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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03:40

이경흠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4년 9월 19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산외면 광정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1]
사망 1919년 3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경찰주재소
본관 재령 이씨[2]
상진(尙眞)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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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4년 9월 19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산외면(현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蘅)·조정래(趙正來)·조성규·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은 20일 함안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계획하여,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 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때 이경흠은 가야면 광정리를 비롯한 가야면의 군중을 동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거사 당일인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시위는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면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의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


[1]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2] 24세 흠(欽) 용(鏞) 석(錫) 탁(鐸)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