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보닌 William Bonin | |
본명 | 윌리엄 조지 보닌 William George Bonin |
출생 | 1947년 1월 8일 |
미국 코네티컷 주 윌리맨틱 | |
사망 | 1996년 2월 23일 (향년 49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 쿠앤틴 교도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범행 기간 | 1979년 5월 28일 ~ 1980년 6월 2일 |
체포 | 1980년 6월 11일 |
범죄 혐의 | 연쇄살인 |
피해자 | 최소21명 |
처벌 | 사형 |
IQ | 121 (웩슬러 지능검사) |
종교 | 천주교 |
군 경력 | 미합중국 공군 공군헬기강습부대 사격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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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누군가가 법에 위배되는 심각한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먼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1]
"I would advise that when a person has a thought of doing anything serious against the law, that before thay did, they should go to a quiet place and think about it seriously."
"I would advise that when a person has a thought of doing anything serious against the law, that before thay did, they should go to a quiet place and think about it seriously."
1. 개요
윌리엄 보닌(William Bonin) 또는 빌 보닌(Bill Bonin)이라고 불리는[2] 미국의 연쇄살인마.고속도로 살인마(Freeway Killer)[3]로 알려진 미국의 연쇄살인범으로 1979년 5월부터 1980년 6월까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최소 21명의 남성을 납치하고는 고문하고 살해했다.[4]
2. 생애
윌리엄 보닌은 1947년 1월 8일 코네티컷주의 윌리맨틱에서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보닌의 부모님들은 모두 심각한 알코올 중독과 도박 중독자였는데, 그 중, 전직 군인이었던 아버지 로버트 레오나드 보닌 시니어는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했고, 보닌과 형제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런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보닌과 그의 형제들은 부모님을 따라 매주 가톨릭 교회에 갔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1953년 남편이 도박으로 집을 날리자, 어머니 앨리스 도로시 보닌 니 코트는 자식들을 데리고 외할머니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보닌과 그의 형제들을 성 메리 가톨릭 학교에 보내졌다. 말이 학교지 그곳은 고아원이었다. 하지만 그곳도 집과 다를바 없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같이 구타와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또 후에 말하기를 그는 이곳에서 8살때 처음으로 동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3년 후인 1956년 보닌과 형제들은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보닌과 형제들을 외할아버지의 집에 맡겨버린다. 그런데 이 외할아버지도 정상은 아니었는데 보닌과 형제들은 외할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한다. [5] 1957년 보닌은 처음으로 차량 번호판을 훔친 혐의로 소년원에 수감되고 만다.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는 간수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소년원에서 나온 후, 1960년에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주의 코네티컷으로 이주한다. 보닌은 토랜스(Torrance)에 있는 노스 고등학교(North High School)에 입학했다. 후에 친구들이 회상한 바로는 보닌은 조용하지만 배려심 많고 교사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대하는 학생이었고, 볼링치는 것을 좋아 했었다고 기억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보닌. |
청소년기에 보닌은 비로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보닌의 어머니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런 이유로 보닌과 자주 다투었다. 보닌 자신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것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여성들에게 먼저 다가가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성들이 매번 고백을 거절하자 자신이 여성들에게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1965년 보닌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어머니의 요구로 같은 고등학교였던 여자친구와 약혼을 하였다. 같은 해 말, 보닌은 미 공군에 입대했고, 베트남 전에 파병되어 헬리콥터 부대에서 약 5개월 동안 현역으로 복무했다. 한번은 전투 중에 부상당한 동료를 구해서,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후에 보닌의 자백에 따르면 베트남에 파병됐을 당시 권총으로 다른 군인 둘을 위협해 성폭행을 하였다고도 자백했다.
보닌은 공군에서 3년을 복무한 뒤 1968년 21세의 나이로 명예 제대를 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보니 보닌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고, 심지어는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렇게 여자친구와 별거하고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3. 첫 번째 범행
보닌은 1968년 11월부터 1969년 1월까지 5명의 소년을 차로 유인해 납치한 뒤 수갑을 채운 뒤 구타를 하고, 강간을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피해자가 탈출하게 되면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납치와 아동 성추행으로 기소가 되었고, 재판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은 뒤, 아타스카데로 주립 병원(Atascadero State Hospital)에 수감된다. 보닌은 병원에 수감되어있는 동안 다양한 정신과 검사를 받는다. 검사결과 조울증, 반사회성 인격장애등을 진단받았으나 뇌에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에서 보닌은 치료가 되는 듯 보였으나...얼마 뒤에는 정신장애를 가진 재소자들과 성행위를 한 것이 밝혀지게 되면서 강제 퇴원되어 교도소에 수감되게 된다. 그렇게 얌전히 수감생활을 하다가 1974년 6월 11일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4. 두 번째 범행
출소한지 3개월이 지난 1974년 9월 8일 보닌은 가든 그로브(Garden Grove)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14살 데이비드를 부모님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제안하여 차에 태운 뒤,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옷을 벗긴 뒤, 강간하였다. 원래 보닌은 완전범죄를 꿈꾸고자 데이비드를 살해할 생각이었지만, 데이비드가 보닌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길에 내려주고는 도망쳐버린다. 그뒤로 곧장 집으로 간 데이비드는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1년 후인 1975년 10월 11일에 보닌은 체포되어 데이비드를 강간한 혐의와 이틀 뒤였던 1974년 9월 10일 또 다른 15세 소년을 납치하려고 했던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가 판결을 받은 뒤, 15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보닌은 다른 수감자들에게 아동 성추행범이라는 이유로 수시로 구타를 당했다.[6]1978년 10월 11일 보닌은 18개월간의 보호관찰 처분을 조건으로 가석방된다. 석방된 후에는 아파트를 한채 구하고, 배관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배관공 일이 쉽진 않았는지 보닌은 그의 남동생과 같이 술집을 운영했지만, 얼마 못 가 망해버린다. 그 후론 술집에서 일하거나 택시 운전을 하기도 하였지만, 한 직업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자주 실직한다. 그러다 1979년에는 배달 회사에 취직하여 트럭 운전사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다. 이 시기에 그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했으나, 1980년에 간경화로 사망한다.
이웃 주민들은 보닌이 종종 어린 소년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한번은 그의 집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하는 이웃도 있었다. 이웃들은 그를 소아성애자로 의심했으나 마을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보닌 또한 다른 이웃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5. 공범 버논 버츠(Vernon Butts)와의 만남
보닌은 출소 후, 지역에서 열리는 파티[7]에 자주 참석하였는데 이곳에서 버츠를 만나게 된다. 버츠는 21살의 젊고 잘생긴 남자였으며,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고, 때때로 사람들에게 마술을 보여주고는 수당을 챙기는 시간제 마술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버츠 또한 강도나 방화같은 범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고,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비슷한 성향 때문에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서로 믿을만한 관계가 되자 보닌은 곳 버츠에게 자신의 살인계획에 대해 애기했고, 같이 살인을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반대할 것 같다는 보닌의 예상과는 달리 버츠는 이에 순응했고, 둘은 살인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버논 버츠 |
6. 살인
보닌은 주로 남성 히치하이커들을 상대로 살인을 저질렀는데 희생자들 대부분이 12살에서 19살 사이의 마르고 장발인 젊은 남성들이었다. 주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밴을 타고 고속도로를 돌면서 희생자를 물색했다.[8] 희생자를 발견하게 되면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구실로 차에 태운 뒤, 제압하고, 수갑을 채우거나 줄로 묶었다. 그런 다음에는 성폭행과 강간, 고문을 하였고, 칼로 찌르고, 한번은 강제로 염산을 마시게 했다. 마지막으로 옷이나 줄 등으로 희생자들을 교살하였다. 그 뒤에는 시신을 고속도로의 갓길이나 근처에 유기했는데 경찰들이 연쇄살인임을 의심하지 않도록 시신을 여러 곳에 나누어 유기하였다. 심지어는 희생자가 문을 열고 탈출하는 것을 방지하기위하여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밴의 모든 문의 손잡이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살인을 하는 동안에는 버츠도 살인에 가담할 때가 많았는데[9], 후에 버츠의 자백에 따르면 보닌이 희생자들을 묶고 고문하고 강간하는 동안 그걸 보면서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보닌은 버츠와 또 다른 공범들과도 함께 살인을 저지르면서 살인을 단체 스포츠 활동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가끔식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이 보도된 신문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새끼가 우리같은 착한 게이들에게 욕을 먹인다"라고 말하며 뻔뻔하게 행동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보닌은 자백을 하며 이때를 회상할때 "살인은 마치 더 만족스러운 쾌락을 느끼려면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하는 마약 중독과 같다"라고 표현하며 자신이 살인중독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보닌의 밴 |
1979년 5월 28일 오전 10시 50분 13살의 토마스 룬드그렌(Thomas Lundgren)이라는 소년이 부모님 집을 나서는 것을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룬드그렌은 같은 날 고속도로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시신의 상태는 머리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골절이 있었으며 목과 가슴에 칼에 찔린 흔적과 교살당한 흔적이 발견 되었다.
8월 4일 보닌은 버츠와 함께 영화를 보러가고 있던 마크 숼톤(Mark Shelton)이라는 17세의 소년을 납치하였다. 시신은 다음날 아침 6시 30분에 발견되었고,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8월 27일 보닌과 버츠는 15세의 도널드 하이든(Donald Hyden)을 납치했다. 시신은 같은날 아침 늦게 고속도로 근처의 쓰레기통 옆에서 공사장 인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시신은 얼굴에 심한 구타를 당한 흔적, 칼에 찔린 흔적, 심지어는 직장을 찌른 흔적과 고환을 날카로운 물체로 자르려고 한 흔적까지 검시관에 의해 발견되었다.
9월 9일 보닌과 버츠는 자전거를 타고 영화관으로 가던 17세의 데이비드 머리오(David Murillo)를 납치하여 묶은 다음 한적한 곳으로 가서 강간하고, 구타를 한 뒤에 고속도로 근처에 나체 상태로 유기했다.
9월 17일 18세의 로버트 위로스텍(Robert Wirostek)이라는 청년이 식료품점으로 일을 하러 자전거를 타고가다 실종된다. 그의 시신은 9월 27일 고속도로 근처에서 발견된다.
11월 까지 보닌과 버츠는 15세와 17세의 남성 2명을 추가로 살해하였지만 신원 미상으로 이 2건의 살인은 유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11월 30일 보닌은 17세의 프랭크 폭스(Frank Fox)르 납치하여 강간하고 살해했다. 시신은 12월 2일에 고속도로 옆에서 나체 상태로 발견되었다. 시신에는 둔기로 맞은 흔적과 결박된 흔적이 있었다.
12월 10일 15세의 존 킬페트릭(John Kilpatrick)이라는 소년이 친구를 만난다고 나간 후, 실종되었다. 시신은 12월 13일에 발견되었지만, 부모님이 이혼을 하여 별거하여 살고있었기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웠다. 그래서 아들이 사라진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모님이 실종신고를 하지않아 1980년 2월이 돼서야 신원이 확인되었다.
1980년 1월 1일 보닌은 16세의 마이클 맥도널드(Michael McDonald)이라는 소년을 납치하여 교살했다. 시신은 이틀 뒤 고속도로 옆에 발견되었지만 3월 24일이 돼서야 신원이 확인되었다.
2월 3일 아침 보닌은 어머니 집으로 한 소년을 초대하여 함께 술을 마시고, 서로 합의하여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보닌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타 소년은 그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려고 하다가 그에게 들키고 만다. 이에 크게 분노한 보닌이 소년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소년은 도망갔고, 보닌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이날 살인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얼마전에 알게된 그레고리 마일리(Gregory Miley)(당시 19세)[10]와 함께 차를 몰고나가 거리에서 15세의 찰스 미란다(Charles Miranda)를 차에 태웠다. 처음에는 차에서 서로 합의하여 보닌과 관계를 가졌는데 이를 본 마일리가 그에게 소년을 죽이지 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보닌은 자신이 저지른 연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신고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미란다를 구타하고 교살하여 한적한 골목길에 유기하고 떠난다.[11] 그러나 잠시 뒤 보닌은 방금 저지른 살인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마일리에게 한건을 더 하자고 제안한다. 마일리는 그만하고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마지 못해 보닌의 요구에 응하게 된다. 둘은 차로 돌아다니던 중 버스정류장에 서있는 12살의 제임스 마케베(James Macabe)를 발견하고는 차에 태운다. 그러고는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한 뒤 건설현장에 유기하고는 떠나버린다. 며칠 후, 보닌은 가석방 조건 위반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3월 4일에 석방된다.
3월 14일 보닌은 18세의 로빈 게린(Robin Gatlin)을 납치하였다. 게린은 얼음송곳으로 찔리고 구타와 강간을 당했고, 목이 졸려 사망했다. 시신은 다음날 발견되었다.
3월 21일 보닌은 그랜 바커(Glenn Barker)라는 14세 소년에게 접근하여 태워주겠다고 제안한 뒤, 납치하였다. 그리고는 고문을 하고 줄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같은날 오후 4시경 15세의 러셀 러그(Russell Rugh)를 가든 그로브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납치하고는 약 8시간 정도 차에 감금했다. 그러고는 목을 졸라 살해했다. 보닌은 러그의 시신을 바커의 시신과 같이 클리블랜드 국립공원(Cleveland National Forest)에 유기하였다. 두 시신은 3월 23일이 돼서야 발견되었다.
1980년 3월 보닌은 파티에서 만난 17세의 윌리엄 퓨(William Pugh)에게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보닌의 증언으로는 처음에는 퓨를 죽일 생각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니 생각이 달라졌는지 퓨에게 공범일을 제안했다고 한다. 퓨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3월 25일 보닌과 퓨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집에서 가출을 한 15세의 해리 터너(Harry Turner)에게 성관계를 하면 돈을 주겠다는 구실로 접근하여 납치한다. 그들은 해리를 결박하고 강간한 뒤, 성기를 물어뜯기까지 한다. 그러고는 퓨에게 헤리를 "죽여버리라고" 한다. 그렇게 해리는 퓨에게 두들겨 맞아 죽게 되고, 보닌은 시신을 근처에 버린 뒤 떠나버린다.
4월 10일 보닌은 학교로 가던 16세의 스티븐 우드(Steven Wood)를 만났다. 당시 우드는 형의 소개로 보닌을 이미 알고있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밴에 타고만다. 우드가 차에 타자 보닌은 갑자기 돌변해서는 우드를 심하게 구타해 살해한다. 그러고는 시신을 차에 실은 채로 밤까지 기다리다 골목길에 대충 유기하고는 떠난다.
4월 29일 보닌은 슈퍼마켓에 잠시 들르던 중 그곳에서 일을하던 19세의 드레인 켄드릭(Drain Kendrick)을 만나게 된다. 보닌은 켄드릭에게 대마를 피우자며 접근해 함께 버츠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 노래를 듣고 대마를 피우던 중 보닌은 켄드릭에게 게이인지 묻게된다. 하지만 이에 켄드릭은 상당히 불쾌해하며 화를 냈고 집에서 떠나려 했지만 보닌과 버츠에 의해 제압당하고 만다. 그리고는 강간을 하고 입에 염산을 붓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켄드릭은 계속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은 죽게된다. 이들은 켄드릭의 시신을 고속도로 옆에 유기한다.
5월 12일 보닌은 평소에 잘 알고지내던 17세의 로렌스 샤프(Lawrence Sharp)를 살해하고는 근처 주유소에 유기한다. 시신은 5월 18일에 발견되었으며 심하게 구타당한 흔적과 목이 졸린 흔적이 발견되었다.
5월 19일 보닌은 버츠에게 찾아가 같이 동행해 살인을 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버츠가 이를 거절하였고 보닌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차를 몰고다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14세의 션 킹(Sean King)을 납치하여 살해한다.
6월 2일 보닌은 집에서 가출해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18세의 제임스 먼로(James Munro)를 알게 되어 함께 범행을 준비한다. 그들은 버스정류장에 있던 18세의 스티븐 웰스(Steven Wells)를 차에 태웠다. 웰스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보닌과 함께 차 뒤에서 성관계를 하였고 보닌은 웰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집으로 데리고 간다. 집으로 가서는 성관계를 더 하고는 역시 웰스를 살해하고는 유기한다.
7.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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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체포
6월 11일 보닌의 살인은 막을 내리게 된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계속해서 사라지자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던 중 윌리엄 보닌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다. 공범중 하나였던 윌리엄 퓨가 범죄를 저질렀다가, 소년원에 보내졌는데, 그가 소년원의 상담사에게 보닌과 함께 저지른 살인에 대해 자백했던 것이다. 경찰은 보닌을 유력 용의자로 판단하고는 그를 미행하며 감시하기 시작하는데 감시하던 중에 보닌이 한 소년을 자신의 차에 태우는 것을 목격하고는 추격한다. 추격 끝에 주차장에 세워진 그의 밴을 발견하고는 급습하게 되는데 차 안에서 소년을 강간하고 있던 보닌을 현행범으로 체포하게 된다. 당시에는 미성년자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보닌이 연쇄살인과 연관됐다고 생각하여 그의 밴 안을 수색하게 되는데 그 안에서 수갑, 칼, 밧줄같은 도구들이 발견됐고 수많은 핏자국도 발견되었다. 또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스크랩 해놓은 것들도 잇따라 발견되었다. 버츠와 다른 공범들도 보닌의 자백으로 체포되었다. 버츠는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마일리와 먼로는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대가로 사형은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퓨는 피해자였던 점을 고려하여 6년형을 선고받았다.9. 자백
처음에는 범행을 일체 부인하던 보닌은 자신의 피해자인 션 킹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의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알려달라는 편지를 읽고는 범행을 인정한다. 하지만 보닌은 션 킹의 어머니를 위해서 자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시신을 유기한 장소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경찰이 자신에게 점심으로 햄버거를 사줄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희생자들의 목숨을 햄버거 값에 비교한 것이다. 결국 보닌은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21건의 살인에 대해 자백했고, 자신을 도와준 공범들의 이름까지 함께 불어버린다.10. 재판
1981년 11월 5일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법원에서 이곳에서 벌어진 12건의 살인에 관하여 재판을 받게된다. 검사 측은 보닌에게 각각의 살인마다 사형을 구형했다. 반대로 변호사 측은 보닌이 충동조절장애와 가학적 성도착증을 앓고 있다고 증언하며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결국에는 유죄 판결을 받고 1982년 3월 12일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 후, 그는 샌 쿠앤틴(San Quentin)교도소에 수감된다.11. 수감 생활
보닌은 사형수로 감옥에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수년 동안 단편소설과 그림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쓴 소설인 Doing Time: Stories the Mind of the Death Row Prisoner라는 책은 출판되기까지 했다. 또한 자신의 희생자들의 유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단 한번도 죄책감이나 후회를 표하지 않았다. 그는 교도소에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교도소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연쇄살인범인 로렌스 비테커(Lawrence Bittaker)[12]와 랜디 크래프트(Randy Kraft)[13]와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랜디 크래프트와 카드게임을 자주 했다고...12. 처형
처형당하기 직전 모친인 앨리스 도로시 보닌과 찍은 사진[14]
1996년 2월 23일 보닌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마지막 식사를 하며 미국의 퀴즈 쇼인 Jeopardy!를 시청하였고 오후 11시 45분 사형집행실로 호송되었다. 12시에 사형집행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행되기 1시간 전에 마지막 말(메모)을 남기고는 사형이 집행되어 12시 13분 사망선고를 받았다.
13. 기타
[1] 윌리엄 보닌의 마지막 말[2] 미국에서는 Bill이라는 이름이 William의 닉네임으로 자주 쓰인다.[3] 당시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활동했던 또 다른 연쇄살인범인 랜디 크래프트(Randy Kraft)와 패트릭 키어니(Patrick Kearney)도 이 명칭으로 불렸다.[4] 법정에서는 14건의 살인만 유죄로 인정되었다.[5] 과거에 아동성추행 전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6] 그럴만도 한게 교도소에서 강간범이나 성추행범은 교도소내 먹이사슬에서 최하위권인 경우가 많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경우는 더더욱...[7] 술과 마약을 겸하는 파티였다. 주로 동성애자들이 참석했었다.[8] 일요일에는 범행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9] 최소 8건의 살인을 도왔다.[10] 문맹에다가 지능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보닌이 쉽게 가스라이팅을 할 수 있었다.[11] 시체를 제대로 처리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12] 1979년 6월부터 10월까지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공범인 로이 노리스와 함께 5명의 여성을 살해했다.[13]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최대 67명의 남성을 살해했다.[14] 보통의 연쇄살인범들이 폭력적인 부친에게서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모친을 원망하고 이를 다른 여성들에게 투영해 범죄를 저지른 것과 달리 보닌은 그의 모친과 사이가 좋았다. 그가 군대에 간 것이나, 여성과 약혼한 것도 그의 모친이 시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