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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45:50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내용

1. 개요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문화재 파괴에 관련된 문서.

2. 내용

원래 이 사건은 1943년 전라북도 남원군에 거주하는 유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반전, 반일사상을 억압하려는 고등경찰의 시도였다. 충렬사를 지키던 관계자를 포함한 유림들의 협찬회 명부에 관련한 출판법 위반사건과 관왕묘 축문 내용의 보안법 위반사건을 적발한 경찰은 이러한 주민들의 반일적 불온한 동향은 결국 충열사나 관왕묘, 그리고 황산대첩비 같은 반시국적 고적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고 철거를 획책하였다. 반발이 심하던 유림들을 회유 또는 협박하여 계를 해산시키고 관왕묘와 충열사의 철거 및 소속재산의 처분 등을 경찰서장에게 일임하였다.

이후 경찰은 관왕묘의 인물상과 황산대첩비의 철거를 주장하였고 '황산대첩비는 보존가치가 있는 것 같게도 인정하지만, 이동곤란할 뿐 아니라 이를 위한 경비를 지변할 방도도 없기 때문에 폭쇄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도 사료되는 바, 경무국에서 관계기관과 교섭하여 혹시 인수할 희망이라면 그런대로 회신해주기 바란다'고 품신하면서 '종합적 소견으로서 민족적 자부심이 공고하여 쉽사리 뽑아낼 수 없으므로…종래의 미온적 태도를 포기하고 적어도 황국영원의 시책상 개혁 내지 숙정을 요할 사항은 이 게재에 단호하게 단행하여 사상정화의 철저를 기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고 강변했다.

위의 사건이 후에 벌어질 고적파괴령의 단초가 되었다. 전라북도 경찰부장이 발송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은 이례적으로 총독부 경무국장과 각도 경찰부장 및 관하 각 경찰서장 연기명으로 발신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과 같은 일이 이미 총독부 산하 전국의 고등경찰계통에서 면밀히 조사되어졌다는 것을 뜻하며 반시국적 고적의 파괴에 대한 정책이 준비되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위 공문을 접수한 경무국장은 문화재행정 주관국인 학무국에 의견을 문의하였고 학무국장은 경무국장에게 1943년 9월 22일 기안문서로 '황산대첩비만은 학술상 사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으로 그 대석(臺石)․입석(笠石) 등 일괄해서 보존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였지만 이 문서는 학무국장이 결재를 한 다음 '보존이 필요하냐' 라는 자필메모를 기안지 상단에 남기고 결재날인을 가위표한 다음 폐안처리하고 있다. 국장결재 후 상급자의 결재과정에서 보류되었음이 짐작된다.

그 다음에는 '황산대첩비는 학술상의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가 있지만 국민사상통일에 지장이 있다면 부득이 하니 적당한 기호에 입석․대석을 일괄해 총독부박물관에서 보존할 수 있도록 의뢰한다'고 하면서 참조첨부문에 황산대첩비의 본재는 당시 일본인의 해외발전 업적의 일단을 입증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비의 형식은 미술사학상 시대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보존의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며 치안상 철거할 필요있다고 이를 폭쇄함은 이런 종류의 유물의 보존상 유감이므로 이를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으려는 것임 이라고 덧붙이고있다. 1943년 10월 14일 학무국에서 경무국장 앞으로 기안한 이 문서는 현존하는 유사한 비석의 목록을 만들라는 학무국장 지시가 기재된 채 폐안처리되어 있다. 이 기안문서의 내용도 경찰국과의 협의과정에서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종결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서에는 부표참조로 현존유사비일람표(現存類似碑一覽表)가 붙어 있으며 열거된 20개 비석 중 4가지는 이미 철거되었고 이번에 철거대상이라고 하여 황산대첩비를 표시해 놓고 있다.

결국 학무국에서는 황산대첩비가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할 필요는 있는 것이지만 치안상 필요하다면 그 철거도 부득이하다고 경무당국에 동의를 표하지만 이 공문은 문서관리형식으로 보아 발송되지는 못하고 폐안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이유는 성안되어 결재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대상물인 황산대첩비가 현지 경찰서장의 지휘로 폭쇄될 것이 확정되었거나 비밀지령에 의해 실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얼마 후에는 합천 해인사에 있던 사명대사의 석장비가 경상남도 경찰부장의 지시에 따라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이름파괴여부
고양 행주전승비 정으로 글자를 파내었다.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공주 명람방위종덕비
공주 명위관임제비
공주 망일사은비
아산 이순신신도비
운봉 황산대첩 1945년 1월 17일 일제가 비전(碑殿)을 폭파하고 어휘(御諱) 새긴 내용을 철정(鐵釘)으로 쪼아버림
여수 타루비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
해남 이순신명량 대첩 비석을 경복궁 모처에 매장했다. 이후 찾아내어 원래 위치에 세웠다.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진주 촉석선충단비
통영·남해 이순신충렬묘비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파괴, 매몰
연안 연성대첩비
경흥 녹보파호비
회령 고충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