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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0 04:59:17

유창우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순경(純卿)
출생 1884년 12월 11일[1]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남면 하회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10번지)
사망 1921년 11월 2일 (향년 36세)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감옥
본관 풍산 류씨(豊山 柳氏)[2]
상훈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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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84년 12월 11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남면 하회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10번지)에서 아버지 유한영(柳瀚榮, 1865 ~ 1945.1.16.)[3]과 어머니 예안 이씨(1862 ~ 1892.4.26.)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조선소 직공, 공장 노무자, 상점 직원, 우체국 집배원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1920년 2년간 모은 100여 엔을 가지고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마음을 바꾸어 중화민국 상하이시를 거쳐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기로 계획하였다.

1920년 4월 초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건너갔다. 그 뒤 배편을 기다리며 숙소에서 묵던 중, 같은 달 말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이향(李香)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공채권을 발행하여 조선 내에서 발매하려고 기획하고 있고, 확실한 보증인을 데리고 오면 이 공채권을 발매하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채모집위원이 되기로 결심하여 1920년 5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전부터 오사카시에서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는 지인 신택균(申宅均)과 페인트 도장업에 종사하는 신현휴(申賢休)를 데리고 상하이시로 돌아가서 보증인으로 세웠다. 신원 보증이 끝나자 1920년 9월 14일 이향의 소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을 만나 조선 독립을 위한 독립공채 모집에 참여한다는 서약을 한 뒤 경상북도 안동군 공채 모집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경상북도 안동군 공채모집위원으로 임명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사령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공채 1,000원 권 5장, 500원 권 10장, 100원 권 100장 등 총 2만 원에 해당하는 공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선전용으로 발행한 잡지 『신한청년(新韓靑年)』과 「조선독립에 관한 격문」 등을 건네받았다.

이후 상하이시를 출발해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로 건너가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를 경유해 배를 타고 국내로 잠입한 뒤 고향 안동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1920년 9월 24일 나가사키시 행(行) 증기선 카스가마루(春日丸)에 홀로 탑승하여 9월 26일 나가사키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복식을 하였음에도 거동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수상하게 여긴 나가사키시 수상(水上)경찰서의 불심검문을 받아 소지하고 있던 여러 문서가 발각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찰범 처벌령 위반 혐의로 수상경찰서에서 20일간 구류를 살다가 국내로 송환되어 10월 18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2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4]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고, 1921년 11월 2일에 옥사 순국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양력 1885년 1월 26일[2] 서애(西厓) 찰방공파(察訪公派)-수목(守睦)파 25세 우(佑) 항렬.[3] 자는 성오(星五).[4]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