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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각(1887)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광촌(李廣村)
자 / 호 계주(季周) / 긍재(兢齋)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출생 1887년[2] 11월 20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상매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3]
사망 1963년 2월 9일[4]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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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수각은 1887년 11월 20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상매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아버지 이규영(李圭榮)[5]과 어머니 연안 이씨 이성연(李性淵)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왜관면 왜관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 문중에서 설립한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4년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칠곡도호부 지역에서도 동학농민운동군의 봉기가 있었다. 이때 부인 벽진 이씨[6]가 시집 올 때 지참한 패물을 비롯해 일부 가산을 처분하여 동학농민운동군에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또 대한제국 시기에는 문중 내에 야학당을 개설하고 『사민필지(士民必知)』·『중등만국신지지(中等萬國新地志)』 등의 신학문 교재를 구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외숙부 이명균(李明均)과 이동하(李東廈)·김창숙·허발(許坺)·허규(許珪)·조봉암 등과 교유하면서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그 해 음력 8월 탑골공원 근처 요리집에서 가회동에 사는 한규원(韓圭源)을 만나 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의를 받은 한규원은 같은 달 충청남도 서산군에 사는 이민행(李敏行), 수은동에 사는 허만필(許萬弼) 등과 함께 독립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현신사(玄申社)와 비밀결사대 익명상조조합(匿名商社組合)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단원 허만필이 그 해 7월 말 경 경상남도 진주군 지수면 승내리의 부호 허준(許駿)[7]의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던 도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현신사는 와해되고 말았다.

이에 이수각을 비롯한 남은 동지들은 유신사(維新社)라는 비밀결사를 재조직, 종로에 있는 문아당(文雅堂)이라는 인쇄소에서 유신사의 정관(定款) 및 규약과 1만 원 권 증권을 인쇄하고, 경기도 수원군, 충청남도 천안군, 경상남도 진주군 등을 돌며 인쇄물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20년 2월 25일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하고 잠복 중에 있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천안경찰서로 긴급 후송되어 고문을 받고 구금되었다.

이후 미결수로서 공주형무소에 이감되어 약 5개월 간 구금되었다가, 1920년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출판법 위반·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정치범처벌령 위반 등의 혐의로 한규원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수각을 비롯한 현신사 회원들은 각각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1920년 출옥 후에는 외숙부 이명균 소유의 임야를 벌채하여 얻은 자금을 별동대를 통해 전달하기도 했다. 1936년 칠곡 지역의 향토지인 『칠곡지(漆谷誌)』를 편찬하기 위하여 관내 각 지역에 통문(通文)을 돌려 지역 유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문헌을 수집 하기에 이르렀으나, 조선총독부 발매규정에 의해 발매 및 반포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출판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칠곡지를 자비로 출판하였다.#

8.15 광복한국독립당에 입당 권유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향 칠곡군 선거구에 출마하려 했으나, 장남 이평석(李平錫)[8]남조선노동당 선전부장이라는 소문이 돌자 출마를 포기했다.

그 후 사실이 규명되어 아들은 복권되었으며, 1956년 1월 26일 조봉암 등이 창당한 진보당에 고문으로 추대되어 정치 활동을 했다. 이후 1963년 2월 9일 별세하였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2] 광주이씨칠곡파세보 상권 첨정공파 735쪽에는 1880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이두석·이석·이수목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음력 1월 16일.[5] 족보명 이두환(李斗煥).[6] 이만훈(李萬勳)의 딸이다.[7] LG그룹의 공동창업주 허만정의 아버지이다.[8] 또는 차남 이문석(李文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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