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王玉環항일 빨치산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최용건의 아내다.
2. 생애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부녀대원으로, 1936년에 조직된 5군 산하 부녀단 단장이 되었다. '중국인 지주 왕통주의 딸로, 최용건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는 잘못된 일화가 유명하지만, 그것은 동북항일연군 7군 군장 경락정의 아내 왕옥길의 얘기로, 왕옥환은 처음부터 부녀대원이었다. 처음에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같은 중국인 군관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이 전사한 이후 저우바오중의 소개로 최용건과 결혼하였다.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말을 잘 타는 여장부로, 김일성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기마술이 뛰어났다"고 적혀 있다. 중국인 남편과 낳은 아들은 최용건이 거두어 키웠으며, '중국과 조선의 우호관계를 빛내라'고 이름을 왕중조로 지었다가 나중에 1960년대에 중국으로 귀국하였다.워낙 기가 센 여장부라서, 항일연군 안에서 조선인이란 이유로 '협애한 민족주의자, 파쟁성견'이라고 음해를 당하는 남편 최용건을 당당히 대변해주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피신한 이후 88국제보병여단으로 편성되어 통신부대원이 되어 소련군으로부터 무전 기술을 익혔다. 김정일의 유모 이재덕은 "왕옥환이 한족이었지만 동료들은 그녀를 조선인으로 대우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 김정일을 키우는 일에도 참여해서 김정일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귀국 후에는 부녀사업에 종사하면서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다. 다만 항일연군 출신 여대원의 큰언니 역할을 하면서 김정숙이 죽은 후 김성애와 그의 재혼에 관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5년 9월, 조선민주녀성동맹 제3차 대회에서 김성애, 허창숙[1], 리정순, 김은순, 량창숙, 최금자와 함께 녀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 1965년 12월, 서채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건강이 악화되어 1966년에 루마니아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71년 10월, 조선민주녀성동맹 제4차 대회에서 허창숙, 류은보, 리정순과 함께 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6년, 남편 최용건이 사망한 후에는 조중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3년 6월, 녀맹 5차 대회에서 강점숙(서기장 겸임), 허창숙, 정명희, 오연옥과 함께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살아있던 다른 빨치산들과 함께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5년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2005년 4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대조국전쟁 승리 6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죽은지 31년만인 2007년 1월 16일에 사망하였다. 김정일이 애도를 표하면서 화환을 전달하였다. 이후 남편인 최용건처럼 장의위원회는 구성되지 않았으나, 시신은 남편 최용건과 함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합장되었다.
3. 매체에서
- 여명의 그날에서는 남윤경이 분했다.
4. 참고문헌
- 유순호, 김일성 1912~1945 하권 - 역경과 결전(서울: 서울셀렉션, 2020).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