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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08:07:44

영국의 캐롤라인 마틸다 공주

<colbgcolor=#ADD8E6><colcolor=#000000> 덴마크-노르웨이 크리스티안 7세의 왕비
영국의 캐롤라인 마틸다 공주
Princess Caroline Matilda of Great Britain
파일:Francis_Cotes_Princess_Caroline_Matilda.jpg
이름 영어 캐롤라인 마틸다
(Caroline Matilda)
덴마크어 카롤리네 마틸데
(Caroline Mathilde)
출생 1751년 7월 22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레스터 하우스
사망 1775년 5월 10일 (향년 23세)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첼레
배우자 크리스티안 7세 (1766년 결혼 / 1772년 이혼)
자녀 프레데리크 6세, 루이세 아우구스타
아버지 웨일스 공 프레더릭
어머니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 공녀
형제 어거스타, 조지 3세, 에드워드, 엘리자베스, 윌리엄 헨리, 헨리, 루이자, 프레더릭
서명
파일:영국의 캐롤라인 마틸다 공주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결혼3.3. 왕비3.4. 스캔들3.5. 이혼과 망명3.6.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영국과 하노버의 공주이자 덴마크 크리스티안 7세의 왕비. 웨일스 공 프레더릭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의 5남 4녀중 4녀이자 막내로, 조지 3세의 막내여동생이다.

2. 작위

파일:Coat_of_arms_of_Queen_Caroline_Matilda.png
문장

3. 생애

3.1. 어린 시절

파일:255033-1330620283.jpg
어린 시절
1751년 7월 22일 조지 2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유복녀로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 날 세례를 받았고 대부모는 오빠 에든버러 공작 조지 왕자와 고모 캐롤라인 공주, 언니 오거스타 공주였다. 아버지 웨일스 공 프레더릭은 캐롤라인 마틸다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이 자랐다고 한다.
가족 초상화[2]
어머니 어거스타 왕세자비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아이들을 영국의 궁정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녀는 외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고 격리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캐롤라인 마틸다는 어린 시절을 정치와 궁중 음모로부터 벗어나 더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승마를 좋아했고, 음악적으로도 재능이 있었으며 언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3.2. 결혼

1764년, 덴마크 왕실은 크리스티안 왕세자영국의 공주를 결혼시키고자 했다. 크리스티안 왕세자의 어머니는 영국의 루이자 공주조지 2세의 딸이기도 했다. 덴마크 왕실과 영국 왕실은 모두 개신교였고, 영국의 루이자 공주가 덴마크에서 매우 인기있던 왕비였기 때문에 덴마크에서는 또 영국 출신인 왕세자비를 들이고 싶어했다. 맨 처음에는 캐롤라인 마틸다의 언니인 루이자 공주와 혼담이 오갔으나, 루이자 공주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당시 13살이었던 캐롤라인 마틸다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3]

결혼을 한창 준비중이던 1766년 1월 14일, 덴마크 국왕프레데리크 5세가 사망하여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크리스티안 7세로 즉위했다. 1766년 10월 1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크리스티안 7세와 캐롤라인 마틸다는 대리인을 통해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덴마크의 왕비가 된 그녀는 카롤리네 마틸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3.3. 왕비

파일:Caroline_Matilda,_Queen_of_Denmark_and_Norway.jpg
왕비 시절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는 통통하고 외모가 아름다운 편은 아니었으나,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에게 딱딱한 덴마크 왕실은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자기중심적이고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남편이자 고종사촌인 크리스티안 7세는 아내에게 항상 냉담했다.

항상 외로움을 느꼈던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는 시녀장인 루이제 폰 플레센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루이제 폰 플레센은 방탕하게 놀던 크리스티안 7세를 왕비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냉담했던 부부사이는 루이제 폰 플레센으로 인해 더욱 멀어졌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7세의 오랜 스승인 레베르딜이 국왕을 설득한 끝에, 두 사람 사이에서는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태어났다. 후계자를 생산한 카롤리네 마틸데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1768년 루이제 폰 플레센은 궁정에서 추방당하였고 이는 카롤리네 마틸데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녀장을 추방한 남편을 원망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들이 태어난 이후 크리스티안 7세는 코펜하겐의 사창가를 들락거려서 부부 사이는 다시 악화됐다.

1768년 크리스티안 7세는 유럽 여행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 궁을 비웠다. 그가 없는 동안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는 아들을 키우면서 코펜하겐 시내를 산책하기도 했는데, 당시 덴마크 귀족 여성들은 반드시 마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이는 큰 논란이 되었다. 또 남편이 없는 사이에 프랑스 배우와 염문설이 나는 등, 카롤리네 마틸데의 평판은 크게 떨어졌다.

3.4. 스캔들

파일:1280px-Struensee_Juel-01.jpg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크리스티안 7세는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를 왕실 주치의로 데려왔다. 슈트루엔제는 정신 건강에 이상이 있던 크리스티안 7세를 쉽게 진정시켰고, 국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국왕에게 왕비와 잘 지낼 것을 조언했으며 실제로 크리스티안 7세는 아내를 위해 3일동안 생일 파티를 열어 주는 등, 부부 관계가 어느정도 개선되기도 하였다.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는 맨 처음에는 슈트루엔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이내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또 슈트루엔제는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의 수종병을 고치고 프리데레크 왕세자에게 천연두 예방접종을 함으로써 더욱 국왕 부부의 신뢰를 얻었다. 슈트루엔제는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 개인 방을 얻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해졌다. 크리스티안 7세는 점점 슈트루엔제에게 더욱 의존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하였고, 국정 업무 또한 슈트루엔제에게 맡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1770년부터,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와 슈트루엔제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슈트루엔제는 왕비의 지원을 등에 업고 권력을 확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정적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결국 영국에 있던 어머니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가 직접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를 만나 충고를 하려 했으나, 왕비의 곁에 끊임없이 슈트루엔제가 있는 바람에 제대로 조언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1771년에는 슈트루엔제의 권력이 더욱 확대되어 크리스티안 7세가 서명만 해준다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슈트루엔제의 시대는 시작되었고, 1771년부터 1772년까지 슈트루엔제는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771년 7월 7일 카롤리네 마틸데는 딸 루이세 아우구스타 공주를 낳았다. 공식적으로 공주의 아버지는 크리스티안 7세였지만, 사람들은 루이세 아우구스타 공주의 외모가 슈트루엔제와 똑같이 생겼다며 그녀가 슈트루엔제의 딸이라고 생각했다. 공주가 태어난 이후 덴마크 왕실에선 카롤리네 마틸데 왕비가 크리스티안 7세를 폐위시키고 섭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크리스티안 7세의 계모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율리아네 마리와 그녀의 아들이자 크리스티안의 이복동생 프레데리크 왕자는 슈트루엔제의 막강한 권력과 그가 실행하는 개혁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슈트루엔제의 개혁은 전통적인 덴마크노르웨이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매우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를 지지했던 국민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한 국민들은 슈트루엔제와 대놓고 바람을 피는 카롤리네 마틸데를 경멸했다.

결국 1772년 1월 16일 가면 무도회가 끝난 밤 율리아네 마리 왕대비와 프레데리크 왕자는 군대를 동원해서 슈트루엔제와 카롤리네 마틸데를 체포했다. 카롤리네 마틸데는 딸과 헬싱외르에 있는 크론보르 성에 갇혀 자신의 몰락을 기념하는 축제를 창문 밖으로 바라봐야 했다. 모든 걸 잃은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딸 루이세 아우구스타 공주였다.

3.5. 이혼과 망명

체포된 뒤 심문을 받게 된 슈트루엔제는 왕비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책임을 카롤리네 마틸데에게 떠넘기다가 결국 불륜을 인정하였다. 카롤리네 마틸데의 시녀들도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불륜 혐의를 입증했다. 카롤리네 마틸데는 슈트루엔제를 살리기 위해 처음에는 불륜 사실을 부정했지만 그가 시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정하고 말았다. 변호사는 카롤리네 마틸데의 자백은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녀는 크리스티안 7세와 이혼하게 되었다. 슈트루엔제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이 소식을 들은 오빠 조지 3세는 카롤리네 마틸데를 석방시키기 위해 덴마크와 협상을 진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조지 3세는 함대를 덴마크로 보내 군사적으로 위협할 생각이었지만, 함대가 코펜하겐에 도착하기 직전에 협상이 이루어져 카롤리네 마틸데의 덴마크 추방으로 마무리되었다. 또 그녀가 덴마크의 왕비 지위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조지 3세는 추방된 여동생을 하노버 선제후국의 첼레로 보냈다. 카롤리네 마틸데는 첼레로 떠나면서 다시는 아이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3.6. 말년

첼레에서 카롤리네 마틸데는 책을 읽고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며 조용한 삶을 보냈다. 또 그녀는 그곳에서 예전 시녀장이었던 루이제 폰 플레센과 재회할 수 있었고, 많은 친척들이 그녀를 찾아오기도 했다.

비록 덴마크에서 추방당했지만 카롤리네 마틸데는 프레데리크 왕세자의 어머니로써 덴마크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카롤리네 마틸데가 덴마크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불러일으켰고, 조지 3세와 카롤리네 마틸데는 진지하게 덴마크로의 복귀를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1775년 5월 10일 카롤리네 마틸데가 성홍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이러한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망 당시 그녀의 옆에는 "자신은 결백하다"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사망 후 유해는 첼레의 세인트 마리엔 교회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 근처에는 비슷한 삶을 살았던 증조할머니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가 함께 묻혀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영국의 캐롤라인 마틸다 공주
(Princess Caroline Matilda
of the United Kingdom)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1세
(George I)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Princess Sophia Dorothea of Celle)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
(John Frederick, Margrave of Brandenburg-Ansbach)
작센아이제나흐의 엘레오노레 에르드무테 공녀
(Princess Eleonore Erdmuthe of Saxe-Eisenach)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1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바이센펠스의 막달레나 지빌레 공녀
(Princess Magdalena Sibylle of Saxe-Weissenfels)
안할트체르프스트의 막달레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Magdalena Augusta of Anhalt-Zerbst)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카를
(Charles, Prince of Anhalt-Zerbst)
작센바이센펠스의 조피 공녀
(Princess Sophia of Saxe-Weissenfels)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프레데리크 6세
(Frederick VI)
1768년 1월 28일 1839년 12월 3일 헤센카셀의 마리[4]
슬하 2녀
1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부인
루이세 아우구스타
(Louise Augusta, Duchess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Augustenburg)
1771년 7월 7일 1843년 1월 13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2세
슬하 2남 1녀[5]

5. 대중매체

참고로 슈트루엔제와 캐롤라인의 관계는 덴마크에서는 한국의 장희빈숙종이나 영국의 헨리 8세와 여섯 부인들급으로 워낙 유명한 역사 스캔들이라 모르는 국민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자주 극화되는 소재라고 한다.


[1] 덴마크에서는 캐롤라인이 추방된 1772년 4월부터 캐롤라인의 왕비 작위를 박탈했지만 영국에서는 죽을 때까지 캐롤라인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라고 칭했다. 참조[2] 가운데 어거스타 왕세자비에게 안겨있는 아기가 캐롤라인 마틸다이다.[3] 결국 루이자 공주는 1768년에 1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4] 고모 덴마크의 루이세의 딸로 고종사촌이다.[5]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2세, 덴마크의 왕비 카롤리네 아말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