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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9 13:23:19

원고생


성씨 원(轅)
이름 고(固)
호칭 원고생(圓御生)
생년 미상[1]
몰년 미상
관직 박사(博士)
태부(太傅)

1. 개요

전한 초의 관료이자 유학자. 제국 이수현 출신. 본명은 원고(轅固)로, 사자성어 곡학아세를 말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청하왕(淸河王) 유승(劉承)[2]의 태부(太傅)로, 시경을 연구했기 때문에 경제(전한) 때 박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황생(黃生)과 경제 앞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사기 유림열전에 실린 논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때 황생이 말하길,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군주를 시해한 것입니다. ”

이에 원고생이 말하길,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은 포학하고 혼미하여 천하의 민심이 모두 탕왕과 무왕에게로 귀순했던 것이며, 탕왕과 무왕은 천하 민심이 바라는 대로 걸왕과 주왕을 죽였던 것입니다.
걸왕과 주왕의 백성들은 자기 군주의 부림을 받지 않고 탕왕과 걸왕에게 귀순했으므로, 탕왕과 무왕은 부득이 천자로 즉위했는데, 이것을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황생이 말했다. “모자는 비록 낡아도 반드시 머리 위에 쓰는 것이고, 신은 비록 새것이라도 반드시 발에 신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상하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걸왕과 주왕이 비록 도에 어긋나더라도 군주로서 윗자리에 있었습니다. 탕왕과 무왕이 비록 성인(聖人)이었어도 신하로서 아랫자리에 있었습니다.
대저 군주가 어긋나게 행동해도 신하가 바른말로 그 잘못을 바로잡아 천자를 받들 수 없는데, 도리어 잘못을 트집 잡아 군주를 주살하고, 그 대신 남면하여 왕으로 즉위했던 것은 신하가 군주를 시해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원고생이 말했다. “만약에 당신의 말한 대로라면 고조께서 진나라를 대신해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그른 것입니까?”

이에 경제가 말했다.
“고기를 먹고 말의 간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고기 맛을 모른다고 하지 않으며, 학문을 말하는 사람들이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어리석다고 하지 않는다.”

이에 쟁론이 멈추게 되었다. 이후 학자들은 감히 천명과 시해에 대하여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효문황후는 노자(老子)의 서적을 좋아하여 원고생을 불러 노자의 서적에 대해서 물었다. 원고생은 노자의 책은 집안 노비의 말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혹평했다.

태후가 노하여 원고생에게 축사로 들어가 돼지를 찔러 죽이게 했다. 경제는 태후가 화가 나있지만 원고생이 직언을 올린 것을 죄가 없다고 여기고, 원고생에게 날카로운 무기를 빌려주어 축사에서 돼지를 찌르게 했다. 원고생은 돼지의 정 가운데 심장을 단칼에 찔러 쓰러뜨렸다.

태후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다시 죄를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만두었다.

얼마 뒤에 경제는 원고생을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여겨 청하왕의 태부로 임명했다. 그는 관직에 오래 있다가 병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무제가 즉위 초에 원고생을 다시 현량(賢良)으로 재등용했다.[3] 이 때 아첨하여 영합하려는 여러 유생들이 원고생을 시기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원고생은 늙었다.”고 무제에게 간언했고, 무제는 원고생을 사임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90세가 넘었다. 원고생을 불러들일 때 설읍(薛邑) 출신의 공손홍도 역시 불러서 임용했는데, 그는 원고생을 어려워해서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에 원고생이 공손홍에게 말했다.
公孫子,務正學以言,無曲學以阿世!
"공손(公孫) 선생, 바른 학문에 힘쓰며 직언을 올리고, 왜곡된 학문으로 세속에 영합하지 마시오!
원고생이 공손승에게 충고한 말

이후 삶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무제 초에 이미 90세를 넘겼던 만큼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공손승의 사망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향으로 낙향해 후학 양성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제나라에서 시경을 강론하는 자들은 모두 원고생의 견해에 바탕을 두었으며, 제나라 사람으로 시경을 연구하여 귀하게 된 자들은 모두 원고생의 제자들이었다고 한다.


[1] 한무제 즉위 초에 관직에 물러날 당시 이미 90세를 넘겼다는 언급으로 볼 때, 늦어도 기원전 231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 청하애왕 유승(淸河哀王 劉乘). 한경제의 아들이다. 기원전 147년 청하왕에 임명되어 재위 12년만인 기원전 135년 후사없이 죽어서 청하국은 폐지되어 군현으로 돌아갔다.[3] 공손홍이 기원전 140년 무제 때 다시 불러들인 것으로 보아 기원전 140년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