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min-height: calc(1.5em + 10px); padding-top: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10e0e 0%, #a11 20%, #a11 80%, #810d0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전한(前漢) | ||||
| 태상황 | 도황 | 공황 | |||
| 후한(後漢) | |||||
| 덕황 | 목황 | 숭황 | 원황 | 인황 | |
| <colbgcolor=#a11> | }}}}}}}}} | ||||
| <colbgcolor=#A11><colcolor=#ece5b6> 한 추존 황제 유강 | 劉康 | |||
| 출생 | 기원전 41년 3월 이전[1] | ||
| 전한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 |||
| 사망 | 기원전 23년 8월 23일 (향년 18세 이상) | ||
| 전한 정도국 (現 산둥성 허쩌시) | |||
| 능묘 | 미상 | ||
| 재위기간 | 전한의 제양왕 | ||
| 기원전 41년 3월 ~ 기원전 34년 | |||
| 전한의 산양왕 | |||
| 기원전 34년 ~ 기원전 27년 | |||
| 전한의 정도왕 | |||
| 기원전 27년 ~ 기원전 23년 8월 23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 유(劉) | |
| 휘 | 강(康) | ||
| 부모 | 부황 고종 효원황제 모후 소의 부씨 | ||
| 배우자 | 공황후 정씨(丁氏) | ||
| 자녀 | 1남 | ||
| 작위 | 제양왕(濟陽王) → 산양왕(山陽王)→ 정도왕(定陶王) | ||
| 묘호 | 없음 | ||
| 시호 | 공왕(恭王) → 공황(恭皇) | ||
1. 개요
전한의 황족으로 한원제의 차남이며 부소의(傅昭儀) 소생이다. 아들인 한애제가 즉위하자 공황(恭皇)으로 추존되었다.2. 생애
기원전 41년 3월 원제에 의해 제양왕(濟陽王)으로 책봉되었다가 기원전 34년에 산양왕, 기원전 27년 정도왕(定陶王)으로 개봉되었다. 유강은 능력이 뛰어나 한원제의 총애를 받았기에 한때는 태자 유오를 제칠 뻔 했지만 광형(匡衡), 사단(史丹)의 원제를 향한 간언으로 무산되었다.성제 즉위 이후 유강은 한때 성제를 제치고 태자에 오를 뻔했던 탓인지 성제와 효원황후 왕씨에게 경계를 받았고 원후는 유강을 매우 엄하게 대했다. 그러나 성제에게 후사가 없자 성제는 조정에 입조한 유강을 장안에 잡아 둔 채 떠나지 못하게 했고, 유강에게 본인은 오래 동안 후사가 없었으니, 설령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유강이 수도에 있어야 한다고 설득하여 계속 수도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원후 왕정군의 오빠인 왕봉은 계속 유강을 경계하였는데, 마침 일식이 일어났다. 이에 왕봉은 정도왕은 엄연히 성제의 신하인데 장안에 황제와 같이 머무르는 것은 예가 아니며, 이전에 일어난 일식을 핑계삼아 유강을 봉국으로 쫒아내려 했다. 결국 성제는 하는 수 없이 유강을 돌려보냈고, 형제는 서로 울면서 눈물의 이별을 했다.
기원전 23년 8월 사망했고 조정에선 그의 시호를 공(恭)이라 하였으며 정도왕의 작위는 초효왕(楚孝王) 유효(劉囂)의 손자 유경(劉景)이 잇게 하였다. 이후 성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유강의 아들 유흔이 황제로 즉위했고 유강은 공황(恭皇)으로 추존되었다.
3. 참고 항목
[1] 제양왕에 책봉된 시기가 기원전 41년이므로 이보다 적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