약체화 이후 혼란스러운 여진족들 사이에서 명성을 날리며 직접 호랑이를 사냥하고 도적을 때려잡으며 조선의 영향력을 뻗치고 있다. 최종적으론 부친이 퇴위한 이후 동북면으로 오자 그 좌장으로서 직접 야인 여진을 조선 산하에 흡수하는 것에 앞장선다.
- 인목대비
선조의 후처이자, 현 인조의 대비. 선조 사후 왕실 최고어른이 되었으나, 광해에 의해 핍박받아 자식(영창대군)을 잃고 정명공주와 같이 유폐되어 있었다. 윤선이 반대하지 않았으면 왕실 최고어른임에도 아사했을 뻔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폐주 광해군을 모아낸 반정 명분 그 자체인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서 즉위식을 무기로 인조와도 기싸움을 벌인다. 이런 기싸움이 정치적 혼란은 물론 후일 대비가 죽자 그 딸인 정명공주에게 보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아는 인조는 김자점을 버림패로 투척해 대비와 상하관계를 분명히 한다.
김류 왈 "세상물정을 모른다." 인조 왈 "품행이 나쁘고 덕망이 없다. 구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라고 평할 정도로 다루기 까다롭고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후에는 나름 사이좋은 가족이 된다.
- 광해군
폐주. 주인공의 거사로 왕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인조의 원한보다는 임란 당시의 광해가 보인 노력과 선조에게 받은 고통을 알고 있는 주인공에 의해 어느 정도 배려를 받으며 유배지로 가게 된다. 본인도 자신이 퇴위당한다는 걸 깨달았음에도 오히려 평온한 표정을 짓고 항복한다.[3] 후일 광해의 아들이 유배지를 탈출하려다 붙잡히는 사건이 터져서 처형 당할 뻔 했지만, 인조가 인목대비를 내세워 여론을 진정시킨다.
4.1.2. 조선군
- 한명련
임란부터 활약해 밑바닥에서 올라온 인물. 방군수포의 폐단 해결을 위한답시고 지방관들의 원한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기에 정충신과는 달리 명을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정충신과 같이 인조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이후 청나라의 전면침공이 개시되자 함경 온성을 지키며 맞선다. 2만에 달하는 압도적인 수의 청군에게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 새벽에 일거에 몰아친 끝에 지형과 안개의 힘을 업어 그들을 밀어내는 기염을 토하고 결국 사망한다.
- 한윤
한명련의 아들. 아버지의 부관이었으나, 한명련이 몰려든 청군에게서 살리기 위해 소수 병력과 같이 탈출시킨다.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듣고는 복수를 위해 벼르다가 인조의 부름으로 상단을 위장해 만주로 진출. 해서, 야인 여진을 포섭해 만주를 혼란으로 내몰게 된다. 다만 상단 일도 상당히 잘되는데다가 본인이 증오하는 후금의 이권을 조선과 자신 손에 빼먹을 수 있게되는지라 상당히 의욕적으로 상단 일을 하고 있다.
- 정충신
임란부터 활약해 밑바닥에서 올라온 인물. 방군수포의 폐단을 해결하겠다는 인조의 의지에 적극공감하며 그 후원으로 도절제사 직위로 승진하 함경-평안 방어선의 한축을 담당하게 되며, 후일 북방군의 부원수로 임명된다. 홍타이지의 대규모 침공을 장만, 김충선과 같이 전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산둥반도 진출에 조선군 도원수로 진출한다. 본래는 금군이 선봉을 맡고 조선군이 후방에서 점령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진광래의 함정에 빠진 홍타이지가 허망하게 전사하고 금군이 해체당하자, 조선군을 이끌고 야습해온 등주반란군을 역습해 격파한다.
- 장만
원역사에서 이괄의 난을 진압한 인물. 환갑이 다 된 노신이며, 무신도 아니었지만 그의 활약과 인품을 알던 인조는 일부러 불러들여 북방군의 도원수직을 제수한다. 부원수 정충신, 김충선을 신분에 상관없이 잘 대해주며 그 의견도 수령해주었고, 인조가 조언한 가도 모문룡의 폭주도 전해들었던 덕에 늦지 않게 군을 동원해 격퇴했으며, 모문룡의 테러에 가까운 유민 폭동 사태도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본래 도원수 제직 당시 환갑이 넘은 나이라 빨리 은퇴하고 싶어했지만,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히 은퇴하려 했지만 장만 정도로 유능한 신하가 아까웠던 인조는 허락하지 않는다. 아민의 대규모 공세를 정충신, 김충선과 함께 막아내는 대공을 세우고 승장이 되었고, 그 후 은퇴해 한양에서 소일거리 하며 낙서포를 자랑하거나[4] 하며 지내다가 수방사가 창설되면서 다시 불려나와 사령관이 된다. 이후 팔기 1만의 한양 공습마저 막아내고 반격으로 전멸시키면서 공신이 된다.
- 김충선
임란 당시 조선에 귀부한 인물로, 종2품까지 지내고 환갑이 넘어 왜촌에서 지내고 있던 무장. 그러나 왜군의 장창 전술에 대한 조언이 필요한 정충신과 장만의 요청으로 북방전선에 복귀한다. 김충선은 장창만으론 기병을 상대할 수 없다고 했지만 발전한 조선의 포병전력이 더해지면서[5] 말 그대로 팔기를 잡아죽이는 함정 전술이 완성된다.
4.1.3. 서인
- 김류
조정 내 서인 당파의 수장.[6] 인조가 반정날부터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어쩌지 못하고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그러나 이후 인조의 신하로서 나름 충실히 활약하며, 경쟁자인 김자점이 기존에 숙청당한 덕에 서인 당파의 수장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인조의 조언(족쇄를 풀면 더 높이 오를 것)을 듣고부터는 무능한 서인들을 귀찮게 여겼고, 끝내 수장 자리를 반쯤 내던지게 된다. 인조의 평으로는 머리는 돌지만 결국은 소인배. 인조 대신에 욕받이를 자처해 개혁을 밀어부치거나, 반정분자들을 찍어누른다.
여기서 처음에는 겨울 혹한을 이용해 물을 뿌리다가 나중에는 양민들을 포섭해 인조정책에 반대하는 선비들의 시위를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래도 심보야 어쨌건 말년까지 인조의 충실한 신하로서 역할을 다했기에 은퇴 전에는 정승 자리에 올려줄 거라는 언급이 있다.
- 이귀
김류와 같이 조정 내 서인 당파의 수장. 김류와는 달리 미친 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공격적이고 난폭한 성격에 자존심도 그만큼 세다. 그 성격을 역으로 이용한 인조에게 몇번이나 도발을 받고 망신을 당하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개혁의 선봉이 된다. 심지어 후금의 사신으로 몽골원정까지 참가했을 정도이며, 홍타이지의 1차 공세를 조선이 성공적으로 격퇴하자 요동 진출까지 주장하며, 선봉군에 나서겠다고 하지만 당연히 제지당한다.
- 김육
대동법을 필두로 조선 조세제도 개혁을 주장한 위인.
한성판윤 윤선이 사직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인조가 묻는 말에 인조가 원하는 대답을 하면서 인조의 마음 속에서 50만점 가점과 함께 종신노예(...)로 굴러지는 것이 확정되었다. 덕분에 판서자리까지 고속출세하며 정승자리에도 후임으로 내정된다.
- 이괄
인조반정 2등 공신. 그러나 그의 무능함과 또 한번의 반란을 기억하는 인조는 그가 개혁에도 동참하지 않자 불러들여 재상에 합당한 능력을 증명하라고 도발한 후에 오히려 실패하고 도망친 그를[7] 독살하면서 개혁을 강행할 명분으로 삼는다.
- 송시열
미래 서인의 거목이 되어 수십년간 주축으로 섰다가, 숙종에게 사약을 받는 유학자. 아직 20대의 젊은이였던 탓에 출사하진 않았다. 그러나 인조의 공개적인 선조 비판과 광해군 동정여론 조성에 상소를 써서 비판하려다 인목대비가 먼저 인조에 동조하면서 그만두는 모습으로 원역사다운 꼿꼿한 모습이 죽지 않았음을 보인다.
그러나 이후 인조가 양사를 경쟁붙여 서원 정리에 동원하자 이를 왕도에서 벗어난 비열한 방법이라고 비난하며 독대를 청한다. 사촌형 송준길은 경악... 물론 송시열도 내심 일개 어린 선비에 불과한 자신이 궁에 들어갈 수 있겠냐며 지른 짓이었지만 송시열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인조가 불러내는 바람에 독대. 그리고 인조의 정책이 약간 어긋나기는 했을지언정 그 의도는 선하고 결과도 좋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인조의 충신이 되기로 결심한다.
4.1.4. 북인
- 박홍구
북인 좌의정. 본 역사에선 북인의 수뇌부였기에 인조반정 이후 파직되고 유배까지 당했다가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처형당한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서인을 견제할 북인이 필요한 인조가 숙청을 막아서 벼슬을 유지한다. 이후 여러 국책에서 존재감을 보이며 인조에게 충성했다.[8]
- 조정
북인 우의정. 본 역사에선 인조반정 이후 숙청당하지만 여기서는 인조 덕에 벼슬을 유지한다.
- 남이공
명나라에 파견된 조선의 중신. 당시 개혁을 단행하고 아민의 팔기를 압도적으로 격파한 명군으로 입지를 높인 조선왕의 측근이라고 명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이에 인조의 명령과 무기력한 천계제의 관심으로 명나라 정계에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1차 조청전쟁이 조선의 대승으로 끝나고 청나라가 반토막나는 결과를 가져오자 단숨에 왕화정, 위충현 등의 권신들도 함부로 못할 수준의 거물이 된다. 이를 이용해 인조의 밀지대로 명나라가 조선에 요구하는 요동원정을 거부하고, 명나라가 직접 군을 파견해 홍태주를 공격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으로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이 후금에 다대한 피해를 입힌 끝에 전멸하면서 명나라의 대 후금 전선은 무너진다.
그 후 제몫을 다했다고 판단한 인조의 허가하에 등주에서 귀국한다.
여담으로 죽마고우인 병조판서 김신국과 욕을 주고받는 사이로 인조의 허락없이 명나라 군을 칠 계책을 김신숙에게 묻다가 걸려 인조가 보복으로 경복궁 경회루 연못똥물에 김신국과 같이 입수(...)하기도 하였다.
- 김신국
북인출신 병조 판서. 남이공의 친구. 남이공과 함께 조정의 차세대를 지탱할 명신 중 한명으로 인조는 서인들의 불평불만에도 김신국을 중용했다.[9] 인조의 기대대로 수년 간 충실하게 인조의 개혁을 지원했다.
4.1.5. 기타
- 임경업
비사성 조차지를 개발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 군관. 피에 익숙한 한족&여진족 도적들 정도는 여럿을 홀로 베어내는 검수. 조선의 비사성 편입에 큰 공을 세운다.
4.2. 명나라
- 천계제
명나라의 당대 황제. 정치에서 관심을 끊고 조각이나 하면서 세월을 낭비하고 있다. 반정으로 즉위했으나 대내외적으로 활약하며 명군의 면모를 보이는 인조를 부러워한다.
후일 홍승주가 태원에서 전사하면서 북경이 사천 반군, 등주 반군의 사정권에 들어오자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정쟁에 매진하는 신하들을 보면서 '나는 암군이지만 저들은 사신이다.'라면서 동생 주유검을 황태제로 삼아 남경으로 먼저 탈출시킨다. 본인은 최대한 신하들의 정쟁을 격화시키고 핑계를 대면서 북경의 암덩어리들과 같이 죽겠노라고 다짐한다.
이후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는 이미 병사했으며 운좋게도 묘지는 보존된다.
- 위충현
천계제 대의 부패 환관. 토사의 난으로 대륙 서쪽이 대혼란 상태였던 명나라를 한층 더 쇠락시킨 부패한 간신이다. 남이공이 천계제의 호의와 조선의 대승을 무기로 위충현조차 능가하는 정치적 입지를 올리자 그를 돌려보내려고 협상을 시도한다. 이에 남이공은 출병을 위충현에게 반대하는 무신 원숭환에게 시키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남이공이 떠나고 천계제가 다시 폐인짓을 하면서 권력을 쥐었다. 그리고 오히려 남이공이 있을 때는 조금씩이나마 진행되던 국정은 완전히 파국으로 돌았고 서쪽의 토사의 반란과 요동에서 밀려난 후 마적떼로 전락한 요동군이 등주군을 격파하고 흡수해 벌인 반란으로 명나라는 동서의 국경 모두 거진 통제권을 상실한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했을 때 붙잡혀 처형된다.
- 모문룡
가도에서 명나라 유민과 패잔병을 흡수한 후 가도총병직을 받은 인물. 인조의 책봉 문제와 후금을 이유로 명과 조선 양측에서 막대한 재물을 받으며 갑질을 벌인 인물이다. 그러나 인조가 즉위한 후에 단 한푼의 뇌물도 주지 않자, 경중명의 조언대로 조선 해안가 마을을 약탈했다가 제대로 성난 인조와 장만 이하 조선군의 가도 포위를 당하게 된다. 모은 물자도 없어 아사가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수만면의 유민들을 해적마냥 뗏목에 태워서 평안도 해안가에 드랍해 조선 수군의 포위를 풀고 도망치려 시도했으나, 결국 붙잡혀서 일당과 같이 명으로 압송된다.[10] 그 후 결국 처형당했다고 언급되며, 산하에 있던 경중명도 같이 죽어버렸기에 의도치 않게 명나라의 큰 우환거리를 줄여준 셈이 되었다.
- 마세룡
명군의 산해관 총병을 담당한 장수. 군에 문외한인 병부상서 왕재진의 강권으로,[11] 출병하라는 황명이 떨어지자 절망하면서 장창으로 무장한 5만 대군을 몰고 사지인 요동으로 진군한다.[12]
가족들에게 도망치라고 유서까지 써두었으나, 의외로 요양에서 가까운 안산성까지 무혈입성에 성공했고, 그제서야 요동이 위험한 걸 눈치채고 압록강에서 달려온 후금군 10만여명과 대치한다. 이에 후금군이 조선 북방군과 대치하느라 주력을 멀리 보냈다가 복귀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기병대를 출병시켜서 후금 기병들과 교전, 믿지않던 장창병들도 의외로 기병의 자유로운 이동을 견제하는 효과가 있어서 수적인 열세에도 선전한다.
결국 누르하치가 직접 깃발까지 휘두르며 사기를 고취시키자 팔기의 사력을 다한 재돌격에 창진이 무너지고 패전해 명군은 전멸한다. 그러나 요양에서 한인들의 봉기해 불이 나는 등 후금의 요동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후금군에도 막대한 인명피해를 강요해 피로스의 승리만 거두게 하면서 큰 변화를 가져온다.[13]
- 원숭환
원 역사에서 나라를 지키다 반간계에 걸려 죽은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 간신 위충현이 남이공에게 설득되어 일만 군사를 이끌고 억지로 영원성을 나서게 된다. 홍타이지가 눈을 향하지 못한 사이 요서 대부분을 수복하나, 명나라 본토에서는 어떤 지원도 오지 않자, 오히려 부관이 지방관을 임명하고 징발하자고 제안하는 등 혼란을 겪는다.
결국 금주에 주둔한 홍타이지를 상대로 심양 세력의 군대와 같이 불안한 동맹을 맺고 맞선다. 홍타이지의 사력을 다한 각개격파에 결국 무너졌으나, 홍타이지도 이긴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다고밖에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 왕민정
명나라에서 조선에 보내는 사신. 아민의 팔기를 격파하고 역으로 포로로 잡은 조선을 방문한다. 명나라 사신들의 패악질은 조선에서 유명했던지라 남이공은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인조를 모욕하거나 낮잡지 말아달라고 약조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수년 후. 조선이 만주에 진출하고 후금을 군사, 경제적으로 잠식해 영토할양까지 받으면서 지역의 강국으로 부상하자 이번에는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조선에 찾아온다. 그러나 왕민정이 가져온 명나라의 칙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나 하고 있었으며[14] 이에 북경은 희망이 없으니 남경으로 천도하라는 말을 듣는다. 처음에는 발작하며 거부하려고 했지만 조선의 말이 그나마 현실성 있었기에[15] 결국 인정한다.
- 이자성
틈왕. 명말 농민반란군의 수장. 왕가윤이 태원에서 홍승주와 동귀어진 한 후에 세력을 이어받아 명나라를 정복해나간 끝에 결국 북경을 점령. 이미 죽은 천계제와 발목잡힌 간신들을 처형한 후 순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오만하게 조선에 천자국으로서 갑질을 하려다가 조선이 후금과 짜고 북중국 공격을 하게 만들었고 결국 패망한다.
4.3. 후금[16]
-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청태조. 여진을 통합해 만주를 지배하고,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와 조선을 연달아 격퇴하며 요동을 점령했다. 천재적인 군사능력으로 제국의 기반을 닦았지만 본인이 늙어가자 점차 권력이 후계자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해 사대패륵을 세우고 각자 견제 및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살벌한 후계경쟁 구도를 만든 장본인.
인조는 후금을 눌러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개혁을 최대한 진행해도 수년 내로 야전에서 누르하치를 상대할 자신도 없고 너무 정면에서 눌렀다가는,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의 원숭환이 사력을 다해 막아낸 16만 대군이 조선에 몰려드는 경우가 터질까봐 전면적인 대립은 피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서 예전같지 않다는 평이 있었으나, 조선에게 낚여서 주력이 압록강에 간 사이에 명군에게 털린 요동을 회군해 연전 끝에 전멸시키고, 이 때 입은 막심한 손해를 몽골 초원까지 친정해 릭단 칸의 코르친을 토벌하고 원나라 옥새까지 얻어내면서 상당부분 만회했다.
누르하치 역시, 조선이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 이제는 사력을 다해야 할 적수임을 눈치채고 마찰을 되도록 줄이고 있다. 때문에 조선의 가도 정벌이나, 아민 토벌 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후금과 명 사이에서 자신들에게 기울기를 바랬으나, 산해관의 문은 굳건했고 조선을 오래 방치하면 여진족의 후환이 될 것을 생각한 아들 홍타이지가 거병하면서 살해당한다.
-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후금의 사패륵. 누르하치의 8남으로 가장 유력한 누르하치의 후계자. 뛰어난 능력을 지닌 거물로 작품의 최종보스로 유력하다.[17] 가도 사태 이후 조선에 관심을 두고 아파태 다음으로 찾아오며, 인조의 능력을 알아채게 되면서 그를 난적으로 평가한다.
아민의 정람기와 기병 육천명이 조선군에게 패배하는 순간 팔기 1만명을 데리고 후방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공격해도 기습은커녕 홍이포의 먹이가 될 것을 눈치채고 조용히 물러난다. 그 후 조선을 정리해야 하는 것을 필수라고 여기고, 몽골에서 릭단 칸을 무너뜨리고 군을 재정비한 후에는 조선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분도 부족하고, 여력이 아슬아슬하다는 핑계로 거부당하자 최유력 후계자로서 모아온 친위세력을 움직여 아버지 누르하치를 죽이고 한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자 바로 해서 여진과 몽골인들, 누르하치 직속 팔기를 조선에 버림패로 보내며 전력 소모를 유도하고 조선에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수만에 달하는 팔기와 그에 맞먹는 수의 한인, 몽골기병을 동원했으며, 몽골과 한인들을 이용해 조선군의 화약을 소모시키고 방심을 유도하다가 단숨에 1만명으로 북방군을 막고, 남은 1만명의 팔기인 정예 양백기 주축의 별동대를 한양까지 침투시켰으나, 수방사에 의해 1만 기병군이 괴멸당하면서 1차 침공은 실패로 돌아간다.[18]
안산 전투의 여파를 간신히 추스린 차에 터진 대패배로 어쩔 수 없이 귀국하나, 이미 아바타이가 대패한 홍타이지의 입지추락을 역이용해 도르곤을 한으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상태. 결국 아바타이가 장악한 심양을 포기하고 요양으로 가 임시수도로 정한다. 그 후 세력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또 병력이 줄어서, 요양을 회복할 희망은 희박해진 상태. 심지어 조선으로 도망친 여진족들이 후원을 받아 다시 만주로 진입하면서 그들과 협상을 해 조건부의 충성을 받기 위해 만나면서 굴욕을 당한다.
그럼에도 직접 군을 끌고 출정해 이영방의 반란군을 단숨에 박살내고, 혁도아랍을 통솔하던 아민의 복종을 받아냈고, 그 후 요동 서남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직접 움직인다. 압도적인 능력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지만 인조 역시 냅두면 다시 홍타이지가 청 제국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면서 개입하기로 한다. 금주에서 도르곤과 아바타이의 심양 군과 원숭환의 명군을 동시에 상대해 각개격파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본인도 만신창이가 되고, 군대도 다대한 피해를 입어서 상처뿐인 승리만 남게 되자 조선 원정을 위해 반역한 과거를 후회한다.[19]
금주에서 승전을 거두고, 아바타이가 조선으로 도망치자 다시 자신이 금의 유일한 한으로 돌아올 날이 멀지 않다고 여겼으나,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요동의 식량사정과 이를 파고든 조선의 상단에 의한 경제잠식. 능력을 각성한 선양 후금의 도르곤이 정력적으로 군소세력을 규합하면서 세력도를 역전당하게 된다. 자신이 이길 방법은 직접 군을 이끌고 심양성을 점령하고 도르곤을 베는 수 뿐이지만, 대규모 전면 공성전을 벌일 만한 여력도 부족한데다 후방의 조선도 그 때는 개입할 것이 뻔해서 시도할 수 없는 수였다. 이에 마지막 도박수를 걸고 조선에 밀서를 보낸다.
조선에 원의 옥새까지 바치며 얻어낸 지원으로 도르곤에게 밀리던 전세를 역전시키고 다시 우세를 점한다. 그러나 갈수록 죄어오는 조선의 목줄을 실감하고 있다.[20] 결국 다시 선양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 끝에 도르곤을 참하고 다시 만주의 유일한 한이 된다. 그러나 비사성 일대를 완전히 조선에 넘긴 데다가, 국경 유역의 군소부족 연합은 여전히 아이신기오로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하고 세를 불리고 있어서 국력 재건은 어렵다.
등래대원수 토벌을 위해 조선과 동맹을 맺고 등주에 상륙한다. 등주내륙은 후금이, 해안가부터 나머지는 조선이 먹기로 약조하고 전력을 몰아 상륙한 것. 물론 해안가가 점령당하면 요동과 연결이 끊기지만 그대로 직예에 요서까지 점령해 다시 연결하면 그만이라고 대담한 태도를 보인다. 전력이 1만 언저리로 떨어진 팔기의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녹영군을 창설하고 요동 한족을 강제로 징병해 끌고 왔다.
녹영과 팔기를 이끌고 등래군을 몰아부쳤으나, 인의장막을 미끼로 쓴 진광부의 포격에 당해 사망한다. 죽기 전 자신은 전장에서 싸워야 살 수 있는 종자라 깨닫고, 드넓은 중원에 겨우 발을 디디고도 허무하게 죽은 것을 아쉬워한다.
- 아이신기오로 아바타이
누르하치의 7남. 바로 밑의 동생 홍타이지가 사패륵이자 유력 후계자라서 맹렬하게 질투하며 위로 올라가고 싶어한다. 조선에서 모문룡 토벌을 해내자 의주에서, 야반도주하듯이 한양에 들어와서 인조와 소현세자를 대면한다. 그러나 그가 홍타이지를 대놓고 싫어한다는 걸 왕 부자에게 들키자, 조선의 힘을 빌려서라도 후금을 가지겠다고 결심하고 내통하면서 후금 내의 조선 담당자가 된다. 이패륵 아민과 정람기가 조선을 노린다는 걸 눈치채자 조선과 짜고서 그들이 압록강을 넘게 만들었고, 조선군의 화망과 방진에 걸린 정람기가 괴멸하는 것을 지켜본다.
여러 전투나 외교 등 석상에서 계속 홍타이지에게 눌리고 있었지만, 인조의 조언대로 뒤에선 몰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과 손을 잡는다. 홍타이지의 반란이 성공하던 날, 소수 친변들과 탈출해 도르곤과 합류했으며, 이를 조선에 알리고 도르곤 일파와 같이 세력을 규합하다가, 조선-후금 전쟁이 팔기-한족-몽골족만 각자 수만명 단위로 잃어버린 후금의 대패배로 끝나자 그대로 들고일어나 심양을 점령해버린다. 자신을 쥐고 흔들던 두 거물의 승부에서 조선의 편을 들어 마침내 판에 올라서는 데 성공한 것.
그러나 홍타이지를 누르는데는 실패하고, 아바하이가 정쟁을 일으키자,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고 여기고 조선으로 밀입국해버린다. 우습게도 후금이 조선의 목줄을 찬 개가 되고, 등주에 진출한 시점에 재등장하는데 제법 규모 있는 거상이 된 것으로 나온다. 수작부리다 처맞긴 했지만.
- 아이신기오로 아민
후금의 이패륵. 누르하치의 조카. 즉 슈르하치의 아들이나 오래 전 아버지가 숙부에게 숙청당한 후 더는 올라갈 길이 막힌 인물이다. 패륵이 된 것도 권력싸움의 무게추가 되기 위해서라고. 그렇기에 정묘호란 후에도 조선을 노리며 자신만의 세력권을 구축할 기회를 간절하게 노렸다.
이 때 조선에서 지방관들의 뇌물을 받아 개혁을 반대하기 위해 돈을 뿌리고 다니던 평안감사 출신 이신이 압록강을 건너서 도망치자 아파태의 제안대로 그를 일부러 조선에서 잡아 죽이도록 한 다음에 이를 명분으로 정람기 포함 6천 명의 대군을 끌고 조선을 친다.
그러나 이미 아파태에게 첩보를 받은 도원수 장만의 대군이 압록강 도하중인 정람기에게 소 홍이포를 비롯해 포격을 퍼부으면서 허무하게 대패하고 포로가 되어[21] 외교협상 끝에 후금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혁도아랍에 유폐된다.
조청 전쟁 이후 다시 등장. 혁도아랍으로 좌천되어 미약한 세력밖에 없었지만, 청군의 공격 실패로 인한 패퇴와 분열 이후 다시 여력을 모아 나름의 군세를 가지고 홍타이지에게 합류한다. 홍타이지는 비굴하게 굴면서도 속내가 다른 듯한 아민에게 이를 갈았지만, 아바타이가 아닌 자신을 택한 걸 보면 능력은 여전하다고 여기고 그를 받아들여 중신으로 높인다.
-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
슈르하치의 아들로 아민의 이복동생. 형 아민처럼 누르하치 밑에서는 가망이 없었기에 아민과 같이 조선을 쳤다. 그러나 대대적인 반격에 도하하던 후금군이 녹아내리자, 어떻게든 활로를 열기 위해 정람기를 닦달해 철기 돌격을 했지만 장창방진에 충돌해 큰 피해를 보고 거기에 총탄 세례까지 받으며 귀 하나가 총알에 날아가고 양팔이 부러진 채로 별장 김준룡과 조선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참고로 아민은 도하 과정에서 싸워야 한다고 악을쓰다가 폭발에 휘말려 기절해있다가 포로가 되어버렸던지라 그래도 장창방진 코앞까지 선봉에서 돌격해 용감히 싸우다 쓰러진 지르갈랑이 더 대장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원역사에서 홍타이지의 견제에도 뛰어난 군재로 인정받아 후일 순치제의 후견인으로 사실상 섭정직까지 누리며 권세를 잡은 걸물. 누르하치의 적자이지만 쟁쟁한 이복형들에 비해선 성년도 안된 소년이었기에 제위 경쟁에는 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복형 아바타이가 어머니 아바하이와 연합해 조선 원정에서 홍타이지가 대패한 사이 심양을 점령하고 도르곤을 옹립해준 덕에 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아바타이가 금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망명해버리면서 젊은 나이에 실권을 쥐고 직접 통치를 시작한다. 나라 자체가 고질적인 식량난에 시달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몸소 접경지에서 수천의 병력을 몰고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고 있는데 어린 나이에도 원역사의 재능은 어디 가지 않아 홍타이지를 물고 늘어지며 일진일퇴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다.[22] 이 상태로 세력 규합 시기가 길어진다면 확실하게 홍타이지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겠지만 그 전에 홍타이지가 전면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아 위기감을 느끼고 조선산 밀수상단과 접촉해 조선과 밀약을 맺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조선은 홍타이지를 선택했고,[23] 조선의 물자 지원을 통해 군을 보전한 홍타이지가 다시 공세를 취하자 밀리기 시작해 선양까지 후퇴해 최후의 공성전을 벌인 끝에 사망한다.[24]
-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홍타이지의 장남. 홍타이지가 누르하치를 제거하고 후금의 한을 자칭하자 사실상의 세자가 되었다. 그렇게 기세좋게 부친과 함께 조선 원정을 떠났으나 결과는 비참해 양백기와 양람기 2만이 넘는 팔기가 전멸하고, 다른 팔기도 상당한 손실을 입은데다가 몽골팔기와 야인여진, 한족 병력까지 대거 손실하는 참패로 끝났다.
결국 아바타이와 아바하이, 도르곤이 장악한 심양 후금과 수년간의 지리한 내전을 거친 끝에 부친 홍타이지가 조선에 굴복해 목줄을 차고서야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과 연합해 철옹성인 산해관을 거치지 않고 조선 수군의 배를 타고 등주를 통해 상륙한다. 약속대로 자신들이 정복할 토지를 한뼘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악을 썼으나, 하필 진광부가 건 미끼 작전에 홍타이지가 전사하면서 참패하고 만다. 이때 원정군에 속한 한족들이 전부 도망쳐버린지라 남은 팔기 잔존병만으로는 세력이 너무 작아서 땅을 얻지도 못하고 조선군한테 애원하듯이 부탁해 얻은 진광부의 수급과 등래군의 군량만 가지고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홍타이지의 뒤를 이어 3대 금한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어려운 금나라의 사정과 밑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권위 탓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죽을 때까지 막연히 내정만 돌볼 수도 없으니 선선대 누르하치와 부친 홍타이지처럼 어떻게든 군사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감히 조선을 친다는 건 꿈에도 못할 소리였으며[25], 북쪽의 몽골, 동쪽의 야인여진들은 조선 원정 실패와 만주 내전 이후 금의 지배에서 이탈했으나 이제는 미개한 야만족에 불과하니 이제와서 재차 정벌한들 본전이나 나올까 싶은 족속들이었다. 결국 선대들이 그랬고, 불행히 실패한 것처럼 다시 중원 정벌을 결심한다. 하지만 금나라는 이제 혼자서 원정으로 대군을 움직일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후원자인 조선에 간절한 제안을 건네게 된다. 조선에서는 이미 내주와 비사성을 먹었는데 굳이 또 무리를 해야 하는지로 갑론을박이 일었으나 때마침 이자성이 세운 순나라가 제국을 자청하며 오만하게 나온 덕에 기존에 홍타이지와 약조한 대로의 북직례 정복 계획이 다시 세워지면서 재기할 기회를 얻는다.
결국 이자성의 순나라가 무너지면서 북경 점령에 성공하며 화북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자신들의 본래 거점이던 요동을 아예 버리다시피 해서 조선의 손에 넘어가게 하고 북경을 수도로 삼아 화북에 눌러 앉으려 하는데 이는 원역사에 비해 후금의 인력도, 신하들도 너무나도 많이 줄어들었기에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요동을 지킬 여력도 없었기 때문.[26] 실제로 점령한 화북도 이미 넝마투성이가 된 걸 남은 최정예 팔기의 힘으로 넝마투성이 화북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화북 지방, 특히 북경은 이미 여러번 초토화당하면서 반죽음당한 도시였고,[27] 결국 한간 관리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인내심이 끝장난 호오거와 팔기는 북경을 제대로 아작 내버린 채 요동으로 돌아와 평생 조선의 속국이 된다.
- 아이신기오로 라이무부
누르하치의 13남. 원 역사에서는 이복형 아지거와 같이 청군의 지휘관으로 활약하다가, 1642년에 홍타이지의 눈 밖에 나는 실수를 저질러 권력의 중심축에서 밀려났던 인물이다.
본작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으나, 홍타이지의 허무한 사망 이후 몇 남지 않은 숙부 중 한명으로 견제를 받아 군부에서 강제로 은퇴당했다.[28] 북경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갇혀사는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고 있었으나, 한간 관리들의 이간 계획을[29] 눈치챈 조선에서 그에게 대신 나설 것을 주문했고 이에 재기하기 위해서 호거에게 이 정보를 고변. 팔기 친위대를 이끌고 북경의 한간과 민간인들을 대학살하면서 북경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4.4. 일본
- 야나가와 시게오키
과거 대마도의 주요 가신이었으나, 대마도에서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의 외교관계를 왜곡하면서 이득을 챙기는 것을 고변했다가[30] 양측에서 토사구팽당한 인물. 대마도주 자리를 노리고 저지른 고변이었으나, 막부 입장에서도 굳이 전비를 들여서 도주를 갈아치워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말 그대로 대마도의 부끄러운 약점을 들추는 상징으로서 에도에서 죽은 것마냥 살고 있었다.
자신을 목줄 채우고 외면하는 막부를 증오하면서 하루하루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일본에 먼저 분란의 씨앗을 뿌릴 요량으로 그에게 접근한다. 이에 어차피 배신은 대마도와 막부가 먼저 했다고 여기며 조선의 후원으로 낭인들을 모아 만든 군대를 이끌고 종씨 가문을 공격해 도주를 죽여버린다. 그렇게 대마도의 주인이 되지만, 목숨걸고 싸워준 낭인출신 부하들도 다 조선의 후원 덕이고, 이제 자신을 못마땅히 여길 막부에게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에 충성한다.
5. 개변된 역사
- 조선 북방군의 확충 및 개혁
방군수포와 대립제의 문란으로 약체화된 조선 북방군이 최소 수천, 최대 만명 단위로 강화되었으며[31] 한명련, 김충선, 장만, 정충신이 중용되면서 실전 전투력은 머릿 수 이상으로 상승한다. 피역자들 수천명 이상이 체포되어 강제로 북방에서 병역을 다시 치르게 되었기 때문. 가도에서 모문룡을 잡고서 노획한 홍이포의 조선식 개량형인 소 홍이포와 장만 은퇴 후 개발된 대형 포인 낙서포의 도입으로 조선 북방군은 그야말로 초대형 포병대가 된다. 임진왜란의 장수인 김충선에게 장창방진을 도입하면서 장창부대가 호위하는 홍이포 포병대의 막강한 화력과, 적을 공격하는 조선기병대의 시너지를 최대로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개혁의 효용은 후금의 명장 아민이 이끌던 6천명의 팔기 기병대가 도하하고서도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수천명이 녹아내리는 것으로 입증된다. 홍타이지는 조선과 싸우기 위해서 장창방진을 무너뜨릴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 안산공방전 발발과 후금의 요동 통제력 약화
조선의 아민과 정람기 격퇴에 명에서도 요동을 수복하기 위해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자는 의견이 주류가 되었다. 조선에도 재차 연합할 것을 요구하지만 인조는 얼마 전 압록강에서 벌어진 전투로 조선의 재원이 한계라고 핑계를 댄 후 기병을 상대하기에 좋다고 장창을 은자 1만냥에 넘겨준다. 요동총병 마세룡은 결국 황명에 떠밀려 오만 대군을 몰고 사지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출병하지만.... 요양에서 30킬로밖에 안 떨어진 안산까지 저항없이 진군에 성공한다.
이는 조선에서 북방군 수만명을 압록강 인근까지 움직여 요새를 짓고, 군사훈련을 진행하는 강도 높은 도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정람기의 경우로 조선이 어중간한 병력으론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누르하치는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후금의 총력인 10만 대군을 몰고 압록강에서 조선군과 대치하던 것. 그런 와중에 난데없이 요동이 뒤집어졌으니, 누르하치 입장에서도 환장할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긴급하게 몰아온 병력이 너무 지쳤으니 후발대와 합류해 명군을 전멸시킬 작정이었으나, 안산성의 마세룡이 후금군의 체력 문제를 눈치채고 명군을 앞세워 기습 선공을 가해온다. 천하의 후금이지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이어온 상태에서는 죽을 각오의 명군을 당할 수 없었고, 의외로 구식으로 운용되던 명군의 장창방진도 지친 기병대의 정면공격이나 유연한 기동을 제한하는 유효한 효과가 있었다. 결국 누르하치가 직접 깃발까지 흔들며 군을 독려한 끝에 수적으로 불리하던 명군은 결국 패배해 전멸하지만, 후금군 역시 수만 단위의 손실과 요양 내의 한족 봉기로 인해 큰 피해를 본다.
화재와 봉기로 반파된 요양성과 초토화까지 간 안산 등 요양 인근이 수도로서 기능을 상실했기에 후금은 결국 수도를 다시 심양성으로 옮기고, 몽골 초원까지 나아가 릭단 칸의 코르친 부를 패배시키고 몽골 전사들을 군에 편입하는 극도의 강행군을 벌이고서야 어느정도 손해를 벌충할 수 있었다.
- 조선과 청의 전면전
안산 공방전과 몽골 초원 평정이 끝나고 난 뒤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대치를 완화하고 현상 유지 모드에 들어간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이런 누르하치의 모습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는데 안산 공방전으로 벌어진 손해를 몽골 초원 평정으로 간신히 만회해놓고는 그대로 다시 심양으로 돌아온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한 것이다.[32] 이에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설득해 조선에 사신을 보내서 청의 황제 즉위식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전쟁명분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누르하치는 아무리봐도 조선을 공격할 생각은 없어보였고, 조선 역시 청을 후금처럼 일관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존중하는 번국 하나 없는 제국이란 외교적 고립과 국제적 망신에 불과하고, 나날이 강성해지는 조선군을 보면서 조선과 청은 언젠가 충돌할 것임을 확신한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따라서는 청은 점차 약해질 뿐이라고 결론내리고 모반을 일으켜 다른 사대 패륵과 누르하치를 일거에 숙청한다.
그렇게 후금의 한 자리를 찬탈한 홍타이지는 언젠가 싸울거라면 선제공격이 정답이라 여기고 그대로 선전포고도 명분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채 조선을 공격한다. 만주팔기만 무려 4만 이상. 야인여진, 몽골기병과 한인 보군도 그 이상으로 동원해 최소 7~8만, 최대 10만여명의 대군이 움직인 총력전이었다.
이 때 조선에서는 팔기의 주력 침공로로 원 역사와 같이 평야와 길이 정비된 평안도를 예상했지만 함경도 산맥지대를 우회하는 전략을 간과했고 실제로 청군도 이 헛점을 정확히 찔러 1만 기 이상의 팔기로 함경도 북방 온성을 침공한다. 북병사 한명련이 포병과 기병을 데리고 합류하나 함경 온성은 팔기의 정람기가 주력에 야인여진 군세가 합세한 2만명의 후금군에게 포위를 당한다. 한명련은 포위를 뚫고 백성들과 잔존 병력이나마 탈출시키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해 후금군을 향해 돌격했고, 그대로 전사했으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남병사가 끌고 온 원군은 와해된 후금군이 유지하지도 못한[33] 온성을 손쉽게 탈환한다.
주력은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하는 팔기 본대가 출진했으며 선봉으로서 처음 압록강을 넘는 것은 야인여진, 몽골기병, 요동의 명인들로 이루어진 외인 부대였다. 홍타이지가 조선의 화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보낸 그들은 정예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나 수는 수만 명을 넘어서는 막강한 전력이었고 조선의 압록강 요새에서는 곧 강이 피로 물드는 참혹한 전투가 벌어진다.
그러나 조선의 창, 총, 활로 구성된 삼수대는 도하해오는 몽골기병들을 압도한다. 도원수 김충선과 제장들 역시 홍타이지가 총알받이로 외인부대를 먼저 보낸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격렬히 반격하면서 청군의 도하작전은 시간과 인력만 소모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껏 확보한 한족의 대포와 포술도 조선군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서 생각만큼의 효과는 없었고 팔기보다 앞서 도하한 몽골 기병들이 김충선의 전략에 완전히 섬멸당했으나 이마저도 미끼였고 곧 2만명의 팔기가 별동대로 도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북방군의 후방에 도착한 팔기의 수는 1만명 정도였고, 다른 1만 기병대는 한양으로 간 상황이었다. 홍타이지의 전략은 바로 여진족의 기동성을 십분활용한 각개격파와 포위섬멸이었다. 정예하고 강력한 조선 북방군을 전면의 몽골군, 후방의 팔기로 감싸서 포위섬멸할 작정이었던 것. 김충선은 문화도 혈통도 다른 세가지 세력의 대규모 군세를 이토록 과감하고 능란히 다루는 홍타이지에게 기함했으나, 조선의 창병들은 안산의 명군과는 수준이 달랐다. 장창병들을 앞세운 북방군은 팔기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며 맞섰고, 북방군의 전면에서 압박을 가해야 할 몽골군은 이미 섬멸당한 뒤였다. 홍타이지는 고갈되어버린 몽골군의 전력과, 강 너머에서 분할한 전력을 합쳐서 팔기를 학살하는 북방군을 보면서 의주의 패배, 그리고 남은 1만 팔기만이 승부수임을 깨닫는다.
그래도 무려 1만 명에 달하는 팔기군의 고속 진격은 위협적인지라 조정에서는 비상이 걸리게 되고 곧 수방사가 소집되어 장만과 이완 등 제장들의 지휘 하에 한양 인근에서 팔기군과 전투에 들어간다. 본래 수방사가 내건 어기와 도발에 넘어간 팔기군은 속전속결을 위해서 그대로 밀고 들어오게 되고 빈약한 무장의 속오군 창병을 돌파한 듯 했으나,[34] 이는 미끼 작전으로 돌격한 팔기의 갑주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근중거리에서 쏟아지는 총병 부대의 사격 방진에 부딪히게 되고 포격과 궁시까지 더해지면서 허무하게 전멸한다.
이 전투로 한양 진격군의 주력이던 양백기는 전멸, 정람기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2기 역시 복구 불가능한 수준의 손실을 입었다.[35] 한족 부대와 몽골군 역시 수만 단위로 죽어나갔음은 당연했다. 최소로 잡아도 팔기만 3만 기 가까이 잃고, 한족과 야인여진, 몽골기병까지 합치며 5만명은 넘는 청군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심지어 홍타이지의 찬탈 직후에 벌어진 전쟁인 것을 생각하면 이 전쟁은 홍타이지의 명분과 지도력을 지하까지 처박은 패전이었다.[36]
조선에서는 북방군과 수방사를 만주로 보내 청을 끝장낼 것을 권했으나, 인조는 이제 왜란 이전보다 더욱 내실부터 튼튼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거절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청의 통치력이 흔들리는 이 틈을 타 요동과 만주 전역을 뒤흔들기 위한 첩보전을 개시한다. 많은 한족과 여진 유민들을 통해 청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청에서는 이미 인조의 예상대로 분열이 터지고 있었다. 홍타이지의 찬탈 당일. 사패륵들이 죽어나가는 참에도 병력을 끌고 심양성을 벗어난 아바타이가 홍타이지가 압록강에 친정한 사이에 누르하치의 정실부인인 '아바하이'와 야합해 거병한 것이다.[37] 아바타이는 아직 소년인 도르곤을 적법한 한으로 내세우면서 심양과 그 일대를 점령해버린다. 홍타이지는 분통을 터뜨렸으나, 원정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압록강 너머에서 손실하고 패전한 차에 또 큰 전쟁을 벌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결국 홍타이지는 어떻게든 요동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직 재건이 덜된 요양성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이후 후금은 도르곤의 선양 후금과 홍타이지의 요양 후금으로 두동강 나게 된다.
이 내전은 수년간 이어졌으나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끝에 조선에 굴복해 목줄을 찬 홍타이지의 승리로 끝난다. 그 과정에서 남이곤의 충동질에 넘어간 명나라가 고작 1만명의 군대를 영원성 너머로 보냈다가 홍타이지의 기습에 전멸하면서 명나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더욱 수렁에 빠진다.
- 조선의 강역 확장
후금의 내전으로 요동은 만주족의 인력과 자원을 빨아들여 막무가내로 소모시키는 각축장이 되었고, 조선은 그 후방에서 홍타이지를 지원해 요동의 정세를 제어할 수 있는 주도권자가 되었다. 선양을 옥죄기 시작해 우위를 차지한 요양 후금의 제도, 토지, 경제적인 잠식에 성공하고 있는데다가 후금의 수군이 빈약하다고는 하나 당당하게 요동 남쪽의 항구인 비사성 일대를 조차받으면서 강역 확장까지 이룬다. 요양 후금은 얼마 전까지 선양 후금에 눌리던 상황이라 조선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으며, 거절해야 한다는 위기감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후금은 조금씩이나마 안정을 찾으면서 조선 상계와 군부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한편 조선 내에서도 국뽕에 빠진 정복론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한다.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왜란의 피해와 후금의 등장으로 휘청이던 조선이 단 10년도 되지 않아서 명나라를 압도하던 후금을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지역강국으로 부상한 덕이었다.[38] 정작 제대로 된 고위 실무자들은 요동의 상황과 쌓인 업무를 보고 있었기에 확장론에 회의적이었지만 이들은 조선의 강역 확장이 없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지난 전면전에서 요동에 직접 쳐들어가지 않은 것을 불만스러워했을 정도. 이들은 점차 인조에게 몇번이나 상소를 올리며 목소리를 키워갔고, 의정부에서도 이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당시 명나라는 등주(산둥반도)가 후금에게 쫓겨난 요동군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부패한 명나라 조정이 패전한 병사들을 챙겨줄 리가 없었고 오랜 빈곤함에 지친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지방 관리와 군사들을 내쫓고 등주를 장악. 스스로 등래대원수를 자칭하며 서북쪽 토사의 난에 맞먹는 명나라 내부의 우환으로 전락해있었다. 조선 역시 이로 인해 명나라와의 무역이나 외교 창구가 막혀버려 곤란하던 차, 삼정승들은 이런 앞뒤모르는 여론을 이용하기로 계획한다.
최종적으로 조선은 등래대원수를 토벌하고 등주(산둥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장벽을 쌓았으며, 남명은 장강 이남으로 후퇴해 등주를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요동 남쪽도 차지해 금나라를 대륙에 가둔다.
- 등래대원수의 등장
후금에게 쫓겨난 요동명군은 그대로 등주에 방치되었다. 이들은 비록 패잔병이라고는 하나 후금의 여진기병들을 상대하며 경험을 쌓은 강병이었으나 부패한 명나라 조정에선 이들을 재기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축재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방치당한 요동군은 점차 증오를 쌓아갔으며, 등주 명인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그렇게 등주 사람들과 요동군의 마찰이 심해지던 무렵. 결국 일이 터지고 마는데, 시작은 매우 사소했다. 다름아닌 닭은 훔쳐먹은 요동군이 항의하던 유지를 살해해버린 것.
다분히 충동적인 사건이었으나 요동군은 올 것이 왔다는 것마냥 무장을 들고 일어나 그대로 등주의 명군을 제압하고 등주를 장악한다. 그렇게 등주=산동성을 거의 정복한 등래반란군은 명나라에게 후금 이후 최대의 위협이 되었다. 적어도 서부의 사천 이자성 반군은 장안 방어선에서 막고 있었지만 산동에서 북경은 너무도 가까웠다.
명나라는 결국 조선에게 산동성의 이권을 인정해주고 원군 파병을 요청한다. 인조는 곤란해했다. 조선군이 등래군 따위보다 훨씬 강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수만에 달하는 군을 상대하려면 조선도 만 단위의 군이 가야 할 텐데, 조선에 그 정도 여력은 없었다. 이에 인조는 내전 이후 반 죽어가는 후금의 홍태주에게 손을 내민다.
홍태주는 조선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있었으나, 주저않고 손을 맞잡았다. 어차피 치열한 내전으로 초토화된 요동과 만주였다. 이대로는 죽을 때까지 내정이나 돌보면서 늙어갈 것이 뻔했고, 남은 여력으로 다시 요서를 도모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강력한 조선 수군의 배를 빌린다면 안정적으로 산동성. 즉 중원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 북경 황폐화
명대 이후 도읍이던 북경이 이자성의 순나라에 의해 1번, 한간 관리들의 금-조 전쟁 조장 계획을 눈치챈 호거의 명령으로 만주팔기에 의해 두번 초토화되면서 도시로서 파탄난다.
[1] 조선의 재벌이 되기로 했다. 내가 왜 이순신이죠. 등을 집필한 기성 작가.[2] 그나마 쓴소리 할 수 있는 자들은 송시열처럼 출사하지 못한 나잇대의 젊은 선비들이다. 그나마도 철이 없고, 영향력이 없어서 가능한거지 출사한 조정 사람이 있으면 다들 욕이나 먹는다.[3] 인조의 동생을 자살하게 몰고 갔고, 인조의 부친인 정원대원군은 이 일로 인한 화병으로 병사했다. 그래서 광해군에게 기용된 인물들에게도 오히려 인조의 처우가 자비롭다는 평가를 받는다.[4] 홍이포의 2차 개조형인데 '낙서'는 장만의 호다.[5] 사실 김충선이 조언해줄 수 있는 일본식 장창전술은 대기병전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조선의 장창 전술은 후방의 포병의 화력 집중을 위해 적을 유도하는 목표가 있어서 유용한 것.[6] 원역사에서도 인조반정 당시까지만 해도 이이의 제자인 이귀가 서인의 영향력이 더 컸지만, 워낙에 성깔이 그랬던 탓에 실질적인 행보는 김류가 훨씬 앞서나갔다.[7] 사실 이건 인조의 계획을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었다. 부패한 북인 출신 풍기군수가 이괄이 달래는데도 지레 겁먹고 패거리인 아전들을 동원해서 칼질을 해왔다. 썩어도 장수라고 만취하고서도 어떻게든 도망쳤으나, 망신을 당하고 이후 이괄은 출세길도 막히자 인조 입장에서도 재활용할 길도 막힌 것.[8] 특히 조카인 사복시정 박성장이 뇌물을 받고 종친들에게 개혁 반대를 주장하자 문중 친척들을 보내서 잡아 죽인다.[9] 김류는 김신국의 능력을 인정해서 넘어갔고, 이귀는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인조는 씹었다(...).[10] 이 때 명나라에서 조선을 반역국으로 의심할 것이라며, 자기가 오해를 풀 수 있다고 필사적으로 발악한다. 조선에서도 죽이고 싶지만 좀 불안했던 건 사실이었떤지라 미리 모문룡이 살려고 부하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게 해서 분열시켜 놓았다.[11] 본 역사에선 산해관에 집중하는 소극방어를 주장한 인물이다. 인조는 오삼계의 배신 이전에는 열리지 않은 산해관이니 틀리진 않았다고 평한다.[12] 조선 장창방진은 후방에 막강한 포병부대를 배치해서 기병들이 방진을 공략할 것을 강제하지만 명은 그런 교리가 없이, 기존처럼 적 보병을 견제하는 식이었다.[13] 누르하치와 후금은 손해 벌충을 위해 몽골원정을 앞당겨야 했고, 이 사태로 조선을 병적으로 경계하게 된 홍타이지는 몽골에 이어 바로 조선과 연전을 벌인 끝에 패배한다.[14] 등래대원수를 자칭하기 시작한 요동군 중심의 등주 반란. 왕가윤이 홍승주와 치고받으며 점차 기세를 올리는 섬서의 내주 반란 진압을 요구하고 있었다.[15] 당시 전황상 조선이 기둥 뿌리 뽑아가면 후금 원정해야 명나라가 살아날 수준이었다.[16] 본래라면 청나라로 불려야겠지만, 청을 개국한 이후 전쟁에서 대패하면서 흑역사가 된 지라, 은근슬쩍 금나라로 돌아온다.[17] 엄밀히 말해 최종보스가 맞긴 하다. 작중에서 홍타이지와의 전쟁 이후 조선을 위협하는 대적은 없어졌기 때문.[18] 함경에서는 한명련의 결사대에 의해 온성에서 막혔으며, 평안도의 주공에서만 팔기 2만 이상, 외인 부대 역시 그 이상으로 소모했다.[19] 여담으로 조선과 전쟁을 벌인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면서도 후회하며 악몽을 꾼다고 자주 언급하는데, 은근슬쩍 조선왕이 처음부터 자신을 손바닥 위에 가지고 놀았다고 기억을 개찬한다(...) 심지어 자신이 아바타이까지 속이고 조선에 방문해 조선 왕실을 기겁시킨 기억조차도 조선왕이 자신을 압박했다고 회상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준다.[20] 조선에서 물자를 핑계로 남부의 성과 항구를 조차하고, 내부에 자신의 사람을 심고, 권고를 핑계로 내정에도 조언을 하고 있다.[21] 위험하다는 자송합에게 싸우라고 악을 써서 앞으로 보낸 직후 홍이포의 포격에 휘말려 기절해있다가 잡힌다. 동생은 창진에 유의미한 돌격까지 했기에 조선군이 동생과 비교하며 비웃자 수치심에 혀를 깨물어 자살하려 했다가 김준룡이 아슬아슬하게 입을 막는다.[22] 특히 요서 인근의 영향권과, 남쪽 접경지에서 벌이는 경쟁에선 오히려 앞서기 시작했다고 한다.[23] 도르곤은 군사능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요하 일대를 통일한다면 나이도 젊은 그에게 오히려 조선이 휘둘릴 여지가 있었다.[24] 묘사를 보면 최후엔 직접 칼로 자결했을 걸로 보인다.[25] 조선에 빌붙어 금나라를 본체만체 하며 뱃속만 챙기는 압록강, 비사성 지역의 여진 부족과 한족들조차 조선이 불편해할까봐 건들 생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조선과의 완충지대 역할도 조금은 해주기에 그들이 그대로 있어주길 바란다는 감상까지 남겼다.[26] 그리고 조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발악이기도 했다.[27] 이자성의 순나라군, 후금의 팔기에게 여러차례 학살과 약탈을 당했다. 고향을 버리고 싶지 않은 주민들이 어떻게든 버티기는 했지만 그들도 한계였다.[28] 홍타이지 사망 당시 금려팔기 지휘관이던 탓에 한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막을 수 없었다.[29] 후금이 조선의 발해만 방벽 건설을 막고 싸움을 붙이려 호격에게 반조선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호격도 바보는 아니어서 흔들리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자기들이 군사장비를 모아서 전쟁을 조장했다.[30] 대마도의 외교 관련 사기극은 정말로 화려하다.[31] 사실 북방군은 조선의 전통적인 정예전력이었기 때문에, 이괄의 난만 아니었어도 최소한 국경에서 평양까지 보름만에 뚫릴 수준으로 붕괴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32] 그대로 남하해 명의 북방 국경을 치거나, 요동 복귀 후 그 기세로 조선을 쳤어야 했다고.[33] 야인여진 혼성군이 안개와 한명련의 야습으로 혼란에 빠진 전장을 막무가내로 탈출하는 바람에 후금군이 온성을 점거하지 못했다. 설령 온성을 점거했다고 한들 그쪽 길로는 평안도의 주력군과 합류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걸린다.[34] 이들은 면천과 지원을 약속받은 천민 속오군이 대부분이었기에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인조는 후일 약속대로 이들 모두를 면천해주고 반대하는 양반들은 김류를 시켜 제압한다.[35] 북방군의 후방을 치려다가 반격당해 괴멸한 쪽이 정람기, 함경도 전선으로 갔다가 무너진 쪽만 최소 2기다.[36] 인조는 이제 홍타이지는 이 피해복구에 전념해도 천운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용을 써야 가능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팔기 2만 명 이상의 사망만 해도 엄청난 타격이고, 반정까지 벌이고는 정복한 모든 산하세력이 보는 앞에서 실패한 것이 컸다.[37] 후일 청나라의 실권을 쥔 거물 도르곤의 친모. 홍타이지에 의해 순장당하는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38] 왜란 직후에도 노토부락 토벌전으로 야인여진을 몰락시킨 전력이 있었으니, 그 기억이 남아있는 조선인들에게는 그냥 국뽕이 아니라 명백한 운명 정도로 느껴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