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軾
(1090 ~ 1151)
1. 개요
고려의 문신. 이정의 손자.2. 생애
본관은 인천으로 선종 7년(1090) 문하시중 이정의 아들 병부낭중 이자효와 강릉군대부인 왕씨의 아들로 태어난다. 음서로 상서호부서령사에 임명되며, 예종 9년(1114) 경령전판관을 지내다 경시서승 시사재주부로 관직을 옮긴다. 인종 2년(1124) 도압아(都押衙)로 북송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권지합문지후에 오른다. 인종 4년(1126) 5촌 당숙 이자겸이 실각한 뒤에는 원흥진의 지방관으로 좌천됐으나 곧 개성부의 수령으로 옮긴다. 수령 임기를 마치고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다시 권지합문지후에 임명됐으며, 전중내급사 상의봉어로 옮긴다.인종 12년(1134) 호부원외랑으로 금나라에 하정사(신년 하례 사절)로 다녀온다. 이듬해 인종 13년(1135)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전군병마판관이 되어 공을 세우고 시어사 우사낭중에 임명된다. 인종 16년(1138) 광주목(廣州牧)의 지방관으로 부임했다가 1년째 되던 해에 다시 지남경유수에 임명돼 남경유수관으로 간다. 임기를 마친 뒤에는 개경에서 이부낭중 겸 태자세마, 조산대부 시위위경, 조의대부 형부상서 겸 선경부첨사 상서좌복야 등을 역임한다.
의종 2년(1148) 금나라 황제의 고려 국왕 책봉에 감사하는 사절로 다녀온다. 의종 5년(1151) 7월 3일(음력)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상서호부사에 오르는데, 이틀 뒤에 62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는다. 의종은 정정(貞靖)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 10년(1156) 우봉군 의룡산에 장사지내졌다.
3. 가족관계
계양공 이위의 딸과 혼인해 슬하에 5남 4녀를 뒀다. 5남 응추는 인종의 왕자 증세승통을 따라 승려가 됐으며, 차녀는 인종 21년(1143)에 죽는다.- 부: 이자효(李資孝)
- 모: 강릉군대부인(江陵郡大夫人) 왕씨[1]
- 본인: 이식
- 부인: 계양군대부인(桂陽郡大夫人) 이씨[2]
- 장남: 이응구(李應求) - 권지합문지후(權知閣門祗候),[3] 판각문(判閣門)[4]
- 손자: 이경(李儆) - 추밀원사(樞密院使)
- 증손자: 이장용(李藏用)
- 차남: 이응칭(李應偁) - 구복원판관(句覆院判官)
- 3남: 이응장(李應璋)[5] - 시합문지후 지개성부사(試閣門祗候 知開城府使)
- 며느리: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 최씨[6]
- 손자: 이빈(李份) - 위위주부(衛尉注簿
- 손자: 이현(李儇) - 상서호부주사(尙書戶部主事)
- 4남: 이응의(李應誼) -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
- 5남: 이응추(李應樞) - 승려
- 장녀: 인천 이씨
- 사위: 김광중(金光中)[7]
- 차녀: 인천 이씨 - 미혼으로 아버지인 이식이 사망하기 13년 전인 인종 21년(1143)에 죽었다.
- 삼녀: 인천 이씨
- 사위: 임원애(任元敱)[8]
- 삼녀: 인천 이씨 - 아버지인 이식이 사망하고 6년 후에 죽었다.
- 사위: 이세광(李世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