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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 카바예/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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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 카바예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1.1. LOSC 릴

릴 유스팀 출신으로 어린 나이 때부터 주목받아 16세에 2군, 그리고 18세에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후보로 간간히 출장하다가 2007-2008시즌부터 릴의 주축 선수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분류되었으나 2008-2009 시즌에 루디 가르시아 감독 아래에서 플레이메이커로 보직을 변경하였고, 이것이 이후 소속팀과 프랑스 대표팀의 판도를 바꿔놓을 신의 한수가 된다. 카바예의 맹활약으로 동 시즌 릴은 5위를 기록하며 UEFA 유로파 리그에 진출한다.

2009-2010 시즌에는 한 술 더 떠서 46경기 동안 무려 15골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릴을 한 순위 더 높은 4위로 이끈다. 당시 프랑스 리그 최고의 공격라인이었던 에덴 아자르제르비뉴가 리그앙을 주름잡는 데에 카바예의 후방지원이 절대적이었다.

2010-2011 시즌에도 최고의 활약으로 팀의 자국 리그 및 프랑스컵 더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2.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10-2011 시즌 종료 직후 그의 계약서에 450만 파운드의 이적 조항이 있음을 알아낸 뉴캐슬이 그를 영입했다. 프랑스 리그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서 릴을 UEFA 챔피언스 리그로 이끈 그가 프리미어리그 중위권 수준인 뉴캐슬로 이적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본인이 EPL에서 뛰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등 번호는 이적한 전 주장 케빈 놀란의 4번을 이어받았다.

시즌 초반부터 셰이크 티오테와 중앙 미드필더 콤비를 이루며 저번시즌 조이 바튼이 맡았던 뉴캐슬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티오테와의 조합은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중앙 미드필드 조합 중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시즌 후반에는 티오테와 호나스 구티에레스가 바쳐주는 4-3-3의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으며 릴 시절에 자주 보여줬던 적극적인 박스 쇄도도 다시 구사하게 되었다.

2011년 10월 22일 위건과의 홈경기에서 후반 36분, 통쾌한 중거리슛으로 팀의 1:0 승리를 이끄는 결승골로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기록하였다.

새해 첫 경기인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후반 2분, 골망을 흔들지 않고 프리킥을 성공시키는 묘기를 보여주며 프리미어리그 2호골을 기록하였다. 팀은 맨유에 3:0 대승.

최고의 경기는 2012년 4월 21일 스토크 시티와의 홈 경기로, 카바예가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며 2골을 넣고 완벽한 스루패스로 파피스 시세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이 때 스토크의 수비라인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카바예의 자로 잰 듯한 패스와 시세의 본능적안 대각선 움직임의 조합이 일품.

뉴캐슬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리그 5위에 오르는데 크게 일조했고, 프리미어 리그 내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플레이메이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2-13 시즌에는 시즌중 2달 정도 부상으로 자리를 비웠는데, 이 기간 뉴캐슬의 성적은 강등이 걱정되었을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어 대체불가능한 선수임이 입증되었다. 아니나다를까 복귀 후에는 넓은 시야를 통해 팀플레이의 숨통을 틔우면서 중거리 슛과 프리킥 등으로 해결사 기질을 과시하며 팀의 분위기도 수직상승. 거기에 겨울이적시장에서 영입된 뉴캐슬의 프랑스 선수 영입 러시에도 암암리에 큰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지며, 주장 파브리시오 콜로치니가 부상을 당하자 주장 완장까지 차고 출장하고 있다. 여러 모로 뉴캐슬의 핵심이 되어 가는 중이다. 2013-14 시즌에는 19경기 7골을 넣으며 활약하고 있다.

1.3. 파리 생제르맹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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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9일, 이적료 2000만 파운드를 제시한 PSG로 이적하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 6개월이다. 등번호는 4번으로 정해졌다.

13/14 겨울 이적 시장에서 파리 생제르맹으로 큰 기대를 받고 이적한 카바예는 일단 주전이 아닌 로테이션 자원으로 티아고 모타, 블레즈 마튀이디, 마르코 베라티에게 밀려 자주 출장하지 못하였으며 선발 출전의 경우에도 기대치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PSG의 플레이 스타일과 본인의 스타일이 잘 맞지 않는 듯.

14년 2월 18일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레버쿠젠전에서 이적 후 첫 골을 기록하였다.

12-13시즌까지 PSG를 담당하던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고, 13-14시즌에 로랑 블랑이 PSG로 부임하면서 카바예는 더더욱 서브로 밀려나게 되는데 433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라인을 끌어올린 채로 패싱 게임을 바탕으로 어떤 팀을 상대로든 일단은 가패 국면을 만드는걸 좋아하는 블랑[1]의 특성 상, 프랑스 국가 대표팀에서건 뉴캐슬에서건 말 그대로 한 템포 늦은 상황에서의 침투 공격이나 2선으로의 침투 후, 공격 상황의 주도를 맡는 플레이를 잘하는 카바예가 블랑의 전술에 녹아드는 것이 더욱 쉽지 않은 상황이다.

PSG 미들 라인의 오버래핑은 대체로 활동량과 스피드가 탁월하고 공격 상황이 수세로 전환될 시의 가공할 수비 전환 능력을 보이는 마튀이디가 주로 담당하는데다 전체적인 경기 조율과 마무리 킬패스 등의 플레이메이킹을 베라티가 담당, 탄탄한 체격과 터프한 플레이, 마튀이디와 베라티를 보호하는 모타가 이미 PSG 3미들 라인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며 카바예가 전체적인 면을 봤을 때에는 위에서 언급한 세 능력[2]이 다 나쁘지 않은 편이나 능력 하나하나 씩만 놓고보면 전부 저 위의 세 명의 미드필더보다 뒤쳐지는 것이 사실이기에 더더욱 암울한 상황.

카바예 본인도 장기간에 걸쳐 본인이 서브 로테이션 자원 취급을 받자 난생 처음 당하는(...) 서브 자원 취급에 멘탈적으로도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인 듯.

14/15 시즌에 접어들어서도 주전으로 나올 것 같지는 않은 상황이며 일단 마튀이디, 모타, 베라티의 삼미들 라인이 하나같이 부진없이 잘하고 있다. 다만 요근래 모타와 마튀이디가 부상 강림 상황인 지금 와중이 카바예에게 있어서는 주전으로 도약할 실질적으로 유일한 기회. 그러나 본인도 부상의 늪에 빠져버렸다.

1.4. 크리스탈 팰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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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위와 같은 상황에서 카바예는 2015년 7월 10일, 뉴캐슬 시절 감독이었던 앨런 파듀가 이끄는 수정궁으로 이적하였다. 이적료는 1200만 파운드로 추정된다.

이적 이후 빠른 적응을 보여주며 수정궁의 상승세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수비면에서의 발전이 무서울 정도. 2015년 EPL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로 성장했다. 리그 수준차를 떠나 선수 본인에게 맞는 리그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 그리고 팀을 FA컵 결승으로 이끌었으며,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16-17시즌에도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한국 팬들에게 벤테케에 이어 그나마 좋은 선수라는 인식이 박혔다.

2017-18시즌 시즌 초반 팀이 승리를 전혀하지 못하고 무승부도 거두지 못할 때 그나마 사람같은 플레이를 보였고, 이후 팀이 상승세를 타게 되는 주역이 되었다. 시즌 종료 후 2018년 7월 3일, 자유 계약으로 아랍 에미리트의 알 나스르 SC로 이적하였다.[3]

1.5. 알 나스르 SC

2년 계약으로 알 나스르 SC에 합류하였으나 6개월만 뛴 후 계약을 해지하고 팀을 떠났다.

1.6. AS 생테티엔

2019년 8월 27일, 생테티엔과 1년 계약을 맺고 팀에 합류하였다. 릴, 뉴캐슬 시절의 영혼의 단짝 마티유 드뷔시와 재회하였다. 시즌 초반에는 교체 멤버로 주로 뛰었고 후반기에는 주전 멤버로 꾸준히 출전하면서 상승세를 탔는데 코로나19 사태로 리그가 조기종료 되면서 더이상 뛰지 못하고 2020년 6월 1일 계약이 종료된 후 팀을 떠났다.

2021년 2월 20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 다만 블랑의 전술 전환 능력이 다른 유럽 탑 클래스 감독들에 비해 약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인지라 가패하려다 철퇴 얻어맞고 허둥지둥하다 패하거나 무를 캐는 경우가 상당히 있는 편[2] 플레이메이킹, 침투, 미드필더 라인 보호[3] 과거 이천수와 임금 체불 문제로 마찰을 빚었던 구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구단으로 서로 다른 구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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