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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08:58:34

이금룡

파일:이금룡.jpg
활동명 이금룡()
본명 이금룡( 또는 )
일본식 이름 香山長春
출생 1906년 6월 16일
대한제국 한성부
사망 1955년 4월 3일(향년 49세)
학력 배재학당
조선배우학교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1. 개요2. 생애3. 금룡상4. 친일 행적5. 작품 목록6.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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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

2. 생애

1906년 6월 16일 한성부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을 수료하고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 공부를 했다. 1926년에 조선키네마에 입사하여 나운규가 연출한 《아리랑》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뒤, 《풍운아》 등지에서 주로 단역을 맡다가 1927년 9월 나운규가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나운규프로덕션에 합류하여 창립작 《잘 있거라》(1927)에서 부호이자 색마인 민범식 역으로 출연해 처음 주연을 맡았다. 1928년 《사랑을 찾아서》에서 나팔 부는 노인 역을 시초로 20대부터 일찌기 노역 전문 배우로 점차 굳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운규와 동인들 사이의 불화가 불거지자, 1929년 4월 윤봉춘, 주삼손, 홍개명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하여 청구키네마사를 세운 뒤, 중외일보에 연재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어사 박문수전》의 각본을 쓰고 감독 및 출연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공백기를 거쳐 1936년 안종화 감독의 《역습》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복귀, 동년 《미몽》, 1938년 《한강》 및 《도생록》, 1939년 《국경》, 1940년 《신개지》 등에 출연하는 등,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무성영화 배우 가운데 발성 영화 등장 이후까지 살아남은 배우이기도 하다.

1945년 8.15 광복 후 《똘똘이의 모험》, 《새로운 맹세》 등에 출연했고, 1949년 대한영화사 연기실장, 1950년 대한영화협회 이사를 각각 지냈다. 1952년 《성불사》에 출연했고, 1955년 이규환 감독의 흥행작 《춘향전》(1955)에서는 변사또 역을 맡았다. 1955년 4월 3일 마지막 출연작인 《열애》 촬영 중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위생병원에서 사망했다.

3. 금룡상

그를 기려 동료들이 민간영화상인 금룡상(金龍賞)을 제정해 수여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시상식이었다. 1956년 1월 3일 거행된 제1회 금룡상 시상식에서는 이강천(《피아골》)이 감독상, 노경희(《막난이 비사》)가 연기상, 이경순(《춘향전》)이 녹음상을 수상했으며 작품상과 시나리오상은 수상자(작)이 없었다. 금룡상은 제2회 시상식의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한 채[1] 끝난 이후 폐지되었다.

4. 친일 행적

1939년 조선영화인협회 평의원으로서 제1기 영화인으로 등록하였고 영화 통제를 옹호하는 각종 좌담회에 참석했다. 1941년 조선영화령을 옹호하는 《반도의 봄》, 지원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지원병》, 조선군 보도부 제작의 《그대와 나》에 출연했다.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입사, 전쟁 동원 영화인 《조선해협》, 《거경전》, 《병사님》, 《사랑과 맹세》 등에 출연했다.

일제의 전쟁 지원 영화와 정책에 적극 협조하고 출연한 이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연극·영화배우 부문에 등재되었다.

5. 작품 목록

6. 참고 자료


[1] 심사위원 과반 득표라는 기준을 아무도 충족하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