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 전 이름이 '윤형배'였던 1994년생 투수에 대한 내용은 윤호솔 문서 참고하십시오.
윤형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1992 |
1994 KBO 퓨처스 북부리그 다승왕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61번[1] | ||||
결번 | → | 윤형배 (1992~1997.6.27.) | → | 손민한 (1998~2011) |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42번 | ||||
오진희 (1994~1996) | → | 윤형배 (1997.6.28.~1997) | → | 결번 |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61번 | ||||
이정훈 (1997) | → | 윤형배 (1998) | → | 결번 |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31번 | ||||
박성기 (1991~1998.6.4.) | → | 윤형배 (1999) | → | 팀 해체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5번 | ||||
이동욱 (2004~2005) | → | 윤형배 (2007~2012) | → | 이용호 (2013~2016) |
kt wiz 등번호 76번 | ||||
팀 창단 | → | 윤형배 (2014~2015) | → | 가득염 (2016~2018) |
윤형배 尹炯培 | Yun Hyeong-Bae | |
출생 | 1969년 4월 20일 ([age(1969-04-20)]세) |
부산광역시 중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남일초 - 대신중 - 경남고 - 경성대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2년 신고선수 (롯데) |
소속팀 | 롯데 자이언츠 (1992~1997) 쌍방울 레이더스 (1997~1999) |
지도자 |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07~2010)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1)[2]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재활코치 (2011~2012)[3] kt wiz 투수코치 (2014) kt wiz 2군 투수코치 (2015) 경성대학교 비상군코치(2020~) |
가족 | 형 윤동배, 조카 윤웅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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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롯데 자이언츠,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 투수.2. 선수 경력
남일초등학교, 부산대신중학교, 경남고등학교, 경성대학교(1987학번)를 졸업하고 1991년 지명을 받지 못해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다.1992년 윤학길, 염종석, 박동희 등 3명의 에이스를 잇는 네 번째 투수로 활약하며 8승을 올렸다. 또한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차전 선발로 등판해 8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였고,[4] 이후 최종 5차전에서도 선발 호투하며 롯데의 V2에 공헌하였다.[5]
1993년에는 평균자책점 2.46에 14승 9패 3세이브를 기록하며 부상으로 시달리던 염종석을 능가하는 성적을 올리며 롯데의 에이스로 등극, 선수로서 최고의 해를 기록했다. 특히 이 시즌에 빙그레 이글스의 고졸 신인 노장진[6]과 대결을 벌여 1:0 완봉승을 이끌어 냈던 경기는 롯데 올드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노장진은 알려진 대로 선수 생활을 제대로 지속하지 못했고 윤형배 역시 1994년부터 부진하면서 명승부로 회자되지는 못 하고 있다.
1994년부터 방위 복무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좋았던 폼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몸관리에 실패하면서 갑자기 살이 쪘는데 이후 구위와 제구력이 모두 하락한다. 당시 방위병은 홈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지만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6.49의 평균자책점에 승리없이 3패만 기록했다.
방위 복무를 마치고 난 1995년에는 윤학길, 주형광, 강상수, 염종석에 이은 팀의 5선발로 활약하면서 완투 2차례 포함 5승을 거두며 부활의 조짐을 보이나 싶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6년 단 1승에 그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1997년 6월 27일 쌍방울 레이더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1999 시즌을 마치고 조용히 은퇴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의 윤형배의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140km/h가 채 안되는 수준으로 당시 KBO의 수준을 생각해도 강속구 투수라고 하기에는 힘들다. 평균보다는 조금 빠른 구속의 투수로 평가받았고 변화구도 리그 최정상급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며 리그 정상급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컨트롤과 지저분한 공 끝 때문이었다. 당시 윤형배가 던지는 공의 80%이상이 포수가 미트를 댄 지점으로 정확히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다가 공 끝도 지저분하니 타자 입장에서는 쉽게 칠 수 있을 것 같아 배트를 내지만 좀처럼 정타가 나지 않았다. 이런 지저분한 공끝 때문에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타자들의 배트가 나무젓가락 마냥 부러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4. 지도자 경력
2007년부터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를 맡았다.[7] 2011년에는 재활코치까지 겸임하였다.2012 시즌 종료 후 롯데 자이언츠에서 계약 해지되었다.
2013년 kt wiz의 투수코치로 합류하여 2014 시즌부터 현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2015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다.
2020년 이후 모교인 경성대 비상근코치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나와 현재 보직으로 활동 중이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1992 | 롯데 | 32 | 113 | 8 | 4 | 3 | 4.86 | 113 | 14 | 37 | 5 | 31 | 1.33 |
1993 | 31 | 193⅔ | 14 | 9 | 3 | 2.46 | 170 | 7 | 69 | 3 | 60 | 1.23 | |
1994 | 14 | 26⅓ | 0 | 3 | 0 | 6.49 | 44 | 1 | 10 | 2 | 9 | 2.05 | |
1995 | 20 | 67⅔ | 5 | 5 | 0 | 4.79 | 77 | 5 | 16 | 2 | 24 | 1.37 | |
1996 | 18 | 27 | 1 | 0 | 0 | 5.00 | 40 | 1 | 5 | 0 | 12 | 1.67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1997 | 롯데 / 쌍방울 | 11 | 19⅓ | 1 | 1 | 1 | 4.66 | 22 | 0 | 14 | 3 | 13 | 1.86 |
1998 | 쌍방울 | 26 | 46⅓ | 0 | 5 | 0 | 4.08 | 53 | 2 | 16 | 2 | 14 | 1.49 |
1999 | 11 | 16⅔ | 0 | 0 | 0 | 8.64 | 25 | 1 | 10 | 1 | 6 | 2.10 | |
KBO 통산 (5시즌) | 163 | 510 | 29 | 27 | 7 | 4.08 | 544 | 31 | 177 | 18 | 169 | 1.41 |
6. 여담
롯데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팀장으로 있다가 2012년 상동 야구장의 소장으로 부임하여 스카우트 및 운영지원팀까지 겸직한 3살 위인 형 윤동배도 롯데 자이언츠에서 같은 학교(대신중,경남고), 동아대 출신이다. 투수로 뛰었다.[8][9] 윤형배와 달리 정식으로 지명받아 입단했지만, 통산 성적은 윤형배만 못하다. 지금도 흔치 않은 형제가 한 팀에서 선수생활을 한 특이 케이스로, 당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형이 승리투수가 된 경기에서 동생이 세이브를 기록하며 마무리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지만 아쉽게도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7. 관련 문서
[1] 특이하게도 롯데 윤형배와 NC 윤형배 모두 등번호 61번을 손민한에게 넘겼다.[2] ~5월 2일[3] 5월 3일~[4] 강병철 감독이 윤형배를 2차전 선발로 등판시키자 윤형배 본인도 "이게 뭐지?" 싶었다고 한다. 사실은 당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부터 가을야구의 대장정을 이어왔기에 선발진이 심하게 지쳐있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올린 선발투수가 윤형배였다. 어차피 1차전을 이겼고 한국시리즈 원정 경기는 1승 1패만 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는 경향이 많았던데다 강병철 감독은 이겨야 할 경기와 버려야 할 경기를 구분하는 성향이 뚜렷했기에 이날 윤형배의 선발 등판은 '버리는 카드' 성격이 강했다. 심지어 윤형배 본인도 "아, 오늘은 팀에서도 나한테 큰 기대를 안 하는가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그런 경기에서 뜻밖의 8이닝 무실점 호투를 하고 팀이 적지에서 2연승을 해버렸으니 팀 분위기의 상승세는 정점에 다다랐다. 반면 빙그레 선수단 버스는 박살이 났다.[5] 뒤이어 3차전 에이스 윤학길을 투입하고 역전패를 당했던걸 생각하면, 윤형배가 선발 등판한 2번째 경기에서의 승리는 롯데의 우승에 매우 큰 힘이 되었다.[6] 공주고 3학년 에이스 투수로 1992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우승으로 이끌었다.[7] 2011년에는 1군 메인 코치로 시작하였으나 저조한 성적으로 인해 주형광과 시즌 중 보직 변경.[8] 원래는 타자였지만, 투수로 전업하였다. 참고로 류현진 거르고 나승현 뽑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게 윤동배다 (...)[9] 윤동배의 아들이자 윤형배의 조카인 윤웅재도 야구선수로, 고려대학교에서 외야수로 뛰었지만 아버지와 삼촌과 달리 프로 데뷔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