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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6 05:01:36

요코스카선 전차 폭파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 경위3. 재판4. 기타

1. 개요

横須賀線電車爆破事件

1968년 국철(現 JR 동일본) 요코스카선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 단독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사건[1]으로 규정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2. 사건 경위

1968년 6월 16일 오후 3시경에 요코스카선 상행선을 운행중이던 도쿄행 열차가 오후나역에 근접했을 때 6량째 객차의 선반 위에서 돌연 폭발이 일어났다. 사건 당일은 일요일이라 행락객들이 많았던 탓에 30대 남성 승객 1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2] 이 사건으로 일본 전역이 발칵 뒤집혔는데 그 전 해인 1967년에도 산요 전기철도 본선에서 열차 폭파 사건이 발생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이 공포를 감추지 못했다.[3] 산요선 사건과 요코스카선 사건 모두 사건 당일이 아버지의 날[4]이었고 선반 위에 놓인 짐에서 폭발이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던데 다 이 사건들 이전에 벌어진 쿠사카 지로 사건[5]의 영향으로[6] 공공기관이나 대중교통을 노린 폭파 테러 사건이 빈발하던 참이었다. 단일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광역 중요 지정사건으로 지정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한편 문제의 폭발물은 감식 결과 수렵용 산탄총에 사용되는 무연화약으로 밝혀졌으며 기폭 장치는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의 건전지 홀더였다. 레코더의 검사 마크를 분석한 결과 1000대 이하로 소량 출고된 제품임이 판명되었으며 폭발물을 싸고 있던 마이니치 신문이 도쿄 다마판으로, 주로 하치오지시, 타치카와시, 히노시 방면으로 배포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런 일련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히노시에 거주하던 목수 와카마츠 요시키(若松善紀)[7]가 용의 선상에 올랐는데 그가 수렵 면허 소지자로 산탄총을 소지했으며 마이니치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는 점이 주된 근거였다.

사건 발생 3개월 후인 1968년 11월 9일 경찰은 와카마츠 요시키에게 임의 출두를 요구했다. 경찰이 제시한 증거를 본 와카마츠는 범행을 인정하고 체포되었으며 자신이 요코스카선 열차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고 시인했다. 그가 밝힌 범행 동기는 전 애인에 대한 분노로,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파국을 맞은 데 대한 울분을 풀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했다. 요코스카선 열차를 폭파한 이유는 그녀가 고향인 야마가타에서 도쿄로 상경할 때 이용했던 열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은 쿠사카 지로를 존경해서 그의 범행 수법을 모방했다고 밝혔다.

3. 재판

와카마츠는 살인죄 및 폭발물 단속법 위반, 교통방해죄로 기소되었는데 재판에서 쿠사카 지로 사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살인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쿠사카 지로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열차를 폭파시키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심과 2심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와카마츠는 판결에 불복하여 한국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에 상고하였으나 상고가 기각되면서 그대로 1972년 4월 22일 사형이 확정되었고 1975년 12월 5일 미야기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32세.

4. 기타

같은해 일어난 3억 엔 사건의 범인이 타마 농협에 보낸 협박장 중 이 사건을 의식한 듯한 '요코스카선은 비겁한 놈(よこすかせんはひきょうもん)'이라는 문장이 들어간 것이 있다. 요코스카선 폭파 사건이 협박장을 보내기 9일 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문장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1] 일본 전국의 경찰서가 공조 체제로 수사하도록 지정된 사건. 1963년에서 1964년에 걸쳐 연쇄살인범 니시구치 아키라가 일으킨 살인 사건의 영향으로 제정된 시스템이다.[2] 사망한 30대 남성은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아이를 얻은 아버지로, 산후조리중이던 아내와 아이를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변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 안타까움을 샀다.[3] 게다가 산요선 사건은 후에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상태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4] 일본의 경우 매년 6월 세 번째 일요일[5] 1962년에서 1963년에 걸쳐 '쿠사카 지로(草加次郎)'라는 신원 미상의 인물 명의로 자행된 폭파, 협박, 저격 등의 일련의 테러 사건.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1978년에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6] 구체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1963년에 발생한 긴자선 열차 폭파 사건.[7] 본업인 목수 외에 스미타마 요시키(純多摩良樹)라는 필명으로 단가 시인으로도 활동했다.[8] 이 시점에서는 범인이 특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