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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사키오스 (Isaac) |
출생 | 미상 |
사망 | 643년 |
직위 | 라벤나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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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벤나 총독부의 8대 총독.2. 생애
라벤나에서 발견된 그의 묘지 앞에 놓인 그리스어 비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출신의 귀족으로, 수산나를 아내로 두고 서방과 동방의 군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이탈리아로 오기 전에 동방의 장군이었으며,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역임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625년경 엘레우테리우스 전임 총독의 반란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 라벤나에 새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무렵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아달랄트 왕이 폐위되고 아리알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아달랄트는 가톨릭 신자였고, 아리알트는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 신도였기에, 교황 호노리오 1세는 그에게 폐위된 아달랄트를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그는 라벤나 시가 전임 총독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라고 보고, 아리알트의 즉위를 인정했다.630년경, 아리알트 왕이 투스키아의 타소네 공작이 일으킨 반란에 고전하다가 그에게 사람을 보내 타소네 공작을 대신 죽여준다면 매년 바쳐야 하는 공물을 300 두카트에서 200 두카트로 줄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동의하여 타소네에게 서신을 보내 동맹을 맺고 싶으니 라벤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타소네는 이에 동의해 라벤나로 갔다가 그의 병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었다. 아리알트 왕은 이에 만족하여 공물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638년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정교회와 단성론을 중재하려는 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세르기오스가 고안한 단의론을 호노리오 1세 교황이 수용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황청에 사신을 보냈고, 동로마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호노리오 1세는 단의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638년 10월 호노리오 1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세베리노는 단의론을 거부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세베리노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고, 비서이자 장군인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를 파견해 세베리노를 체포하게 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로마로 가서 민병대를 동원한 뒤, 라테라노 궁전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라벤나 총독 그도 로마로 가서 라테라노 궁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확보했다. 이후 두 사람은 보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송하면서도, 상당한 양을 빼돌렸다. 세베리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단의론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고 심신이 지친 이라클리오스는 640년 5월 단의론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철회하고 세베리노를 교황으로 승인했다.
636년 랑고바르드 왕국 새 군주로 즉위한 로타리는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정책을 중단하기로 하고 639년 오데르초와 알티노를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두 도시는 정복되었고, 주민들은 베네치아 석호로 도주했다. 토르첼로의 산타 마리아 마드레 디 디오 성당을 새로 세우고 로타리 왕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알티노 주교를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643년 로마 공국의 공작을 맡던 마우리키오스 차르툴라리오스가 이라클리오스의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로마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그는 군대를 파견하여 로마 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성 마리아 아드 프라세페 성당에 숨었지만, 곧 끌려나와 사슬에 묶인 채 라벤나로 보내져 참수당했다.
로타리 왕은 동로마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틈을 타 라벤나로 진격했고, 643년 스쿨테나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그는 이때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로타리 왕은 라벤나 일대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테오도로스 1세 칼리오파스가 신임 라벤나 총독으로 부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