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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06:21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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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초대 재무장관 배우자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해밀턴
Elizabeth Schuyler Hamilton
파일:Mrs._Elizabeth_Schuyler_Hamilton.jpg
출생 1757년 8월 9일
사망 1854년 11월 9일 (향년 97세)[1]
배우자 알렉산더 해밀턴 (1780년 결혼)
경력 미국 초대 재무장관 부인(1789~1795)[2]
자녀 필립 해밀턴[3](1782 ~ 1801)
안젤리카 해밀턴(1784 ~ 1857)
알렉산더 해밀턴 주니어(1786 ~ 1875)
제임스 알렉산더 해밀턴(1788 ~ 1878)
존 처치 해밀턴(1792 ~ 1882)
윌리엄 스티븐 해밀턴(1797 ~ 1850)
일라이자 해밀턴 홀리(1799 ~ 1859)
필립 해밀턴 2세[4](1802 ~ 1884)
성별 여성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와 결혼 생활2.2. 알렉산더 해밀턴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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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부인. 당대 미국 사교계 명사이자 자선가,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뮤지컬 해밀턴을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졌다.

2. 생애

2.1. 유년기와 결혼 생활

엘리자베스는 1757년 뉴욕 주 올버니에서 부유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네덜란드계 스카일러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엘리자베스보다는 흔히 일라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일라이자에게는 총 14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그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7명 뿐이었다.

1780년 일라이자는 뉴저지에서 조지 워싱턴의 부하 중 하나인 알렉산더 해밀턴을 만났다. 해밀턴을 포함한 조지 워싱턴의 부대는 뉴저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 해 말 스카일러 가문의 저택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후 일라이자는 조지 워싱턴의 부인 마사 워싱턴과 친분을 나누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활약하느라 여기저기 옮겨다녔고, 일라이자는 남편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이후 해밀턴은 일라이자가 있는 올버니로 돌아왔고, 미국의 독립 이후 해밀턴 집안은 사교계와 정치계에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해밀턴은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으로 수많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일라이자는 사교계에서 활약하는 한편 남편의 글을 같이 검토하고 대신 출판사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1797년, 알렉산더 해밀턴이 마리아 레이놀즈라는 여성과 6년간 불륜관게에 있었음이 해밀턴 본인의 글을 통해 세상에 밝혀졌다. 미국 최초의 성추문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 때문에 해밀턴은 재무장관 자리에서 불명예 퇴직하게 된다. 일라이자는 처음에는 이 폭로를 믿지 않았지만, 남편의 글을 통해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라이자는 남편을 용서했고 혼인관계를 유지했다.

1801년 여동생 페기가 사망한 데 이어 큰아들 필립이 결투 도중 사망하고, 큰딸 안젤리카는 오빠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평생 동안 남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잇따른 비극 속에서 일라이자는 1802년 막내 아들을 낳고 이름을 필립이라고 짓는다.

1804년 알렉산더 해밀턴은 애런 버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후 일라이자와 일곱 자식들의 곁에서 사망한다. 결투 전 해밀턴은 부인 일라이자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뮤지컬 해밀턴에서도 나오듯 굉장히 절절하다. 편지 원본
사랑하는 일라이자,

내가 세상을 뜨지 않는다면 이 편지는 당신께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구원의 은혜와 신의 가호를 감히 바라며, 행복한 불멸의 삶을 누리고 싶군요.

만일 내가 이 대결을 피할 수만 있었다면, 당신을 향한 사랑과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만으로도 무마시키기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죠, 만일 그래야 했다면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했겠고 나는 당신의 눈에 너무나 모자란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요. 당신을 저버리고 홀로 슬픔 속에 놓아버리는 것에 대해 내가 느끼는 고통은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용기를 저버릴 수밖에 없을까봐 이 문제에 머물지도 못하겠군요.

내 사랑, 종교가 베풀어주는 사랑은 당신을 지탱해주고도 충분하답니다. 당신의 신의 품에 안겨 위안을 얻으세요.

당신을 더 나은 세상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희망은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아듀, Best of wives and best of women. 우리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나 대신 안아 주시오.

항상 당신의,
A. H

2.2. 알렉산더 해밀턴 사후

남편 해밀턴의 죽음을 전후로 일라이자의 부모님 역시 사망했고, 일라이자는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맨해튼에 있는 자신과 남편의 집을 팔아야만 했다.

그러나 일라이자는 자선 활동을 이어갔다. 1806년 그녀는 뉴욕 최초의 고아원인 Orphan Asylum Society의 공동설립자 중 한 명이 된다.[5] 이 고아원은 이름을 Graham Windham으로 바꾸었고 현재도 운영 중이다.

이 외에도 일라이자는 남편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아들 존 해밀턴의 도움을 받아 알렉산더 해밀턴이 생전에 남긴 수많은 양의 글과 편지들을 정리하고 그의 일대기를 편찬했다. 또 그녀는 워싱턴 기념탑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운동에도 힘썼다.

남편의 사망 이후 약 50년을 더 살은 일라이자는 1854년 11월 9일 9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그녀의 유해는 남편과 언니 안젤리카가 묻힌 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된다.


[1] 그녀의 형제자매 중 24살 차이나는 막내동생 캐서린을 제외하면 이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은 없다.[2] 남편 알렉산더 해밀턴이 성 추문으로 인해 불명예 퇴직했다.[3] 1801년 7월 4일 변호사 조지 이커가 알렉산더 해밀턴이 토마스 제퍼슨의 대통령직을 힘으로 뒤엎을 의도가 있다는 모욕적인 주장을 하였다. 1801년 11월 20일 이를 빌미로 스티븐 프라이스와 함께 극장으로 찾아가 결투 신청을 하였고 사흘 후 이커와의 두 번째 결투에서 우측 엉덩이 위로 총알이 몸을 관통하고 왼쪽 팔에 꽂히게 되었다. 14시간 후 1802년 11월 24일 오전 5시에 고모인 안젤리카 스카일러 처치의 자택에서 치료 중 끝내 사망했다.[4] 큰아들 필립이 결투로 사망한 후 태어나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5] 뮤지컬 해밀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인 Who lives, who dies, who tells your story에 나오는 고아원 맞다.