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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21 03:28:29

원굉(후한)

袁閎
(129? ~ 185?)
1. 개요2. 생애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하보(夏甫).

2. 생애

예주 여남군 여양현 사람으로 원하의 아들이자 원팽의 손자이며, 원소의 6촌 형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읽는 것을 업으로 삼았고 주군에서 여러 차례 징소했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으며, 아버지 원하가 팽성상이 될 때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혼자 걸어가서 아버지를 방문했지만 며칠 동안 관리가 들여보내지 않았다. 우연히 유모가 원굉을 찾아내 이를 알렸지만 원굉은 이미 떠난 후였고, 원하가 수레를 보냈지만 질병이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원하가 죽으면서 형제들과 함께 영구를 맞이하러 갔지만 조의금은 받지 않았으며, 원굉은 맨발로 달려가 관을 안으면서 한로에 몸을 쬐자 원굉의 용모는 여위어 손과 발에서 피가 흐르자 사람들이 걱정했다. 원굉은 한나라가 혼란하면서 원씨가 번창한 것을 보고 “선조(원안)이 왕조에 공헌했는데, 자손이 덕을 지키지 않고 사치하고 있는 것은 좋지 않아 살해당할 것이라고 형제들에게 얘기했다.

159년에 진번환제에게 천거한 5명의 처사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167년에 당고의 금이 일어나자 원굉은 처음에 깊은 숲속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어머니가 연로했기에 멀리 달아날 수 없었으며,[1] 세상과 단절해 토실을 쌓고 그 속에 살면서 창문으로 음식을 들이고 내는 등 18년 동안 몸을 감추고 오로지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복상하면서 위패를 만들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황건적이 마을에 침입했는데도 큰 소리로 글을 읽고 있자 황건적들이 원굉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으며, 57세에 토실 안에서 사망할 때 죽으면서 검소하게 매장해달라고 했다.


[1] 《태평어람》 권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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