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택 Lee Seung-taek | |
<colbgcolor=#343a94> 출생 | 1932년 4월 7일, 함경남도 고원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설치미술가, 조각가, 화가 |
학력 | 홍익대학교 조각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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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0년대에 자코메티의 조각은 인체의 형태나 근육을 배제하고 뼈만 남겼었다.
나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뼈마저 부정하면 뭐가 될까? 그렇다면 형체가 없는 작품 아닌가?
미술은 형체를 주로 다루는 것인데... '형체없는 미술이 가능할까?'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인터뷰 중에서 #
대한민국의 설치미술가. 조각가. 행위예술가. 화가. '한국 전위미술의 선구자'라고 불린다.나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뼈마저 부정하면 뭐가 될까? 그렇다면 형체가 없는 작품 아닌가?
미술은 형체를 주로 다루는 것인데... '형체없는 미술이 가능할까?'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인터뷰 중에서 #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곽인식과 이우환으로 대표되는 60~70년대 당시 한국 미술계의 '물성' 연구를 뒤집어 엎고, 바람, 물, 연기 등을 작품으로 표현한 '비물질(비물성)'의 미술을 세계최초로 시작하였다.
2. 생애
1932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났다. 고원에서 19살 때까지 살다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으로 내려왔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미술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으며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었다고 한다. 1955년 홍익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해서 대학교 2학년 때 '제2회 국전'에 출품할 작품을 심사받았는데, 심사위원들은 받침대 하나에 조각상 2점을 얹은 그의 작품[1]을 거절하였다. 그 뒤로부터 국전의 아카데믹한 심사방식과 미술계 내에서 서울대-홍대 출신들의 암투, 서구 사조 모방에만 혈안이 된 풍토 등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주류 미술계에서부터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아웃사이더에 있으면서도 1956년부터 인천 맥아더 동상과 같은 사실적 조각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여 80여개의 동상, 기념물 등을 건립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의뢰받은 작품이 없는 시간에는 자유로운 실험미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이승택(1932~)은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1950년대 이후 현재까지 설치, 조각, 회화, 사진, 대지미술, 행위미술을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승택, 거꾸로 비미술》은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한국 현대 미술 변화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이승택의 60여 년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조망하고자 마련한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시명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은 모든 사물과 관념을 뒤집어 생각하고, 미술이라고 정의된 고정관념에 도전해온 그의 예술세계를 함축한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은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살았다.’고 하는 작가의 언명에서 잘 드러난다.
이승택은 1950년대 <역사와 시간>을 발표하며 기성 조각의 문법에 도전하였고, 1960년대에는 옹기, 비닐, 유리, 각목, 연탄재 등의 일상 사물들로 새로운 재료 실험에 몰두함으로써 당시 미술 제도 내에서 통용되는 조각 개념과 결별하기 시작한다. 1970년 전후에는 바람, 불, 연기 등 비물질적인 요소들로 작품을 시도하고 장소와 상황을 작품화하였으며, 사물과 자연물을 노끈으로 묶는 ‘묶기’ 작업을 통해 사물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이러한 기성 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예술실험은 1980년 무렵 ‘비조각’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작가는 사회, 역사, 문화, 환경 등 삶의 영역으로 관심의 지평을 확장하면서 퍼포먼스, 대형 설치, 사진 등으로 작업의 영역을 더욱 넓혀나간다.
이번 전시에서는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1960년대 주요 작품들을 재제작해 비조각을 향한 작가의 초기 작업을 새롭게 조명하였고, 1970~80년대 이승택의 주요 설치 작품 <바람>과 <기와 입은 대지> 등을 미술관 야외공간에 재연하여 작품을 신체적으로 경험하도록 하였다. 또한 무속이 이승택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가지는 주요한 의미를 되짚는가 하면, 1960년대 이후 1990년대에 이르는 포토콜라주 및 사진과 회화가 결합된 독특한 사진 작업을 전시하여 이승택 사진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고자 하였다. 물질-비물질, 주체-대상, 근대-전근대, 미술-비미술의 경계를 끊임없이 가로지르며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을 이끌었던 이승택 예술의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예술의 동시대성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재료의 실험: 조각에 대한 질문
1960년대 이승택은 새로운 재료 실험과 파격적인 설치 방식을 통해 당시 미술 제도가 요구한 조각 개념에 도전하였다. 당시 조각의 재료로 인지되지 못했던 전통 옹기에서부터 산업화 신소재였던 유리와 비닐, 일상 오브제인 연탄과 양철, 각목, 시멘트 등을 새로운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재료로 만들어진 작품들을 좌대 없이 바닥에 놓거나, 비정형의 오브제로 천장에 매달거나, 탑 형태로 한 줄로 쌓아 올리는 등의 자유로운 설치 방식을 통해 기성 조각의 문법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비조각을 향한 1960년대 재료 실험은 《신상회》(1962~1963), 《원형회》(1964), 《현대작가초대전》(1968), 《한국현대조각전》(1969), 《A.G전》(1970) 등 당시 새로운 경향의 전시회에 소개되었고, 1971년 국립공보관에서 개최된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기록 사진의 형태로 대거 전시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전시자료 등을 바탕으로 1960년대 주요 작품들을 재제작해 작가의 초기 실험을 새롭게 조명한다.
2. 줄-묶기와 해체: 비조각을 향해
이승택의 작품에서 줄과 노끈을 이용한 ‘묶기’는 사물의 형태와 본성을 뒤집고 낯익은 일상을 전복시키기 위한 비조각을 향한 작가의 주요한 미적 방법론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50~80년대 주요 ‘묶기’ 작업을 대거 선보인다. 1958년 <역사와 시간>에서 오브제에 철조망을 묶는 작업과 함께 1960년대에는 노끈으로 비닐을 감거나 각목을 천으로 이어 묶었다. 1970년대에는 주로 돌, 도자기, 여성 토르소, 책, 지폐, 캔버스 등의 사물을 줄로 묶었으며, 한편으로는 캔버스 위에 노끈을 반복적으로 부착하여 움직임의 시각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묶기 작품들은 공간미술대상(1977), 동아미술상(1978) 등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나뭇가지에 천이나 종이를 감거나 매듭으로 이어진 줄과 막대를 실내공간을 따라 설치하면서 묶기의 행위를 사물에서 공간으로 확장하였다.
묶기의 어법은 고드렛돌이나 새끼줄에 무언가를 엮는 민속적 경험과도 연관되지만, 끈으로 묶은 가상의 흔적을 사물에 아로새겨 착시효과를 줌으로써 시각의 전환을 가져오거나 사물의 숨겨진 이면과 가상의 변형을 유추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역설법’이다. ‘매어진 돌’에서는 가상의 묶인 자국에 의해 돌의 속성이 딱딱함에서 물렁물렁한 것으로 변이하고, ‘매어진 여체’에서 묶음의 흔적은 수축과 팽창의 신체성을 극대화시킨다. 도자기, 책, 고서, 캔버스, 지폐를 묶는다는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문명, 담론, 지식, 예술제도,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적 저항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작가는 캔버스 틀을 해체하여 그 위에 종이를 붙이거나 로프나 지폐 묶음을 풀어헤치는 등, 묶기의 과정을 ‘해체 행위’와 병치시키기도 하였다.
3. 형체 없는 작품
이승택은 1964년, 화판에 불을 붙여 한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그린 드로잉 <무제(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을 제작하며 ‘형체 없는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형체 없는 작품’이란 바람, 불, 연기 등 일종의 자연현상을 작품으로 끌어온 것으로, 뚜렷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시간에 의해 사라진다는 점에서 비정형성과 비물질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이는 조각의 문맥에서 끊임없이 탈주하고자 했던 이승택의 ‘비조각’ 개념의 핵심이다.
‘형체 없는 작품’은 1969년 야외에서 처음 설치된 <바람> 이후, 1970년 홍익대학교 빌딩 사이에 푸른색 천을 한 줄로 매달아 바람에 휘날리게 한 기념비적 작품 <바람>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구체화된다. 이후 1971년, <바람>은 제11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제2회 《A.G전》에 출품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1년 제2회 《A.G전-현실과 실현》에 선보인 <바람> 원작, 1980년대 <바람>(일명 종이나무) 원작을 포함하여 주요‘바람’작품을 대형 설치와 사진 작품 및 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바람’은 나뭇가지에 원색의 천이나 종이를 묶어 바람에 나부끼게 하거나 대형 천을 잡고 바람에 날리도록 하는 등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다양한 변주를 거듭해온 이승택의 대표작으로, 작가의 언급처럼 “비물질적인 소재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노끈과 헝겊, 한지들을 등장시켜 “비시각적인 공기를 시각화”하고자 한 것이다.
비물질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무제(한강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c.1988)이나 《분신행위예술전》(1989)에서 처럼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물성을 지닌 작품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또한‘형체 없는 작품’은 <목구놀이>(1968) 등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제작하지 않고 기존 환경과 시설물에 개입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하는 ‘사유(私有)의 장’ 연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4. 삶·사회·역사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고원에 태어나 한국 전쟁 중에 월남한 이승택은 1958년 한국 분단을 상징화한 <역사와 시간>을 발표한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예술가적 관심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보다 확장되는데, 이 시기 작가는 사회·역사·정치·환경·생태·종교와 성 등 다층적인 삶의 지평을 예술의 문맥으로 끌어온다. 동학운동이나 남북분단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 예술 제도와 문화 권력, 우상화된 종교, 금기시된 성 등은 작가에게 있어 성찰과 동시에 뒤집어 바라보아야 할 역설의 대상이었다. <동족상쟁>을 비롯하여 <권력가들의 최후만찬>, <결국, 예술은 쓰레기가 되었다> 등 1990년대 이후 주요 작품들에서 전위미술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이승택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 1980년대 중반 이후 작가의 관심은 환경과 생태주의를 포괄하는데 ‘이끼 심는 예술가’와 ‘녹색 운동’ 연작, 한국·일본·중국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수행한 ‘지구 행위’ 연작은 훼손된 자연을 치유하고 지구를 되살리고자 하는 생태 회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5. 행위·과정·회화
이승택의 회화는 불을 태워 그 흔적을 작품으로 수용한 ‘그을음 회화’나 물을 흘러내리게 하여 그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물그림’처럼 작가의 행위와 과정, 생동감 있는 삶의 현장성을 중시하는 회화이다. 1989년 《분신행위예술전》과 1992년 카셀에서 진행된 《다른 것들과의 만남전》에서 그림을 현장 제작하고 불태워 그 흔적을 남긴 회화, 1995년 《정림건축 구사옥 해체 이벤트》에서 건물 벽면과 바닥에 깔아놓은 캔버스 천 위로 물감을 흘러내리게 하여 그 흔적을 드리운 물그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파도 이미지를 그린 후 산으로 들고 올라가는 수행적 과정을 통해야만 완성되는 <산정의 바다>는 바다를 산에 환치시키고자 하는 이승택만의 역설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6. 무속과 비조각의 만남
이승택은 1986년 후화랑에서 개인전《이승택 비조각전》을 개최한다. 이 전시회에서 작가는 붉은색과 푸른색, 검은색의 천들과 노끈으로 묶은 기둥 막대 등을 벽에 걸거나 바닥에 놓은 설치 작업을 주로 선보이며, 기이하면서도 섬뜩한 무속적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 전시회 도록에 작가는‘무속과 비조각의 만남’이라는 글을 게재하는데, 작가에 따르면 작품에서 사용한 푸른색과 붉은색은 남과 여, 물과 불, 하늘과 땅의 음양 사상을 의미하며, 검은색과 붉은색은 옛 서민들의 이불에서 가난과 한(恨)이 배어있는 풍토색에서 인용한 것이고, 붉은 그림은 불길한 죽음이나 저승의 문턱을 은유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6년 당시 개인전을 원작을 중심으로 재연하여 삶의 한 부분으로 이어져 온 무속의 세계가 이승택의 작품세계 전반에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살핀다. 이승택은 일찍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생각으로 전통, 설화, 민속, 무속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켜왔고 한국의 민속품, 고드렛돌, 석탑, 옹기, 성황당, 항아리, 기와 등의 재래적인 모티브를 작업으로 끌어들여 비조각의 근원으로 삼았다. 1950년대 제작한 <설화>는 전통 장승을 소재로 한 것이며, 1960년대 제작한 오지 작품은 전통적인 항아리나 장독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고, 1970년대 주요 작품인 <바람> 연작은 전통 풍습에서 오는 바다 풍어제의 울긋불긋한 깃발 형태나 성황당에 매달린 천 조각의 휘날림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승택 작업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무속의 에너지는 서구의 근대 조각 개념을 탈피하여 비조각의 세계, 작가가 ‘거꾸로’라고 명명한 이질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근원이었다.
7. 사진과 회화 사이
1960년대 이후 이승택은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넘어 인화된 사진 위에 다른 사진을 콜라주하거나 페인팅을 가하면서 사진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1971년 첫 개인전 주요 전시작품이 사진이었던 만큼, 사진이라는 매체는 작가에게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배경 공간과 이미지를 합성하여 포토몽타주와 같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작품의 크기를 명확히 하거나 혹은 과장하기 위해 본인이 사진의 앵글 속으로 들어가 공간에 현장성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작가는 <폭포 그림>이나 <모래 위에 파도 그림>처럼 산이나 바다에서 퍼포먼스를 촬영한 후 프린트된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린 일명 사진-회화를 대거 제작한다. 이러한 사진은 작가가 구상한 미완의 프로젝트를 실현시켜주는 가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사진 위에 다른 이미지를 결합한 이승택의 사진은 두 개의 이질적 이미지의 충돌이 야기하는 낯선 효과를 만들어낸다. 예로, 쌓아 놓은 나뭇더미를 촬영한 후 그 위에 색을 덧입힌 <예술가의 별장>은 평범한 일상의 장면을 개념적인 예술의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사진과 회화, 사실과 허구를 병치시킨 그의 독특한 사진 작업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되묻는 작가만의 ‘거꾸로 미학’을 함축하고 있다.
- 국립현대 미술관 내용 발췌 -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30
3. 작품
3.1. 고인돌에 링거 설치
3.2. 고드렛돌
3.3. 무제(1968)
3.4. 묶기
3.5.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
3.6. 바람
3.7. 역사와 시간
3.8. 폭포 그림
4. 관련 동영상
5. 여담
- 이승택은 그동안 자신의 작업 세계를 알아보지 못했던 평단에 대해 "무식하니 알아볼 수가 있나"라고 말했고, 국내 화단에 대해서는 "한국 작가들의 의식 수준은 형편없고 머리는 텅 비었다"고 말했다. #
관련 기사를 쓴 기자가 기분이 상했는지, '작품은 그닥 파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다'고 평가를 했는데, 2014년도에 적은 기사라 아직 이승택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파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그 작품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로서[2] 서양의 사유체계에 속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작품이 다시 보였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너도나도 저런 작품을 만드니 신선하게 보이지 않은 건 당연하다. 물론 기자이긴 하나, 이승택의 말대로 "무식하니 알아볼 수가 있나"가 맞는 말인듯..
- 본인 작품이나 자코메티 정도만 빼고, 한국 미술가, 작가, 기자, 교수 등 관련 종사자들을 모두 까버리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에 미운털이 좀 박혀있다. 다만, 매번 일관되게 다 까버리니까 최근에는 관련업계 종사자들도 면역이 생겼는지, 차츰 인정할 건 인정해주자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한국 미술계로부터 홀대 받은 것도 사실이고 나이도 있으시고 이러니, 원로 작가 대우로서 고려하는 부분도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