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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7-03 09:28:19

이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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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미동
李美東 | Yi Mi-dong
출생 1911년 11월 6일
경상남도 울산군 서생면 대송리
(현 경상남도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사망 몰년 미상 (향년 불명)
사망지 미상
학력 동래보통고등학교[현] (퇴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이명 창씨명: 片山美東 (편산미동)
운동 계열 국내항일
서훈 대통령표창 (1998년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2018년 추서)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1. 개요

이미동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911년 11월 6일 경상남도 울산군 서생면 대송리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이던 1928년, 일제로부터 성질불량과 사상불온이라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고 고향인 울산군으로 돌아왔다.

1930년 8월 1일 대송청년회관에서 열린 울산청년동맹 대송지부 설립준비위원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았으며, 같은 달 18일 개최된 울산청년동맹 서생지부 설치대회에서도 임시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는 서생면에서 해산물 가게를 운영하면서 청년운동뿐 아니라 농민운동과 어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서생농민조합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1년 6월 5일 송두현·김두찬[2]·박선지·김학도[3]·지몽지 등과 함께 울산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었다.

1932년 9월에는 김두찬 등과 함께 서생어민조합 창립을 추진하였으나, 일본 경찰은 준비위원들을 요주의 인물로 규정하고 강령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창립대회를 금지·해산시켰다. 이후 다시 경찰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석방되었다.

1933년 12월부터는 이규문·원옥선 부부와 함께 농민복습회라는 야학을 설립하여 무산아동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1934년 1월 신암 바닷가에서 열린 야학 야구대회에서 소련 국기가 등장한 사건을 계기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하지만 1934년 4월 11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35년에는 이른바 울산적색농민조합 사건과 울산적색독서회 사건으로 박상선·이동개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후 예심과 공판에 회부되었으나 재판 결과와 출옥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여 여경수·이광우 등 부산·울산 지역의 동지들과 함께 1942년경 엠엘친우회(M.L親友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군수공장과 군사시설 파괴, 반일 삐라 살포 등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며 항일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943년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경찰 하판락(河判洛)의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1944년 7월 17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의 행적과 사망 시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9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현] 동래고등학교[2]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김두찬과는 동명이인이다.[3]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김학도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