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4월 8일 ~ 1970년 10월 3일 (향년 82세)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조류학자. 창씨명은 다니모토 코우큐(谷元洪九).2. 생애
1888년 4월 8일 평안도 삭주도호부 산후면 장토동(現 평안북도 대관군 양산리)에서 태어났다.[1]1910년 수원농림학교 본과를 졸업한 뒤 그해 4월부터 10월까지 수원농림학교 교유보(敎諭補), 1910년 10월부터 1911년 9월까지 권업모범장 목포지장 기수(技手), 1911년 9월부터 1912년 9월까지 조선총독부 농림학교 조교유(助敎諭) 등으로 근무했으며, 1911년 제1차 일본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1912년 9월,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現 가고시마대학 농학부)에 특별입학하였으며 1915년 7월 11일에 졸업하였다. 이후 아열대 및 열대식물 2천종을 가지고 1915년 여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15년 7월, 조선총독부 농림학교에 연구생으로 배치되어 1916년 4월까지 수학하다가 1916년 5월, 평안북도 구성군 서기에 임명되어 1919년 9월까지 일했다. 1919년 10월에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원에 부임하여 1931년 3월까지 일했다. 이때 길러낸 제자로 제5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최규남, 곤충학자 석주명, 북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정준택 등이 있다. 이후 1931년 3월, 안주농업학교 교유(敎諭)에 부임했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사감을 겸하기도 했다. 석주명의 글에 따르면 원홍구는 장남 원병휘(元炳徽)와 함께 조류에 관심을 가져 조류채집을 하기 위해 제주도까지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일본어로 일본동물학회에서 발행한 <動物學雜誌>에 열심히 기고를 하였다. 1936년 잠시 안주고등보통학교에서 교유 겸 실업학교 교유를 지내다가 다시 안주농업학교로 돌아와 교유로 근무했다. 1940년 봄에는, 캐나다 선교회가 설립한 기독교 학교인 함흥영생고등여학교 교장으로 전보되었고, 함흥부 소화정2정목(現 함흥시 해방동)에 거주했다. 1944년 5월부터 1945년 4월 사이 함흥의학전문학교 생물학 강사를 겸하였다. 1945년 덕천농업학교 교장 등으로 교육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조류연구를 하였다.
해방 후 일제 시대에 고등교육자로 일했다고 배척을 받았으나 그의 제자였던 산업국장 정준택이 추천하여 강서농업학교 교장을 거쳐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교수에 임용되었으며, 1946년 8월 10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북조선민주당에 입당하였다. 해방 전에 3800평 정도의 토지가 있었으나, 토지개혁 과정에서 모두 몰수되었다. 1947년 5월, 북조선민주당 평양시당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7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생물과학관 관장, 1948년 8월,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장 겸 동물학강좌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48년 12월 8일,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2년 과학원 후보원사 겸 생물학연구실장에 임명되었다. 1954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55년, <조선포유류도설>, 1956년, <조선조류의 분포와 그 경제적 의의>를 저술하였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조선조류원색도설> 1권을, 1964년에 2권을 저술하였다.
196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63년부터 1965년 사이, 조선조류지 3권을 편찬하였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67년부터 과학원 동물학연구소 소장으로 사업하였다. 1968년 <조선짐승류지>를 저술하였다. 고려인 화가 변월룡이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북한에서도 대접을 받으면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1970년 10월 3일 15시, 82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했다. 과학원은 부고를 발표, "동지는 해방후 4천만 조선인민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을 높이 받들고 우리당의 주체적인 과학정책을 관철하는데 갖은 정력과 재능을 바쳤으며 우리나라 생물학을 발전시키며 후대들을 교육하는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유작인 <조선량서파충류지>가 1971년에 출간되었으며,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92년 4월, 그를 기리는 초상우표가 발간되었다.
3. 여담
- 막내아들 원병오는 김일성종합대학과 원산농업대학을 다니던 중 조선인민군으로 징집되어 6.25 전쟁에 참전했으나 탈영 후 국군에 귀순하여 박정희의 부관을 지냈고, 이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한에서 조류학자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 북일합작영화 <버드>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 전경수(2018), 조류학자 원홍구 선생에 대한 편상, 근대서지 18.
[1] 1940년 간행된 (황기2600년기념) 함남명감에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