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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1:49:23

이와테현 오후나토선 공사장 학살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배경3. 동맹 파업4. 합의 파기5. 학살6. 사후 전개7. 기타

1. 개요

1932년 5월 4일, 일본 이와테현岩手縣 게센군氣仙郡 야하기촌失作村오후나토선 철도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학살 및 폭동적 시위진압 사건.[1]

2. 배경

1906년 일본은 철도국유법에 근거해 17개의 사설철도를 국유화했지만, 지방 철도를 새로 부설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1910년 기존의 사설철도법을 완화하는 경편철도법軽便鉄道法을 재정하여 기존보다 낮은 규격으로 설비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일정 수익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민간 자본을 끌어들였다. 이듬해에는 국유철도도 해당 법령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개정하면서 예산은 향후 법령의 개정여부와 상관없이 1929년도까지 확보했다. 오후나토선大船渡線은 1925년 공사를 시작한 까닭에 국유철도이면서 경편철도법의 혜택을 받았다.[2]

1931년 야하기촌 주변에는 이치노세키역사카리역을 잇는 공사가 3개 구역으로 나뉘어 한국인 노동자 600명과 일본인 노동자 300명이 종사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1929.09.17~2023.10.29) 교수가 이끌었던 「토호쿠지방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東北地方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 산하 이와테지역조사반岩手班 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강요받았고 일본 평균 일당 1엔 30전에 못미치는 80전을 받았다. 또한 각종 소모품을 강매당하여 실수령액은 훨씬 적었다.[3]
조선인의 생활은, 거적때기에 누워 자는 동물 취급을 받는 끔찍한 세계였어.
당시 현장 인부 칸노 세이간菅野青顔의 증언[4]

3. 동맹 파업

1932년 4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労働組合全国協議会 소속 구순암具順岩과 정순옥鄭順玉 등이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노조상임위원회는 현지 지도를 위해 강유홍姜有鴻 · 김범이金凡伊 2인을 파견했다.[5][6]

같은해 4월 26일 공사 현장에 분포한 간이숙소飯場를 거점으로 한국인 60여명과 일본인 4명이 참가한 '동맹파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10시간 노동, 임금 30% 인상, 부상수당 지급, 해고 반대 등 총 8개 조항을 요구하였고, 동년 동월 28일 약 200명의 노동자들이 오전 7시경부터 작업을 중지하고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노동자들을 대리하여 9명으로 구성된 교섭위원들이 아이다쿠미有田組와 협상에 임하였고 사측이 8개 중 6개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면서 양측은 합의서에 조인했다. 이후 파업 지도부는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하여 논의했다.[7][8][9]

4. 합의 파기

같은해 5월 2일 아이다쿠미는 공사 현장에 분포한 간이숙소를 중심으로 일본인 노동자들을 소집하여 협상 결과를 알리면서 '부상수당 지급, 해고 반대' 등의 내용으로 그들을 자극했다. 애초에 동맹파업은 일본인도 참가한 쟁의였으며, 해당 합의사항은 한일 노동자 모두 수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이다쿠미는 다이나마이트, 곡괭이 등 살상력을 가진 작업 도구를 흉기로 지급하면서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10]

5. 학살

같은해 5월 4일, 오후 5시 무장한 일본인들은 공사 현장 내 4~5 ㎞ 흩어져 있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간이숙소 중 특별 수당을 요구했던 인물을 찾아내어 폭행을 가했다. 강유홍도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으나 탈출하여 관할 야하기 주재소에 신고했지만 묵살당했고, 인근 병원은 그에 대한 치료를 거부했다. 이후 강유홍은 공사 현장 내 간이식당(함바) '모찌야餅屋'에서 김범이, 구순암, 정순옥 등과 대책을 숙의하던 중 오후 8시 30분 재차 일본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강유홍, 구순암, 정순옥 3인이 피살되었고 김범이는 중상을 입었다. 이들 외 한국인 노동자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나머지 한국인들은 인근 숲속으로 대피했으나 이들에 대한 추적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일본인 가담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조선인을 죽여라朝鮮人を殺せ」라고 외치는 등 특정 개인이 아니라 한민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사카리경찰서(현 오후나토 경찰서 大船渡警察署)에서 출동한 경찰 병력은 한국인 81명을 일본인을 습격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11][12][13]

6. 사후 전개

같은해 5월 6일 사망한 세 사람의 주검은 검사의 입회 아래 부검을 거쳐 동년 동월 8일 오후 2시 가매장되었다. 같은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노조상임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이와테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동년 동월 9일 조사원 4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또한 해방운동희생자구원변호사단解放運動犧牲者救援辯護團은 해당 사건에 대한 법률지원을 제공하여 가해집단 중 53명에 대하여 살인죄, 소요죄, 상해죄 혐의를 적용한 기소를 이끌어냈다.[14][15]

모리오카지방재판소盛岡地方裁判所에서 개시한 공판에서 피고측은 한국인이 흉폭하게 행동하여 정당방위 차원에서 저지른 행위였음을 강조했다. 피고측 변호인은 「군중심리에 의해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이었으며, 피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공산당 계열이므로 피고인들에 대하여 집행유예가 합당하다」 라는 취지로 변론했다.[16]
(원청 회사인 아이다구미가) '허위 증언을 하라'고 하는 거야. '조선인에게 먼저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이 쪽도 습격했다'라고 증언하라는 거야.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다는데, 돈을 받았으니 어쩌겠어.
당시 현장 인부(성명 미공개)의 사후증언[17]

1933년 1월 재판부는 피고인 53명 중 29명에게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나머지 24명에게 벌금형을 각각 선고했다. 그러나 살인의 고의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다쿠미는 이와테사건대책위원회에게 부상자와 조합이 입은 피해에 대한 위문금을 지급했다. 또한 경찰을 통해 사망자의 유족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유족의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해 실제로 전달되지는 않았다.[18][19][20]

7. 기타


[1] 현 리쿠젠타카타시陸前高田市 야하기정矢作町[2] 軽便鉄道法, 明治43年4月21日法律第57号[3] '関東大震災から9年後、虐殺は「平時」にも起きていた', 安田 菜津紀, Dialogue for People 2024.1.4[4] 朝鮮人の生活は、むしろに寝かされて――動物扱いで、ものすごい世界だったんだ。《三陸の鉄路 その光と陰》, 小野寺教郎,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5] '재외한인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일본 지역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임영언(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6] '200206 훈장미전수자 명단(일본)',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7] '강유홍姜有鴻', '구순암具順岩', '정순옥鄭順玉',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8] '岩手県大船渡線鉄道工事場スト', 法政大学大原社会問題研[9] '이와대현 조선인 학살사건 (岩手縣 朝鮮人 虐殺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10]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1] 일본 공식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은 사망 3명 · 중경상 19명, 일본인은 중경상 3명이다. 일본인 피해자 1명은 한국인과 함께 생활하던 여성이었고, 나머지 2명은 상호간 폭행이었다. 재판 기록에는 신원 미상의 한국인 여성 1명에 대한 성범죄가 기록되어 있다.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2]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13] '矢作事件' ウィキペディア 2023.10.04[14]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5]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16]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7] (元請けの有田組が) “嘘の証言してけろ”って言うんだもの。“朝鮮人に先に攻められたんで、こっちも襲撃した”っつう証言をしろって言うのっさ。謝礼はうんとすっから、と言われたが、そんな金もらっても仕方ねえもの。《三陸の鉄路 その光と陰》, 小野寺教郎,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8]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9]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0] 矢作事件' ウィキペディア 2023.10.04 재인용[21]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22]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3] '구순암具順岩',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4] '강유홍姜有鴻',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5]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26]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7]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28]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 재인용[29]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0] 過酷な現場となったこのあたりのトンネルでは、朝鮮人を“人柱”にしていたとも言いますね。あの頃の朝鮮の人たちは“人扱い”ではなかったと聞いています。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1]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2]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3] 日本が朝鮮に侵略し、朝鮮人に対する差別が関東大震災の事件を起こした。矢作で起きた事件も、同じことですよ。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34]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와 조선', 이규수, 내일을 여는 역사 2020년 봄호(통권 제78호) 2020.3[35]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 재인용[36]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37]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38]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39] '강유홍姜有鴻', '구순암具順岩', '정순옥鄭順玉',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40]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 재인용[41]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42] '大船渡線BRT、4月26日からバス専用道を延伸', レスポンス 2013.03.30[43] 'JR東日本、気仙沼線・大船渡線BRT運行区間の廃止日を4/1に繰上げ', マイナビニュース 2020.01.31[44]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45] '제27회 이와테현 강제징용 조선인 희생자 위령제 참석', 주 센다이 총영사관 2022.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