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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9-01 15:51:04

왕범

王範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 남해 사람.

2. 생애

책 읽기를 좋아했고 사람이나 사물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었으며, 오나라에서 손호 때 문을 닫아걸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이유를 묻자 탄환과 화살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것은 영리한 새가 아니요, 어지러운 세상에 처해 명성과 영달을 구하는 것은 지혜로운 선비라고 말하니 사람들이 명언으로 여겼다.

백월선현지에서 통일 후 진나라에서 웅목에게 고을 사람 중 덕이 가득하고 재능이 성함이 왕범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천거해 왕범을 광주대중정이 있다는 잘못된 기록이 있는데, 웅목은 왕범이 오나라에 출사하지 않고 웅목이 오나라가 평정되기 전에 죽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이는 오류로 왕범은 오나라 때 웅목의 천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79년에 광주에서 곽마가 반란을 일으켜 서기를 쫓아내자 서기를 따라 피난가면서 5년 동안 밤낮으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았다. 관청에서 그의 행실을 어질게 여겨 관직에 천거하고 불렀지만 모두 사양했다.

오나라를 평정한 진나라에서 구품관인법을 시행해 주마다 대중정과 소중정을 두어 모두 그 고장 사람으로 삼았는데, 왕범을 광주대중정으로 삼으면서 인재를 선발하고 추천함에 있어 모두 세상의 여론에 부합했다.

사마표가 지은 구주춘추가 당대에 유행해 이를 읽어보고는 영복 지역에 대한 기술이 간략해 기록이 실제와 부합하지 않자 백월 지역의 고사와 제도를 수집해 책을 짓고 이름을 교광이주춘추라 했다. 287년에 교광이주춘추를 조정에 바쳤고 바로잡아 기술한 것이 법도에 맞고 엄밀해 사람들이 이를 보고 모두 칭찬하고 감복하면서 명성이 낙양까지 진동했다.

사람됨이 탁월하고 비범해 세속의 번잡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늙어서도 학문에 독실해 쉬지 않았는데, 왕범 이전에는 양부, 육윤 등이 지은 것 밖에 없었고 역사적 기록이 부족했다. 왕범이 체계적으로 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했고 후대에 교주, 광주의 역사에 대해 황공, 심원, 고미, 배연 등이 저술했지만 대체적으로 왕범이 기록한 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범원, 혜함 등은 왕범이 미처 다 갖추지 못한 부분을 보완한 것이지만, 모두 왕범의 시작을 이어받은 것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