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예네바인(Josef "Pepi" Jennewein : 1919년 11월 21일~1943년 7월 27일)
1. 젖먹이 시절부터 스키를 타다
요제프 예네바인이라는 이름은 동계 스포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스키 선수로 기억되고 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전투조종사로서 적기 86대를 격파한 에이스 파일럿으로 항공전사 한귀퉁이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긴 인물이다.1919년 11월 21일에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골마을인 세인트 안톤(St Anton)에서 태어난 그는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3살적부터 유아용 스키를 신고 아장아장 걸었다고 한다. 알파인 월드 챔피언을 차지한 저명한 스키어인 루돌프 마트(Rudolph Matt)는 어린 예네바인의 재능을 알아보곤 그에게 정식으로 스키를 가르쳤고, 재능과 조기 교육에 힘입은 그는 1931년에 티롤에서 열린 스키 선수권 청소년 클래스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당시는 아직 스키 종목이 지금처럼 세분화되기 전이기도 했지만, 예네바인의 특이한 점은 전 종목에서 고루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는 것이었고, 이런 출중한 스키 실력으로 인해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로 성장했다.
1934년 겨울, 요제프 예네바인은 스키점프의 청소년 부문 최고 기록인 70m를 마크했다. 그 당시의 스키 점프용 스키는 지금과 같은 경량 카본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작나무를 깎고 다듬어내 무겁기 짝이 없었고, 선수복 역시 공기역학적인 면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은 열악한 장비였음에도 이와 같은 대단한 기록을 낸 것이다. 더군다나 스키 점프는 그의 주종목도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 예네바인은 고향에 있는 스키 학교에서 한네스 슈나이더와 루돌프 마트의 밑에서 스키 강사로 근무하며 훈련도 겸하였다.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과 통합하게 되었고, 젊은 예네바인 역시 당시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안슐루스를 크게 환영했다. 하기사, 소국 오스트리아 출신보다는 장차 유럽을 호령할 제3제국 출신 선수가 그의 장래에 더육 유리했을 것임은 자명했다. 스키 강사로 일하던 그에게는 개인 트레이너가 붙고, 독일 국가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2. 영광의 절정
1939년 초에 라우바호른 스키 월드컵에 출전한 그는 회전(slalom) 종목에서 우승, 활강(downhill)에서 3위, 알파인 복합에서 2위를 차지했다. 연이어 2월에는 폴란드의 자코파네에서 개최된 알파인 스키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회전 및 활강에서 은메달, 알파인 복합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이듬해인 1940년 겨울, 가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에서 열린 동계 스포츠 대회에서는 회전, 활공, 알파인 복합 세 종목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해 영광의 절정을 맛보았다. 1941년 2월, 이탈리아의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서 개최된 알파인 스키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예네바인은 다운힐과 알파인 복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전체 성적 6위에 매김된다. 또한 노르딕 스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출전한 그는 스키 점프에서 또다시 자신의 실력을 활짝 펼쳐 보였다.그러나 이 시절의 기록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으로 인하여 독일의 우방국에서만 열리고 선수들 또한 추축국 출신들만 참가하고 있었던 탓에 종전 후인 1946년에 프랑스의 포에서 개최된 국제 스키 연맹 회의에서 세계선수권대회 자격을 박탈해 모든 기록은 공인 스코어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시기 예네바인은 국적을 바꾼 덕을 톡톡이 보고 있었고, 자신은 독일인이라는 자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면서 또다른 유명세를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루프트바페의 전투조종사였다.
3. 전투기 조종사로 데뷔
그는 선수 생활 중이던 1940년 초부터 이미 루프트바페에 소속되어 비행 훈련을 시작하고 있었던 탓에, 1941년 여름에는 교육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서부전선에 배치된 제5전투비행학교 제4중대(4 (Eins)/JFS 5)에 배속되었다. 곧이어 해협 전투와 배틀 오브 브리튼에 참가한 예네바인 하사는 9월 20일의 교전에서 스핏파이어 3대를 단숨에 격추하면서 자신의 첫 전과를 세웟다. 첫 격추에 3대라니! 그것도 상대가 모두 RAF의 스핏파이어! 믿기지 않는 놀라운 전과였다.10월 15일에 또다시 스핏파이어 2기를 격추한 에네바인은 이제 에이스 대열에 발을 디뎠다. 그후 히틀러가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하자 예네바인은 잠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1942년 6월부터 예네바인 하사는 동부전선으로 날아간 제51전투항공단 제2비행중대(2./JG 51)로 소속이 옮겨졌지만, 실전 출격이 금지되어 당분간 전투비행학교에서 비행 교관을 지냈다. 교관 생활을 하면서도 규정을 위반하고 틈틈이 출격을 한 예네바인은 7월 말까지 소련 공군기 14대를 격추시켰고, 결국 연말에는 원대로 복귀하게 된다. 예네바인은 천부적인 운동신경과 강인한 체력, 뛰어난 시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 전투기 조종사로 임무를 수행하기에 매우 유리하기도 했지만, 운수도 좋았다. 1943년 1월 18일의 출격 같은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이다.
4. 서툰 소련 조종사들
그날, 오전 7시 30분에 이륙한 그는 초계 비행 도중에 자신보다 대략 1,000m 낮은 3,000m 고도에서 2개의 삼각형 편대를 짜고 날고 있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들을 발견했다. 둔하고 큼지막해서 쏘아 떨어뜨리기 좋은 Pe-2 폭격기였지만, 단발 전투기에게 하듯이 후방에서 접근하다간 기총 사수에게 일찍 발견되어 기습 효과를 거둘수가 없게 된다. 요제프 예네바인은 DB 601E 엔진을 아이들링 상태까지 회전수를 낮추고 측면으로 빙 돌아 그 폭격기 편대의 뒷쪽 하방으로 조용히 접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6대의 Pe-2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기러기떼처럼 수평비행을 유지하고 있었다.예네바인은 뒷쪽 우측에서 날고 있는 편대기부터 신중히 조준해 차례차례 사격을 퍼부어 1기, 또 1기 격추시켰지만, 눈부신 아침햇살을 안고 날으는 그 폭격기들은 예네바인의 Bf 109F-4에서 토해내는 기총의 화선을 눈치채지 못했고, 이런 식으로 4대가 격추될 때까지 자신들이 공격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5대째 목표를 노리는 순간, 2기가 남은 Pe-2는 좌우로 갈라지면서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사각을 확보한 후방사수로부터는 기총탄이 쏟아졌다. 예네바인은 즉시 스로틀을 밀어 엔진 출력을 높이고 왼쪽으로 날아간 편대장기를 향해 급선회하며 찍어눌렀다. 그날의 5번째 격추는 고도 1,500m에서 이루어졌다. 총알 한발 맞지 않고 1일 에이스(Ace in a day)가 된 것이다.
이런 비슷한 일은 2월 23일에도 일어나 그때도 5대의 Pe-2를 격추시켰고, 다음날인 24일에는 지상부대를 공격하느라 낮게 날으는 Il-2 6대와 그들을 엄호하는 LaGG-3 전투기 1대까지 7대의 적기로 포식을 즐겼다. 이제 그는 상사가 되었고, 격추 스코어는 43기를 헤아리게 된다.
5. 순조로운 격추행진
예네바인은 이런 활약상에 힘입어 3월 1일에 공군 명예컵을 받았고, 4월 12일에는 독일 황금십자장도 수여받았다. 5월 6일에도 5대의 슈투르모빅을 자신의 희생물로 삼은 그는 5월 22일에는 P-39를 떨구면서 60기 격추를 달성했다. 그 후 예네바인 상사는 제51전투항공단 제1비행중대(1./JG 51)로 전속을 갔다. 이 스키 선수 출신 에이스의 마지막 활약은 7월 21일에 또다시 5대를 격추시킨 것을 꼽을 수 있다. 7월 27일, 느지막한 오전에 오룔 방면으로 출격한 그는 오전 11시 25분경 자신의 마지막 전과가 되는 슈투르모빅 1기를 잡아냈다. 그 직후 적기의 반격에 피격된 그는 타고 있던 Fw 190A-6(W.Nr. 550181), 통칭 "슈바르츠 지벤"은 소련 영토에 불시착시켰고, 적병의 추적을 피해 곧바로 도주했지만 그후로 모든 연락이 끊겨 버렸다.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던 그가 결국 돌아오지 않자 전사 처리된 요제프 예네바인은 12월 5일 부로 소위 계급과 기사철십자 훈장이 추서되었다. 요제프 예네바인 소위의 전적은 271회 출격, 격추수 86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 중 5대가 서부전선에서 잡은 스핏파이어이며 나머지 81대가 동부전선에서 기록한 것이다.
6. 서훈
2급 / 1급 철십자 훈장공군 명예컵 (1943년 3월 1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3년 4월 12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3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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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비고 | |
116위 | 헬무트 메르텐스 | 독일 | 97대 | ||
헤르만 슐라인헤게 | 독일 | ||||
118위 | 디트헬름 폰 아이헬-슈트라이버 | 독일 | 96대 | ||
하인리히 회페마이어 | 독일 | ||||
지크프리트 렘케 | 독일 | ||||
121위 | 레오폴트 뮌스터 | 독일 | 95대 | ||
122위 |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 핀란드 | 94대 | 비독일계 1위 비공인 격추까지 합하면 126기 | |
루돌프 뮐러 | 독일 | 101기 격추 기록 존재 | |||
124위 | 루돌프 레슈 | 독일 | 93대 | 스페인 내전에서 1기 격추 | |
하인리히 클뢰퍼 | 독일 | ||||
헬무트 베네만 | 독일 | ||||
에트문트 로스만 | 독일 | ||||
지크프리트 슈넬 | 독일 | ||||
129위 | 게르하르트 로스 | 독일 | 92대 | ||
오스카르 롬 | 독일 | ||||
131위 | 안톤 레슈 | 독일 | 91대 | ||
게오르크 셴트케 | 독일 | ||||
133위 | 하인츠 케메트뮐러 | 독일 | 89대 | ||
134위 | 요제프 예네바인 | 독일 | 86대 | ||
안톤 마더 | 독일 | ||||
울리히 뵈네르트 | 독일 | ||||
137위 | 게르하르트 쾨펜 | 독일 | 85대 | ||
발터 첼로트 | 독일 | ||||
139위 | 하인츠 에발트 | 독일 | 84대 | ||
페터 칼덴 | 독일 | ||||
베르너 콰스트 | 독일 | ||||
▼ 142~177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