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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5-04 23:32:12

유근성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성대(成大)
본관 문화 류씨[1]
출생 1884년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검사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2][3]
사망 1945년 4월 24일
전라북도 무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461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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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근성은 1884년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검사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서 아버지 유문호(柳汶昊, 1855 ~ 1912. 3. 10)와 어머니 달성 서씨(1851 ~ 1923. 11. 24)[4]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을 전후하여 유근성은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보천교의 6인조에 입교하여 1920년부터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포교하여 보천교에 가입하도록 권유하였다. 또한 그해 음력 7월경부터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계룡산에 도읍하고 황제에 취임하여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신도를 조직화하여 조선을 독립시키고 차경석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에 참여토록 하면서 교세 확장에 힘쓰는 한편, 치성금 명목의 돈을 거두어 일부는 제사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전라북도 정읍군의 보천교 본부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힘썼다.

그 뒤 1921년 6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사기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 이송되었다가, 당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불기소처분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다시 기소되었으나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9월 일본 경찰에 다시 체포되었고, 같은 달 22일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었다. 그리고 1921년 12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5]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3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다. 그러나 1922년 3월 23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중 6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이 또한 1922년 5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되면서 징역 4년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전라북도 무주군으로 이주하여 은거하다가, 광복을 채 4개월 앞두고 1945년 4월 24일 별세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 안장되었다가 2020년 10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 곤산군파(崑山君派) 35세 근(根) 항렬.[2] 인근의 방촌동과 함께 문화 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류상준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유근성의 출생지인 검사동 447번지는 현재는 없는 지번으로, 대구 공군기지 부지에 편입되어 있다.#[4] 서정규(徐正奎)의 딸이다.[5] '정치범처벌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