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희대로3길56(회기동) |
1. 개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희대로 3길 56(회기동)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이다.
연산군의 생모 제헌왕후 윤씨(폐비윤씨)의 해원석결과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원찰로 세워진 사찰이다.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를 모신 의릉이 세워진 후, 의릉의 능침사로 지정된다.
- 능침사(陵寢寺)는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사찰이다. 능침사에는 선왕의 어영(御影)이나 위패가 봉안 되었고, 기신(忌晨) 때마다 재가 치러졌다. 능에서 제사가 있을 때는 능침사에서 제수를 마련해 공급하였다.
2. 연화사의 역사
2.1. 조선시대
2.2. 근대
2.3. 현대
역대 주지년부터. 년까지 법성
년부터. 년까지 법보
년부터. 년까지 자음
연화사의 퇴락한 전각들을 전면 개축하여, 연화사 대웅보전 극락전 선원 신축하였다.
년부터. 년까지 정일
년부터. 년까지 대안
년부터. 년까지 묘장
연화문화센터 설립, 구립 초롱어린이집 수탁운영
년부터. 년까지 장명
관음전 신축 무애당 증축
년부터. 년까지 묘장
3. 연화사 산하 기관
3.1. 연화사 문화센터
3.2. 상기티칼리지(연화사 불교대학)
3.3. 연화사 어린이도서관 풍경과나눔
3.4. 동대문구 초롱 어린이집
3.5. 동대문구 햇살 어린이집
4. 연화사 문화재
연화사 천수관음도 (蓮花寺 千手觀音圖) |
4.1.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연화사 천수관음도
이 불화는 漢峰 應作, 寶山 福柱, 淸菴 雲照, 大凡, 奉典, 海梵 등이 조성한 천수관음도로서, 1901년에 괘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칠성도 등과 함께 일괄 조성되었다. 바다 가운데로 솟아오른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은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淨甁과 經冊을 받쳐 든 4臂와 함께 40臂를 갖추고 있는데, 광배 안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득 그려넣어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구제력을 형상화하였다.
천수관음(Sahasrabhuja-avalokitesvara)은 천 개의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을 응시하고 천 개의 자비로운 손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로, 千手千眼觀音이라고도 한다. 이 관음은 인도 힌두교의 多面多臂의 神像에서 기원하였는데, 4~5세기에 이르러 인도에서 밀교가 발달함에 따라 힌두교의 다면다비상의 독특한 이미지는 불교에도 영향을 주어, 천개의 손에 천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두루 보고 구제해준다고 하는 천수천안관음이 탄생하였다. 천수관음의 형상에 대해서는 『千光眼觀自在菩薩秘密法經』(唐 蘇縛羅釋)에 “11면의 얼굴에 40개의 손이 있고 각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있으며, 11면은 각각 菩薩相, 百牙出上相, 忿怒相, 暴笑相, 如來像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천수관음도로 유일하게 전하는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천수관음도와 1532년에 조성된 일본 지코지(持光寺)소장 천수관음도 역시 11면에 40개(또는 42개)의 손 각각에 지물을 들고 있어 경전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연화사 천수관음도에는 연화대좌 좌우로는 합장을 한 선재동자와 龍角을 든 용왕이 관음보살을 향해 서 있다. 여기에서와 같이 천수관음도에 선재동자가 묘사된 것은 『화엄경』入法界品에 의한 것으로,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 菩薩行과 菩薩道를 묻는 도중 28번째로 보타락가산에 머물고 있는 관음보살을 찾아가 청법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일찍이 천수관음도에 『화엄경』적 요소가 결합되었으며, 앞에서 서술한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고려 천수관음도 및 일본 지코지소장 천수관음도(1532년)에도 선재동자가 그려졌다. 한편 이 천수관음도에서 선재동자와 상대하여 용왕을 묘사한 것은 조선후기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시대 이래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잇고 있는 한편, 조선후기 이래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연화사 천수관음도의 도상은 이후 대산사 천수관음도(1925년)로 계승되었다.
이 불화는 漢峰 應作가 수화사가 되어 寶山 福柱, 淸菴 雲照, 大凡, 奉典, 海梵와 함께 조성하였다. 응작은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연화사를 비롯하여 봉원사, 청룡사 등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초기에 대은당 돈희, 보산당 복주, 청암당 운조, 대범, 봉전 같은 화승들과 함께 작업 했는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화승인 경선당 응석의 초본을 이용한 작업을 하는 등 서울지역의 화풍을 두루 섭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하였다. 이 불화의 본존인 관음보살의 둥글고 살이 많은 듯한 얼굴표현이라던가 단정한 이목구비에서 응석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 천수관음도는 고려~조선시대 천수관음도의 도상을 계승한 작품으로서, 19~20세기 서울·경기지역 불화의 흐름 및 화승의 활동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하다. 천수관음도는 서울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물게 남아 있다.
천수관음(Sahasrabhuja-avalokitesvara)은 천 개의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을 응시하고 천 개의 자비로운 손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로, 千手千眼觀音이라고도 한다. 이 관음은 인도 힌두교의 多面多臂의 神像에서 기원하였는데, 4~5세기에 이르러 인도에서 밀교가 발달함에 따라 힌두교의 다면다비상의 독특한 이미지는 불교에도 영향을 주어, 천개의 손에 천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두루 보고 구제해준다고 하는 천수천안관음이 탄생하였다. 천수관음의 형상에 대해서는 『千光眼觀自在菩薩秘密法經』(唐 蘇縛羅釋)에 “11면의 얼굴에 40개의 손이 있고 각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있으며, 11면은 각각 菩薩相, 百牙出上相, 忿怒相, 暴笑相, 如來像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천수관음도로 유일하게 전하는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천수관음도와 1532년에 조성된 일본 지코지(持光寺)소장 천수관음도 역시 11면에 40개(또는 42개)의 손 각각에 지물을 들고 있어 경전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연화사 천수관음도에는 연화대좌 좌우로는 합장을 한 선재동자와 龍角을 든 용왕이 관음보살을 향해 서 있다. 여기에서와 같이 천수관음도에 선재동자가 묘사된 것은 『화엄경』入法界品에 의한 것으로,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 菩薩行과 菩薩道를 묻는 도중 28번째로 보타락가산에 머물고 있는 관음보살을 찾아가 청법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일찍이 천수관음도에 『화엄경』적 요소가 결합되었으며, 앞에서 서술한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고려 천수관음도 및 일본 지코지소장 천수관음도(1532년)에도 선재동자가 그려졌다. 한편 이 천수관음도에서 선재동자와 상대하여 용왕을 묘사한 것은 조선후기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시대 이래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잇고 있는 한편, 조선후기 이래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연화사 천수관음도의 도상은 이후 대산사 천수관음도(1925년)로 계승되었다.
이 불화는 漢峰 應作가 수화사가 되어 寶山 福柱, 淸菴 雲照, 大凡, 奉典, 海梵와 함께 조성하였다. 응작은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연화사를 비롯하여 봉원사, 청룡사 등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초기에 대은당 돈희, 보산당 복주, 청암당 운조, 대범, 봉전 같은 화승들과 함께 작업 했는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화승인 경선당 응석의 초본을 이용한 작업을 하는 등 서울지역의 화풍을 두루 섭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하였다. 이 불화의 본존인 관음보살의 둥글고 살이 많은 듯한 얼굴표현이라던가 단정한 이목구비에서 응석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 천수관음도는 고려~조선시대 천수관음도의 도상을 계승한 작품으로서, 19~20세기 서울·경기지역 불화의 흐름 및 화승의 활동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하다. 천수관음도는 서울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물게 남아 있다.
4.2.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연화사 목각석가여래설법상
연화사 목각석가여래설법상은 1901년에 제작되었을 정황을 전하는 문헌기록이 있다. 조선후기의 새로운 장르인 목각설법상은 전체 수량이 많지 않은 가운데 주로 아미타 설법을 주제 로 만들어지는데, 연화사 목각석가여래설법상은 석가의 설법을 주제로 한 점이 특징이다. 구도는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석가모니 후불화와 유사하여 연화사 불화 불사를 담당한 서울경기지역 불화승이 초본을 제작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근대시기 조각과 불화의 관계를 살펴볼 수도 있는 자료이다. 등장인물의 얼굴은 조선후기 불상의 평면적인 얼굴에 비해 갸름하고 입체적이다. 본존의 대좌 에는 목각설법상에 전통적으로 표현된 상현좌가 적용되었다. 대좌 아래에는 당시 불화에서 볼 수 있는 연줄기와 식물문양을 표현하되 좌우대칭이 분명한 팔메트연화문을 조각하였다. 석가를 둘러싼 6위의 보살은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미륵, 세지로 보인다. 백의관음의 이와 같은 정병 을 든 모습은 조선후기에 보이지만 20세기 불화에서 더욱 확산되었다. 특히 관음이 손가락을 펴서 석가를 가리키는 모습에서 근대적인 특징이 읽힌다. 가섭과 아난은 현실인물에 맞게 표현하였고 사천왕은 2구로 축소 배치하였다. 20세기 초반의 사진이 있어 원형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연화사 목각석가여래설법상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요소를 사용하는 20세기 초반 불교미술의 특징을 보여준다.
4.3.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연화사 신중도
201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면 바탕에 채색. 세로 154.2㎝, 가로 208㎝. 연화사 신중도는 1901년에 괘불, 천수천안관음탱, 현왕탱, 칠성탱, 산신탱 등과 함께 조성된 후 대웅전에 봉안되었다. 불화의 증명은 완허 보□(玩虛 普□), 월해 화□(越海 和□), 대은 돈희(大恩 頓喜), 연응 정현(沿應 正現)이 참여하였고 불화의 조성에는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위시하여 덕월 응륜(德月 應崙), 대은 돈희, 계은 봉법(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 亘法), 금운 정기(錦雲 正基), 한곡 돈법(漢谷 頓法), 한명 한□(漢溟 漢□), 청암 운조(淸庵 雲照), 재겸(在謙), 두삼(斗三), 창오(昌旿) 등 12명의 화승들이 동참하였다.
화면 상단에 제석천과 범천이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하단의 중앙에 동진보살(위태천)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 모든 장방형의 광배를 등지고 있어 중심 구도가 역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의 양 측면에 무장신과 일월천신 등을 빈 공간 없이 배치하고 제석천과 범천의 사이에 악기를 연주하는 천동 · 천녀를 중앙에 모아 표현함으로써 화면 전체의 안정감을 준다.
연화사 신중도의 모본은 남양주 흥국사 신중도(1883년)이다. 이 불화의 제작에 참여한 봉법(奉法), 긍법(亘法), 돈법(頓法), 두삼(斗三), 창오(昌旿) 등이 남양주 흥국사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했던 화승들인 점을 고려하면 남양주 흥국사 신중도와 이 불화와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짙은 적색을 주조색으로 하면서 각 존상의 두광 등을 하엽(荷葉) 계열의 짙은 녹색을 사용한 점, 천공을 짙은 청색으로 처리한 점은 19세기 불화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채색법이다. 조선 말기의 불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금박(金箔)을 활용하여 신장상의 무기와 제석천 · 범천의 의복 등에 활용하고 있는 점, 의복 주름 처리에 바림법을 사용한 점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서울 · 경기 지역의 화풍이다. 화면 상단의 채색이 약간 어둡게 변색되었지만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남양주 흥국사 신중도와 서울 봉은사 신중도는 서울 · 경기 지역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유행했던 신중도를 대표하는 2가지 유형의 불화이다. 연화사 신중도는 두 대표 유형 중 남양주 흥국사 화승들의 활동 반경과 이들에 의한 불화 초본의 유통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4.4.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연화사 지장시왕도
201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면 바탕에 채색. 세로 166㎝, 가로 213.2㎝. 중앙의 연화대좌 위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양 측면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좌우로 시왕, 지장삼존의 아래쪽에 사자, 판관 등을 배치한 지장시왕도이다. 불화의 화기가 남아 있지는 않으나 1901년에 상궁들의 발원으로 괘불도와 아미타불도, 신중도, 천수관음도, 칠성도 등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불화불사는 수화승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위시하여 덕월 응륜(德月 應崙),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 亘法), 금운 정기(錦雲 正基), 한곡 돈법(漢谷 頓法), 한명 한□(漢溟 漢□), 청암 운조(淸庵 雲照), 재겸(在謙), 두삼(斗三), 창오(昌旿) 등 12명의 화승들이 동참하여 조성하였다.
중앙의 연화대좌 위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합장한 채 지장보살을 향하여 시립해 있다. 지장보살은 투명한 흑색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주, 왼손에는 석장을 들고 있는 형상이며 둥근 신광에는 금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상단에는 2벌의 8곡병풍을 배경으로 시왕이 홀을 들거나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으로 본존을 향해 시립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판관과 사자 등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 부분에는 판관이 지장보살에게 명부의 일을 아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연화사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19세기 경기 지역의 유명한 화승이었던 경선 응석(慶船 應釋)이 출초한 서울 보문사 묘승전 지장시왕도 초본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한 것으로, 서울 청룡사 대웅전 지장시왕도(1868년), 안정사 지장시왕도(19세기)와 매우 유사하다.
4.5. 의의와 평가
광배를 금색으로 채색하는 수법과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은 19세기 후반의 서울 · 경기 지역의 사찰에 봉안된 불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적인 특징이다. 채색 및 인물 표현뿐만 아니라 19세기 후반 서울 · 경기 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4.6.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칠성도
두 손을 포개어 金輪을 받쳐 들고 있는 熾盛光佛과 日·月光菩 薩, 七星佛과 七元星君, 老人星과 三星(三台六星 중 삼성) 등으로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보이는 칠성도이다. 솟아 오른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자세의 치성광불은 양어깨를 다 덮은 通肩衣를 착용하였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에 반가좌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하여 합장하고 있는데 머리의 관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색 원과 흰색 원을 표현하였다. 본존불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는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틀고 있으며, 칠원성군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장한 채 본존불을 향하여 서 있다. 19~20세기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던 漢谷 頓法이 수화원을 맡고 漢明 幻照, 斗三, 太湖, 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大韓 光武 5年)에 조성하였다. 이 칠성도는 연화사에 봉안된 아미타불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천안관음보살도 등과 함께 1901년에 조성되어, 동일 유파 화승들 화풍을 살펴 볼 수 있는 그림으로서, 19~20세기 경기지역 화풍을 파악하는데 학술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民畵風이 역력한 산신도로서 중앙에는 팔걸이 의좌에 앉아 있는 도인 모습의 산신을 그린 다음, 오른쪽에는 시중을 드는 동자상을 배치하고 왼쪽에는 산신의 상징인 호랑이를 그려 놓았다.
화면 중앙에 큼직하게 그려진 산신의 모습은 풍채 좋은 체구에 백발이 성성한 둥글넓적한 얼굴에 모자 모양의 투명 두건을 쓴 채 오른손으로는 긴 수염을 쓰다듬고 있으며, 왼손에는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다.
표범 무늬가 선명한 왼쪽의 호랑이는 쫑긋한 두 귀에 앞발을 세워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민화풍으로 익살스러우며, 오른쪽에 위치한 두 명의 동자상은 서로 대화를 나누듯 다정스러운 모습으로 어깨에 걸쳐 기물을 들고 서 있다.
그림의 뒤 배경은 老松과 폭포가 길게 떨어지는 깊은 계곡을 표현하여 산신도나 독성도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深山幽谷을 나타냈다.
연화사 산신도와 유사한 모습의 산신도로는 禮雲堂 尙奎가 1903년(광무 7)에 그린 경기도 남양주 봉영사 봉안의 산신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8호)가 그 예로, 椅坐像의 산신 모습, 두 명의 동자와 지물, 호랑이, 심산유곡의 배경처리 등에 있어 동일화풍을 엿볼 수 있어 영향관계가 보여, 20세기 전반 산신도 도상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