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J. 웨일링 William J. Whaling | |
본명 | 윌리엄 존 웨일링 시니어 William John Whaling Sr. |
출생 | 1894년 2월 26일 |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 클라우드 | |
사망 | 1989년 11월 20일 (향년 95세) |
미국 뉴저지주 라이언 | |
복무 | 미국 해병대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917 ~ 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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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미네소타주 세인트클라우드에서 캐나다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7년 1차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해병대에 입대해 미국 원정군 제6해병연대 1대대 소속 소대장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벨로숲 전투에서 독가스에 흡입해 부상을 입었으며 회복 후 제6해병연대장 해리 힐 휘하에서 생미이엘 공세에 투입되어 공을 세워 은성훈장을 받았다.전후 라인란트 진주 당시 제럴드 C. 토머스와 친해지게 되었고 전미사격대회 미국 원정군 대표로 참가해 권총부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귀국 후 포츠머스, 중순양함 USS 타코마, 콴티코, 파나마에서 복무하다가 1924 파리 올림픽 사격 국가대표로 출전해 12등을 기록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태평양부서에서 웬델 네빌의 휘하에서 복무하다가 국공내전이 펼쳐지고 있던 중국으로 가 양쯔강을 순찰했다.
1927년 바나나 전쟁 당시 니카라과 원정대에 투입되었다. 귀국 후 해병대 사격 교관으로 있다가 아이티, 필라델피아, 해병대사령부, 쿠바, 푸에르토리코에서 복무했다. 홀랜드 스미스 휘하 제1해병사단에서 복무한 경력도 있다. 1941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1941년 길더 D. 잭슨 주니어 대령 휘하 진주만 해군기지에서 복무하다가 진주만 공습 당시 당장 달려가 대공포를 잡고 일본 전투기, 뇌격기와 전투를 벌였다. 이후 사령부에서 증인자격으로 보고서를 작성했고 월터 쇼트, 허즈번드 킴멜에 대해 비판했다.
제1해병사단에 배치되어 과달카날 전역 당시 리로이 P. 헌트 대령이 지휘하는 제5해병연대 부대대장으로 카리스마나 지휘력은 뛰어났으나 작전 식견이 부족한 헌트를 보좌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전시계급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5연대는 잠시 뉴질랜드에서 재편성을 가졌고 헌트에서 웨일링으로 연대장이 교체가 되었다. 또한 해병레이더스의 사격 교관으로 부대를 훈련시켰다.
과달카날로 복귀해 마타나우강 전투에 참가해 뛰어난 사격술로 일본군 4보병연대에게 큰 피해를 입혀 공을 세웠으며 이후 아메리칼 사단에 잠시 파견나갔었다. 이 공으로 미국 공로훈장[1]을 수여받았다.
뉴브리튼 전역 당시 제1해병연대장에 임명되었고[2]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의 후임 사단장 윌리엄 H. 루퍼터스의 휘하에서 글로스터 곶 전투 당시 주력군 존 T. 셀던이 이끄는 제5해병연대, 제1예비대 줄리안 N. 프리즈비가 이끌던 제7해병연대를 보조했다. 이 공으로 다시 미국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해병대사령부에서 복무하다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복귀해 르무엘 셰퍼드가 이끄는 제6해병사단예하 제29해병연대장[3]으로 야에다케산을 박격포, 기관총, 포병지원, 앨런 섀플리가 지휘하누 제4해병연대의 지원으로 점령했고 이후 일본군의 저항역시 격퇴하며 해군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오키나와 전투이후 괌에서 재편성받던 중 종전을 맞이했다.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제29해병연대장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시민들을 보호하고 구호작전을 전개했다. 1949년 준장으로 진급해 제2해병사단 부사단장[4]으로 임명되어 6.25 전쟁 당시 한국에 투입되었다. 이후 제1해병사단 부사단장이 되었고 1951년 양구에서 펼쳐진 펀치볼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후 윌리엄 T. 클레멘트의 후임으로 해병조병창장이 되었고 1954년 소장진급과 동시에 퇴역했다. 1989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